31화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기에 우려는, 되지만, 시도 자체는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위험 부담을 감내하고서라도 도전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성장의 땅’ 입장 직전에 투르바의 뿔을 이식하며 신체 능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긴 했으나, 상대는 무려 200마리가 넘어가는 대군이었으니까.
게다가.
‘특별한 파편’이라고 명시된 정체불명의 적까지 포함된 만큼 이를 이겨 내려면.
“후…….”
콰직―
우드드득―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가리가 박살 난 투르바의 가슴을 찢어 심장을 끄집어냈다.
넝쿨처럼 따라 올라오다 뚝뚝 뜯겨 나가는 혈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시뻘건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심장을 손에 쥐고 있으니 사방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엑!”
아마도.
동족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에 몹시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혹은.
으적―
“으음.”
역겨움을 꾹 참고 심장을 씹어 먹는 ‘프레데터’를 보며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문명화가 이루어진 인간과 달리.
끊임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위기 감지 능력이 매우 매우 뛰어난 편이니까.
그렇게.
꿀꺽―
미끌거리고 질긴 식감을 이겨 내며 마지막 조각까지 삼킨 순간.
[「괴물의 심장」을 섭취했습니다. ]
[마력 순환 속도 및 기술 위력이 150% 향상됩니다.]
“…호?”
눈앞에 두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역시.
괴물의 심장 또한 특별한 효능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오직 치유에 집중되어 있는 인간의 심장과 다르게 보유한 기술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공격, 방어, 회복 등 모든 방면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상당히 포괄적인 쪽으로.
딱.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기 적합한 버프 같았다.
“마력 보유량이 많지 않아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뭐든.
없는 것보단 백배 나을 테니 말이다.
[오르그의 전투 본능]
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앙!!
* * *
“키에에에에―”
“제발.”
후우우우욱―
서걱!
“닥쳐.”
저 멀리 떨어져 가슴을 붉게 물들이며 목청을 가다듬는 투르바 한 마리.
또다시 기술을 발동해 동족을 불러들이기 직전에 재빨리 근접해 아예 대가리를 잘라 버렸다.
쿵―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지는 괴물.
놈을 끝으로 일단락된 전투.
“…후, 다 됐나?”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키메라 ‘프레데터’는 자신이 사냥한 개체의 신체 조직을 흡수해 끊임없이 성장한다……. (자세히 보기 ▼)
┗ 등위 상향에 필요한 평범한 파편 : (32/220)
┗ 등위 상향에 필요한 특별한 파편 : (0/1)
마력도 거의 바닥난 데다가 워낙에 격렬한 운동이었기에 뼈마디까지 찌뿌드드한 몸을 풀어 주며 머릿속으로 ‘전직 퀘스트’ 현황을 떠올리자, 짧게 중략된 화면과 그 아래로 현재까지 사냥한 괴물의 숫자가 보였다.
“서른둘.”
‘성장의 땅’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서른 마리가 넘었다. 평소였다면 하루 종일 걸렸을 수치.
허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렇게나 많이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170여 마리를 더 잡아야 했으니까.
“미쳐 버리겠네.”
막막한 달성률에 아찔해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무릎을 굽혀 바닥에 쓰러져 있던 투르바의 심장을 적출해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 또 괴물과 마주칠지 모르는 바.
피 냄새로 진동하는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버프를 받고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원하던 문장이 출력되지 않았다.
[아직 소화되지 않은 「괴물의 심장」입니다.]
[동일한 종(種), 동일한 등급의 ‘심장’은 60분 후 재섭취가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 45분 22초]
“제한이라니…….”
설마 제약이 있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규정에 침음성을 삼키며 허공을 응시했으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 터라 애써 입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한숨은 좀 나왔지만.
애당초 이런 버프를 제한 없이 사용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데다가 긍정적으로 보면 재차 복용한 덕분에 나름 숨겨진 비밀도 알아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여.
“같은 종, 같은 등급은 쿨타임 한 시간, 버프 유지 시간은 10분.”
새롭게 얻은 정보와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획득한 자료를 취합해 확실하게 뇌리에 각인한 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사지(死地)인 탓에 어디로 가는 게 좋은지 몰라 우선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최소한.
이동 경로상에 존재하는 괴물들만이라도 내가 먼저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 * *
‘쉴 만한 곳이 있으려나.’
끊임없이 나타나는 나무와 풀을 헤쳐 나가며 걷기를 30여 분.
슬슬 체력에 한계가 찾아오는 듯했다.
운이 따라 주어 추가적인 전투는 없었으나,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에서 거칠고 험한 숲을 돌아다니기란 결코 쉽지 않았으니까.
쉴 곳.
단 몇 분이라도 편안하게 지낼 만한 안전한 휴식처가 필요했다. 기왕이면 목을 축이고 피와 냄새를 닦아 낼 물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바스락!
“……?!”
휘익―
느닷없이 들린 소리에 황급히 멈춰 서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온 신경을 바짝 세웠다.
그러자.
찌릿―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사이로 무언가가 잡힌다.
무척이나 낯익은 기운.
‘살기.’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산해 내는 지독한 살의(殺意)였다.
즉.
‘젠장할……!’
적이 등장했다는 뜻이었다.
그 짜증 나는 사실에 욕을 뱉어 내기 무섭게 측면에서 확 하고 새하얀 칼날이 튀어나왔다.
후우욱―
촤좌자자작!!
콰직!
길목에 세워진 초목을 모조리 베어 내며 아름드리나무에 틀어박힌 다섯 자루의 비수.
‘플뤼!’
