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간부 】
누군가 그랬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갑게.」
어떤 경우라도 한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일을 그르치지 말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올바르게 해결하라고.
나도 잘 안다.
그게 옳다는 걸.
하지만.
세상이 늘 옳은 쪽으로, 합리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실수라는 단어, 후회라는 단어, 회한이라는 단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계 이상의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상태 이상 : 분노 조절 장애’가 발동합니다.]
[당신의 「이성」이 잠시 눈을 감습니다.]
[영혼 깊숙이 잠들어 있던 「프레데터」의 온전한 힘이 깨어납니다.]
[「이성 상실」 보상으로 보유한 마력 수치의 두 배만큼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콰드드득―
이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분노는 결국 인간 아윤을 잠재우고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괴물을 일으켜 세웠다.
오로지.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선 「혈액」을 섭취하거나 중위 등급 이상의 회복 주문이 필요합니다.]
피와 살육만을 쫓는 존재를.
“죽여, 버린다.”
콰앙!
티그리스의 육체를 이식하며 무려 20%나 소실된 ‘인간성’으로는, 더 이상 ‘미약한’이라는 수식어조차 사라진 정신병을 이겨 낼 수 없었다.
* * *
“얼마나 남았나.”
“다, 다 와 갑니다! 그 여자의 피가 이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심장이 심하게 떨리는 걸 보면 못해도 100m 안쪽입니다!”
불곰파의 이창렬.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스토킹 살해범으로, 종말 이후에는 그 전과를 통해 상대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고유 능력 ‘블러드 스토킹’을 얻어 불곰파의 추적조원이 된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음성에 부리나케 대답하며 심장의 떨림에 귀를 기울였다.
어서.
한시라도 빨리 목표물을 잡아내고 팠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김성태로부터 간부 자리를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씨X, 간부만 되면… 나도 마음대로…….’
식량과 식수는 둘째치고.
며칠에 한 번씩이라도 깨끗하게 씻을 물도 제공되는 데다가 무엇보다 상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아랫것들을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권력마저 얻는 간부직.
사실상 천국 입장권과 같은 그 자리가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하여.
‘어디냐, 어디냐!’
쿵쾅―
쿵쾅―
어느 때보다 더욱 집중하며 강하게 떨리는 심장의 울림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90m, 80m, 70m…….
목표물과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이창렬의 입가에 새겨지는 미소가 짙어졌다.
다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성태가 바라는 건 자신이 추적 가능한 한세정이 아니라, 의제인 김성원을 죽인 살해자.
일단은 같이 도주했으니 지금도 같이 있지 않겠느냐는 가정 아래 불곰파 내에서 보관 중이던 혈액을 마시고 쫓고는 있으나…….
만약 김성원 살해범과 여자가 갈라서기라도 해서 막상 목표를 붙잡는 데 성공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약속을 깨 버리면 어쩌나 불안했다.
‘에이, 설마…….’
휘휘―
괜히 안 좋은 쪽으로 이어지는 상상에 머리를 저으며 억지로 잡념을 털어 낸 이창렬은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부르르르―
“음?”
갑작스레 몸이 파르르 떨렸다.
왜지?
옷도 꽤나 두껍게 입었거니와 몰래 꿍쳐 두었던 핫 팩까지 여러 장 붙여 둔 터라 딱히 춥지도 않았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부르르르―
흡사 몸살에 걸린 것처럼 전신이 달달 떨렸다.
헌데.
더 놀라운 건.
“뭐지? 나 갑자기 몸이…….”
“응? 너도 그래? 나도.”
“……?”
뒤따라오던 동료들 역시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는 점이었다.
족히.
열 명에 이르는 인원이 전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아해진 이창렬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욕먹을 걸 각오하고서라도 전진을 멈췄다. 욕이야 몇 번이고 처먹을 수 있지만, 목숨은 한 번 끊기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저기, 성태 형님. 지금… 음?”
서서히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차에 동공 너머로 무언가가 보였다.
작지만 아주 선명한.
‘빛?’
그래.
빛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아가.
‘…커진, 다?’
급속도로 크기를 불려 가는 새하얀 빛무리였다.
