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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30화 (30/232)

30화

예감이 맞았음을 증명하듯.

쿵―

큼지막한 괴물의 시체가 묵직한 진동을 일으키며 머리맡에 떨어진다. 죽은 지 얼마 안 돼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어떤 놈일까.

더 정확하게는 종(種)에 대한 궁금증보다 한세정이 어떤 부위를 가져왔을지 더욱 기대하며 고개를 돌린 찰나.

“아.”

나도 모르게 격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정면에.

‘뿔’들이 보였으니까.

그간의 경험이 있는 터라 웬만하면 꼬리를 이식하리라고 예상 중이었는데, 설마 뿔 달린 괴물을 구해 왔을 줄이야.

놀란 마음에 한세정에게로 향하는 시선.

그러자.

“헤헤.”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가 슬쩍 웃는다.

나는 예상치 못한 감동에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네? 아니에요. 이 정도로 뭘…….”

최악을 상정하던 기로에서 최상의 결과가 나왔으니 당장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긴 어렵더라도 감사 표현만큼은 반드시 해야 했다.

한세정은 한사코 손을 저으며 과하다고 말했지만.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네!”

나는 두세 번을 더 고맙다며 인사를 전하고 나서야 팔을 뻗어 뿔을 붙잡고 주문을 외웠다.

[프레데터의 하위 진화론]

[ ‘기술 : 프레데터의 하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흡수 이식]

[대상 「투르바」의 ‘뿔’을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툭―

투둑―

“으음……!”

나지막한 읊조림에 공명하더니 이마가 간지러운 기분과 함께 늘상 겪었던 흐름대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복부의 상처 때문인지.

“흐읍!”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이 평상시보다는 훨씬 심각했다.

“끄으읍, 끄으으으으으!!”

이 수술이 끝난 뒤.

복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또다시 이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질 정도로. 본래의 고통이 수천, 수만 배로 불어나는 아픔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여파로.

[축하합니다!]

[「투르바」의 ‘뿔’ 이식에 성공했습니다.]

[대상 「투르바」가 보유 중이던 신체 능력 일부가 전이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났음을 알리는 문장이 출력되었음에도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그저.

“하아. 하아…….”

강렬하게 남은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고자 호흡하는 게 전부였을 뿐.

도저히.

“아윤 씨… 괜찮으세요?”

다른 무언가를 할 기운이 없었다.

무기력증.

딱 그런 상태였다. 보통이었다면 뒤섞인 신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활력으로 격동했을 육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만 갔다.

그러다.

툭―

어느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아마.

[축하합니다.]

[‘기술 : 프레데터의 하위 진화론’에 명시된…….]

[당신의 「격」이 한계에…….]

저 낯선 문장들이 원인인 것 같았…….

털썩―

* * *

“…아!”

별안간 눈이 번쩍 뜨였다.

한창 잠을 자다가 누군가 깨워 벌떡 일어난 것처럼 갑작스레 돌아온 정신.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데.

뭔가가 조금 이상했다. 아니, 많이 이상했다.

“…여기가, 어디지?”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아파트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웬 절벽 끝자락에 홀로 서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망망대해인 양 지평선마저 녹색으로 넘실거리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수림(大樹林)이 내려다보이는 오지에.

“…….”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광활한 자연환경에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지금부터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을 시작합니다.]

한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주르륵 떠오르는 과거. 하나둘 상기되는 장면 속에는 이식 직후의 장면이 담겨 있었다.

[축하합니다.]

[‘기술 : 프레데터의 하위 진화론’에 명시된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신의 「격」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한계를 뛰어넘을 ‘진정한 진화’를 이루기 위하여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이 발동됩니다.]

[당신의 영혼이 〈성장의 땅〉으로 이동됩니다.]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에 실패할 경우 「인간성」을 상실합니다.]

그래.

이것이었다.

“전직 퀘스트.”

투르바의 뿔을 마지막으로 퍼즐 조각이 맞춰지며 완성된 기술이 내가 이 땅으로 오게 된 이유였다.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키메라 「프레데터」는 자신이 사냥한 개체의 신체 조직을 흡수해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래서였을까. ‘우주의 질서’는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에게 합당한 제약을 선사했으니, 「격의 봉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따라 더 높은 곳, 더 화려한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계라는 이름의 시험을 깨부숴야만 한다.

┗ 등위 상향에 필요한 평범한 파편 : (0/220)

┗ 등위 상향에 필요한 특별한 파편 : (0/1)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56초]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55초]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54초]

“으음.”

주르륵 펼쳐지는 퀘스트 설명까지 확인하고 나니, 당황스럽던 심정이 차츰차츰 안정화되어 간다.

심상 세계가 처음이었다면 모를까.

그저 간단하게 황무지 같던 ‘포식의 땅’ 풍경이 숲으로 바뀌었다고 여기면 될 일이었으니.

단지.

적응과는 별개로 앞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강하게 들었다.

‘기억 포식’은 자의에 의한 입장 방식, 따라서 정 급박하다면 신체 능력 향상 효과만 적용받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전직 퀘스트’는 선택권이라는 게 없다.

하여.

“무조건적인 입장…….”

근거 없이 무작정 ‘등위’를 높여 보겠다고 시도했다간, 상상하는 것 이상의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게 분명했기에 나는 다짐 또 다짐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 곧 전투가 발발할 터, 그 전에 여길 벗어나야 했다.

