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째깍―
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후, 해 볼게요.”
말없이 앉아 있던 한세정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 끝에.
나를 위해 괴물을 사냥해 오기로 작정한 듯했다.
큰 결심이었다.
지금껏 많은 괴물을 해치웠지만, 그건 철저한 분업을 통해 가능했던 일.
그런 탓에 ‘특수 퀘스트’를 비롯한 근원석 복용으로 적잖은 성장을 거뒀다고 해도 여전히 혼자서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만큼, 최악의 경우 나를 포기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는 쪽으로 결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헌데.
다행스럽게도 한세정은 내게 걸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받은 도움이 더 큰 걸요.”
“그렇다면 부탁하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큼지막한 놈으로 잡아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주세요.”
“예.”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싱긋 웃은 한세정이 거실 한쪽에 내던져 두었던 가방을 챙겼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떠나가는 한세정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끼이이이익―
철컥!
“…….”
굳게 닫힌 현관.
저게 다시 열렸을 때 한세정의 얼굴은 어떠할는지.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묘한 기대감을 동시에 품은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
꿀꺽―
바깥에 나오자마자 들린 괴물들의 포효에 한세정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동안.
족히 수십 마리는 사냥했는데도 마치 처음 전투를 치르러 가는 양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단독 전투라는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 짓눌렸달까.
“쓰읍, 후. 할 수 있어.”
애써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오로지 한 사람을 떠올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조이령.
고등학교 동창,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보통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몸을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탈출을 도왔던 친구.
‘공간 이동? 그런 능력이 있었어? 그럼 당장 탈출해야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들었어. 사흘 후에 착호 부대로 몇몇 사람들을 팔고 식량과 총기를 받아 올 거래.’
‘책임자는 김성원. 잘됐어, 기회야!’
‘그 남자, 우리 같은 노예들이 도망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거든. 잡으러 가는 게 꼭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
‘아마 떠나기 전에 날 찾아올 텐데, 그때 잘 구슬려 볼게.’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동창이라는 사실을 흘리고 세정이 네가 나한테 같이 도망가자며 설득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넘어갈지도 몰라. 최근에 아무도 도망친 사람이 없어서 몸이 달아 있다고 했거든.’
‘위험하지, 그래도 해야 돼. 가만히 있으면 결국 이 지옥에 남을 뿐이야.’
‘더 가능성 높은 너라도 꼭 사람답게 살아 줬으면 좋겠어. 할 수 있지?’
유약해 보이던 외모와 달리.
제법 계산적인 설계와 과감한 도박 수를 더해 기어코 지옥의 탈출로를 열어 주었던 첫 번째 구원자의 이름을.
“할 수 있어…….”
주문을 외듯.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되뇌며 주먹을 꽉 쥔 한세정은 먼저 아윤과 불곰파가 전쟁을 벌였던 곳으로 향했다.
큼지막하게 부서진 대지와 들쭉날쭉하게 솟아난 바위들로 아수라장이 돼 버린 공간.
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불곰파라면, 한 명쯤은 더 있을 거야.’
아윤에게서 저들의 정체가 불곰파라는 걸 들었을 때.
그의 몸에 박힌 창을 보며 생각했다. 누구든 한 명쯤은 더 무기다운 무기를, 즉 ‘아이템’을 보유했을 거라고.
따로 확신은 없었다.
단지.
있다면 좋다고 여겼을 뿐.
그래서 오게 되었고.
간절한 소망을 품고 수색을 나섰던 그녀는 곧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제발, 제발……. 아!’
멀지 않은 화단에 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칼 한 자루가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상상이.
아니, 소망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었다.
《괴물 사냥용 철검》
-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제작된 철검. 보급품인 탓에 성능이 좋진 않으니 사용하는 데 있어 유의하길 바란다. 사용자의 근력이 5 상승한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아이템……!’
급히 다가가 손에 쥐자 작은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나더니 설명대로 전신의 근육이 바짝 조여지는 게 느껴진다.
진정 ‘차원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아이템이 확실했다.
오길 잘했다.
‘이거라면…….’
손에 탁 느껴지는 진한 무게감에 아이러니하게도 어깨 위로 한가득 내려앉았던 부담감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칼 한 자루 쥐었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생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 따위보다는 훨씬 유용하리란 걸 알기에.
하여.
한층 자신감이 생긴 한세정은 좀 더 주위를 둘러보다 칼집마저 챙기고는 슬슬 포효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키에에에엑!!”
“키에엑!”
천천히 줄어드는 간격 너머로 101동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조금 전.
전장을 덮쳤던 그놈들이었다.
창에 맞아 쓰러졌던 아윤을 데리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음 미끼 작전에 쓰일 사체를 늘어놓은 101동에 들렀었는데, 꽤나 만족스러운 먹잇감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위치가 고정된 상태.
그런 데다가.
‘…뿔이 있다!’
아까는 도망에 주력하느라 제대로 확인을 못 했는데, 이제 보니 손가락 하나 크기라고는 해도 아윤이 원하던 뿔이 존재했다.
베스트였다.
가급적이면 꼬리보다는 뿔을 선호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지.
‘…열하나, 열둘.’
문제는 괴물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머리를 싸매던 한세정은 지난날 괴인들과 벌였던 전쟁 당시 써먹었던 전술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유인, 그걸로 가야겠어.’
작전명 이중 유인.