내 왼팔의 원종(原種)인 플뤼가 날린 손톱이었다.
“츠에에에에엑!!”
쿵―
쿵―
회심이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괴성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내는 놈.
멀쩡히 살아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분노를 토해 낸 플뤼가 곧장 네 개의 다리를 놀리며 거목 사이를 뚫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만 육체에 비해 길이 비좁아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
이에.
나는 작은 여유를 틈타 규모부터 살폈다.
현재 컨디션으로는 대여섯 마리만 출현해도 도망치는 게 답인지라 언제든 도주할 작정으로 오감을 활짝 열고 훑어보는 공간.
‘숫자는… 하나.’
참 다행스럽게도 무리 지어 다니는 투르바나 티그리스와 달리 플뤼는 단독 행동을 하는 타입인지, 예전처럼 혼자서 활동하는 중이었다.
잘됐다.
‘일대일이라면, 잡고 간다.’
검산을 하듯.
몇 차례 더 확인해 본 결과 정말로 혼자라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내친김에 아까 하지 못했던 심장 버프까지 받아 갈 목적으로 지척에 다다른 플뤼를 향해 뛰어들었다.
“츠에에엑!!”
급격하게 간격이 줄어들자 한껏 흥분해 팔을 휘두르는 놈.
반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손톱을 끝까지 바라보다 왼팔을 들어 똑같이 손톱으로 공격을 막아 내고 동시에 오른팔로 복부를 후려치자.
카각―
쿵!
두 차례의 효과음과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츠에엑― 츠에, 츠에엑!”
무지막지한 충격에 허리가 팍 꺾인 채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플뤼.
이 여세를 몰아 단숨에 머리통을 부숴 버리려던 찰나.
“……! 잠시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행동을 멈췄다.
현실처럼 ‘괴물의 심장’도 효력을 보이는 세계이니만큼.
그렇다면.
“여기서도… 특수 퀘스트가 발동되려나?”
혹시 ‘성장의 땅’에서는 ‘특수 퀘스트’도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것이었다.
마침.
플뤼는 추가로 ‘인간성’을 소모하지 않더라도 선결 과제를 알고 있는 상황.
“…해 보자.”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나는 쥐었던 주먹을 풀며 몇 걸음 물러나 플뤼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죽일 각오로 가격했던 탓에 장장 3분여를 낑낑거리다 겨우겨우 일어나는 놈.
“츠에엑, 츠엑…….”
쉽사리 고통이 가시지 않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을 뜨는데,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오로지.
“츠에에에엑!!”
살기만이 가득할 뿐.
쿵―
쿵―
쿵―
촤아아아악!!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듯.
마구잡이로 뻗어 대는 양팔을 피해 버티길 대략 5분 정도 되었을까? 참고 인내하던 감각 망으로 마침내 놈의 오른팔에 마력이 모이는 게 포착됐다.
‘탄성 일격’의 이펙트였다.
투우웅―
그걸 캐치하자마자 일순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쭉 늘어나 내게로 쇄도해 오는 팔.
‘지금!’
이때만을 노리고 있던 나는 타이밍에 맞춰 오른발을 뒤로 빼 회전하며 왼손으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사선으로 쳐 낸 예기(銳氣)를 잔뜩 머금은 손톱이 뭔가를 잘라 낸다.
서걱!
‘됐다!’
묵직한 무게감을 선사하는 플뤼의 팔.
그간에 늘어난 신체 능력과 감각이 빚어낸 작품이 아주 훌륭하게 완성된 것이었다.
툭―
“…츠에에에엑!!”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땅바닥을 구르는 흉측한 살덩어리에 내 시선이 공중으로 치솟는다.
그 자리에는.
[「플뤼」의 ‘탄성 일격’을 사전에 차단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특수 퀘스트〉의 ‘트리거’가 발동되었습니다.]
소망하던 문장의 파도가 날 맞이하고 있었다.
《특수 퀘스트 : 오만한 속도》
- 행성 ‘라티오(Latio)’의 지배종인 「플뤼」는 고무처럼 늘어나는 팔을 사용해 먹잇감을 사냥하는 만큼 자신의 공격 속도에 자신감이 가득한 종족입니다.
이러한 오만에 찌든 「플뤼」들이 당신에게 6회 이상 공격하기 전에 생명을 끊어 내 세상이 넓음을 알려 주십시오.
(0/11)
┗특수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상대의 ‘공격 횟수’가 머리 위로 표시됩니다.
┗남은 시간 : 2일 23시간 59분 59초
“아아…….”
된다.
굉장히 놀랍게도 이 심상의 세계에선 ‘특수 퀘스트’마저 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이것만큼은 불가능하리라 여겼는데.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장면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감탄만 했다.
잘만 풀린다면.
최대 네 개의 ‘특수 퀘스트’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있었으니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더니.”
딱 그 말대로였다.
가슴이 뛴다.
만일.
최상의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연출해 내며 ‘전직 퀘스트’를 마무리한다면, 현실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그 황홀한 기대감에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복수라는 원대한 꿈의 실현 가능성도 커질 테니까.
“…그럼, 반드시 해내야겠네.”
확률이 극히 낮다는 걸 알지만.
나는.
무조건 성공해 내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이번에 불곰파의 진짜 간부 김성태와 싸우며 그들과 나의 차이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니.
벌어져 있는 간극을 단 1cm라도 줄일 기회라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야만 했다.
“그게…….”
[공격 횟수 : 15회]
“츠에에에엑!!”
“너부터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콰직!
한세정의 얼굴에 한층 수심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