총 221마리.

숫자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으나 ‘포식의 땅’과 다르게 전투 스케일이 과해도 너무 과하게 커진 터라 저 미친 물량의 적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면 공간적으로 제약이 심한 절벽은 기필코 피해야 할 전장이었다.

다행히 이동하는 데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창이든, 상처든.

심상 세계는 현실의 제약이 따라오지 않는 세상이었으니까.

* * *

[〈전직 퀘스트 : 등위 상향〉 시작까지 남은 시간 : 0초]

[완전히 포식되지 않았던 영혼의 파편들이 당신의 육체를 빼앗기 위해 깨어납니다.]

드디어 선포된 전쟁.

그에 맞춰.

콰앙―!

하늘 높이 솟구치는 거대한 기운이 각기 네 방향으로 갈라지며 공중에 무언가를 그려 낸다.

동서남북으로 오르그, 플뤼, 티그리스, 투르바.

‘저건.’

모두 내가 포식했던 괴물들의 이미지였다.

‘포식의 땅’에서도 그러하듯, ‘성장의 땅’ 역시 나와 관련된 존재들로만 구성되는 모양이다.

‘특별한 파편, 그건 아직 확정할 수 없겠지.’

콰앙!

“……!”

상념을 이어 가던 와중.

굉음과 함께 옆쪽에 늘어서 있던 나무 군락이 부서지며 그 속에서 큼지막한 뭔가가 등장했다.

“키에에에엑!!”

대가리에 뿔이 달린 놈.

투르바였다.

아니.

“키에에엑!!”

“키에에엑!!”

투르바‘들’이었다.

무리 생활을 하던 습성은 심상 세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개 같은 습성이야.”

일순간에 열 마리나 되는 투르바와 마주한 나는 짤막한 욕을 내뱉으며 주먹을 뻗었다.

선수 필승.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웅―

콰아앙!!

마력을 응집해 쏘아 낸 일격이 땅과 격돌해 폭발을 일으키며 투르바 몇 마리를 그대로 소멸시킨다.

무지막지한 위력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놈들.

탓―

“흐읍!”

그사이 자세를 바로 한 나는 발을 크게 내디뎌 도약해 움찔거리던 투르바의 머리통을 왼팔로 갈라 버렸다.

서걱!

촤아아아아악!

사선으로 부드럽게 잘려 나간 혈관이 핏물을 토해 낸다.

묻어서 좋을 게 없는지라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며 회전한 뒤.

“키에에에엑!”

후우욱―

콱!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막 이빨을 들이밀던 놈의 턱을 공격했다.

콰드득!

괴물의 살가죽을 찢고 들어가 두개골마저 박살 내는 손톱. 힘을 줘 아예 주둥이를 네 갈래로 갈라 버리고는 팔꿈치로 복부를 쳐 저 멀리 밀어냈다.

“크엑, 크에에엑…….”

쿵―

쿠웅―

충격을 받아 바닥을 구른 놈이 일어서지 못하고 누운 채로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지른다.

차라리 죽는 게 좋았을 텐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을 보며 혀를 찬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닌 놈을 무시하고 새로운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키에에에에에엑!!”

쿠웅우우우웅―

마력을 동반한 포효가 공간을 휩쓸었다.

“……!”

쭉쭉 퍼져 나가는 파문에 손을 머리로 가져오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기억 포식’을 하지 않은 탓에 어떤 기술을 구사하는지 모르니 물러서야 할지, 나아가야 할지 지켜보다 대처할 요량이었다.

다만.

그게 딱히 좋은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콰앙!

쾅!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에엑!”

투르바가 사용한 기술.

그건.

다름 아닌 동족을 불러들이는 하울링이었으니까.

“이런 미친.”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쿵―

쿠구구구구구궁―

족히 30여 마리는 될 법한 숫자의 투르바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중심에서 나는 발부터 굴러 공간을 뒤집었다.

효과는 엄청났다.

본래도 좋았지만, 수림의 지형적 특성이 더해지며 바윗덩어리와 고목의 나무뿌리 등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들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안도할 여유는 없었다. 마력은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이 파도가 잠잠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수를 줄여야 했다.

[플뤼의 탄성 일격]

“흐읍!”

투우웅―

콰직!

“케엑!”

왼팔이 한 놈의 가슴에 틀어박힌다.

죽지는 않는 상태.

손에 걸리는 뼈와 살점을 움켜쥐고 되돌아오는 팔의 반동을 이용해 놈을 끌어당긴 후, 타이밍에 맞춰 지척에 다다른 대가리를 붙잡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들쑥날쑥하게 솟아 있던 바위와 부딪치며 으깨지는 머리통.

뜨거운 핏물과 뇌수가 후드득 쏟아져 손바닥을 적시고 주위를 붉게 물들인다.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동족의 죽음에 분노한 투르바들이 목청을 높여 괴성을 지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분노, 분노.”

문득.

여기서도 ‘분노 조절 장애’를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세계에서 이성을 잠재운다는 게 꽤나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긴 하다만, 가능하다면야 비장의 한 수쯤으로는 적합할 듯싶었다.

그 전에.

사람의 피와 괴물의 피가 똑같은 효능을 발휘한다는 결과가 있어야겠지만.

“아, 생각난 김에 그것부터 확인해 볼까.”

괴물의 혈액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예전부터 간직해 왔던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심장 복용 효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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