문자 그대로 두 번의 유인책을 동시에 활용해 다수의 적을 적절히 갈라놓는 작전이었다.
우우우웅―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계획을 정한 한세정이 곧바로 마력을 소모해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던 차량 한 대를 최대한 멀리 날려 보냈다.
부우우웅―
콰아앙!!
그 바람에 별안간 공중에서 등장한 차량이 지상으로 추락하며 굉음을 터트리자.
“키에에엑!”
“키엑!”
느닷없는 사태에 벌떡 일어난 괴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귀신에 홀린 듯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새로운 먹잇감의 출현이라 여겼으리라.
한세정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후미가 가까워지는 타이밍에 맞춰 102동 2층 계단 난간을 두들겼다.
캉―
그러자.
“키엑?”
막 앞을 지나쳐 가던 괴물 하나가 급격히 발을 멈추더니 대가리를 홱 돌리고는 무리와 떨어져 102동 쪽으로 다가온다.
두 개의 소리를 이용한 이중 유인 작전이 훌륭하게 먹혀든 것이다.
이에.
속으로 박수를 치고 싶었으나.
‘됐어, 이제…….’
도리어 한세정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키에엑!”
‘아!’
무리를 이탈하는 괴물을 따라 또 다른 괴물 하나가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중 유인에 걸렸다기보다는 그저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쫓아오는 눈치였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두 마리라는 사실이 중요한 바.
안 그래도 차량에 어그로가 끌린 나머지 괴물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전투를 끝마쳐야 하는 처지라 되도록 하나만 걸려들길 바랐거늘.
하지만 어쩌랴.
‘…해 보자.’
작전을 다시 시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음에 더 좋은 환경에 놓일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고, 게다가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런 점, 저런 점 고르고 고르다 만약 아윤이 죽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니.
그나마 더 늘어나지 않음에 감사한 한세정은 이를 악물고 102동을 오르며 계속해서 유인 작전을 이어 나갔다.
캉―
캉―
“키에에엑!”
“키에엑!”
2~3층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에 맞대응하듯 울부짖으며 추격해 오는 괴물 두 마리가 13층에 다다랐을 무렵.
‘흐읍!’
앞서가다 몸을 틀어 복도에 잠복한 한세정이 호흡을 확 들이켜며 선두에 있던 괴물에게로 달려들었다.
슈화악!
갑작스레 이루어진 기습.
길쭉하게 뻗은 칼날이 아이템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며 괴물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간다.
허나.
낯선 탓일까.
서걱!
“키에에엑!!”
‘앗!’
목표한 바와 다르게 칼날은 어깨 근처를 베고 지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위기였다.
공격을 실패한 순간 비어 버린 방어를 치고 들어온다면 이렇다 할 보호 장비조차 없는 인간의 몸으로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
[단거리 공간 이동]
우우웅―
번쩍!
한세정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유 능력’을 전개했다.
“키에에엑!”
후우우욱―
쾅!
늘상 해 왔던 대로 애당초 상대가 죽든 말든 공격 직후 공간 이동으로 빠져나갈 요량이었던 터라, 늦지 않게 회피에 성공하자 애꿎은 벽을 후려친 괴물이 잔뜩 성을 내며 사라진 먹잇감을 찾아 대가리를 휙휙 돌린다.
그사이.
위층으로 도망쳤던 한세정이 챙겨 온 가방을 열어 반투명한 케이스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특이하게도 손잡이가 제거되어 칼날만 덩그러니 남은 식칼이 약 서른 자루쯤 들어 있었다.
이걸로 뭘 하려는 걸까.
스윽―
대충 가까운 쪽에서부터 몇 자루를 꺼내 든 한세정은 익숙하게 자세를 잡더니.
쉬이이익―
쉬익―
괴물들을 향해 칼날을 던졌다.
마력이 다 떨어졌을 시를 대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연습했던 투척술, 그 노력이 빛을 발하듯…….
퍽!
퍽!
“키에에엑!!”
시원하게 날아간 두 자루가 괴물의 몸통을 가르며 깊숙하게 틀어박혔다.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체 능력에 ‘괴물 사냥용 철검’의 근력 상승 효과가 더해진 강력한 투척술은 제아무리 외계 생명체의 가죽일지라도 단숨에 뚫어 냈다.
더군다나.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식칼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아윤의 조언을 받아들여 흡사 암살자가 독 발린 무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사전에 락스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물질을 머금은 특별한 칼날이었다.
그 자그마한 차이는.
“키엑! 키에엑, 키엑…….”
설령 아이템이 아닐지라도 괴물들에게 톡톡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됐어!!’
답이 보인다.
괴로워하는 괴물의 몸짓에 한껏 고취된 한세정이 새로운 투척용 식칼을 꺼내 들 때쯤, 무력화된 놈을 제치고 다른 괴물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어딜!’
타다닷―
후욱!
한세정이 냅다 14층에서 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탓―
“체크메이트.”
“키에엑!”
순식간에 위치가 전환된 전장.
후우우욱―
서걱!
정확하게 휘둘러진 철검이 곡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괴물의 대가리를 갈라냈다.
툭―
촤아아아아악!!
퍽 하고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핏물.
그런데.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역하고 혐오스럽기보다는 장비로 된 길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 성장의 땅 】
철컥―
“세정 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조한 기다림 끝에 문이 열리고 한세정이 들어왔다.
나는.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가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아윤 씨!”
귀환하는 목소리에 깃든 당당함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