후우우우우웅―
콰아아앙!!
* * *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쥐새끼.’
묵묵히 추적대의 뒤를 쫓아가던 김성태는 이제 곧 목표가 코앞이라는 사실에 조금씩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이때를 위해 꾹꾹 억눌러 놓았던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이었다.
꽈아아악―
창을 쥔 손에도 힘이 바짝 들어간다.
언제든, 누구든 단번에 찢어 죽일 수 있게끔.
물론.
쉽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머리가 박살 나 처참하게 죽어 버린 동생의 원혼을 달래 주려면, 최소한 상대의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애원이 흘러나올 때까지는 짓이겨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이승에 남은 의형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절대로.
‘살점 하나하나 나눠 주마.’
절대로 고이 보내 주지 않으리.
파직―
‘……?’
몇 번이고 다짐하며 걷던 김성태는 별안간 가슴에 묘한 전류가 튀는 걸 느꼈다.
그 짜릿한 감각에 자연스레 창을 들어 올렸다.
10여 년간 죽음이 난무하던 뒷골목을 구르다 보니 본능적으로 이러한 신호가 누군가 내 목을 노리려 함이라는 걸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파직!
파직!
‘놈인가?’
이제는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거세진 전류에 김성태는 주변을 돌아보며 기원했다.
제발 이 신호의 정체가 그 쥐새끼이기를.
놈이.
동생을 노렸던 것처럼 도망치지 말고 나를 공격해 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전투태세를 취한 찰나.
콰아아아앙!!
전면에서 거대한 빛무리가 폭발했다.
“끄아아아악!!”
“아, 아아, 아아아!!”
“다리! 다리이이이!!”
확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로 비명이 난무한다.
“이, 이게 대체…….”
“시야부터 확보해!”
“예옛!”
휘우우우욱!
화르륵!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하는 조직원들을 다그치자 직접적으로 폭발에 휘말린 추적조와 다르게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간 덕분에 운 좋게 폭발 범위에서 벗어났던 전투조원 중 불과 바람을 다루는 이들이 앞으로 나서서 공간을 밝혔다.
허나.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의문이었다.
확보된 시야는 불곰파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후우우욱―
콰직!
“아.”
한창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치우던 남자는 제 역할을 마치기 무섭게 살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칼날과 마주했다.
부지불식간에 정확히 왼쪽 가슴을 찢은 칼날은 수많은 혈관과 신경을 끊어 놓으며 무언가를 뽑아냈다.
여전히.
힘차게 박동 중인 심장이었다.
쿵―
쿵―
“아… 아아…….”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져가지 말라고,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라고.
그게.
“아, 아아…….”
털썩―
남자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형철, 형철아… 형철아!”
바람 빠진 풍선같이 쓰러지는 남자를 향해 울부짖는 동료.
손에서 불을 일으키던 그는 남자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바닥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형철’이라는 이름만 반복적으로 외쳐 댔다.
핏물을 머금은 칼날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지 못한 채.
“형철…….”
서걱―
툭―
목이 잘리는 최후까지.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두 명의 희생 덕택에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까.
단지.
“괴물, 괴물이다!!”
“사람, 아니야?”
“사람이라고? 저게 어떻게 사람이야! 괴물이지!”
“대가리가 사람이잖아!”
“그건…….”
정체를 확인했다고 해서 혼란이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잡종이 따로 없군.”
김성태는 인간과 괴물이 기괴하게 뒤섞인 형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것보다.
아무리 봐도 원하던 대상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듣기로 당시 동생과 함께 추격에 나섰던 놈들이 여자를 데려간 인물은 건장한 남자라고 했으니까.
상대가 워낙 도망에만 주력했던 데다가 천막으로나 쓸 법한 장포 따위를 두르고 있던 탓에 제대로 살펴보진 못했지만, 저 정도로 특이한 형상이었더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한들 못 알아볼 리가 없을 터.
따라서.
“죽여.”
“옛!”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뭐가 되었든.
추적을 방해한 이상 이 땅에서 지워 버리라고. 김성태에게는 눈앞의 괴물도, 기습으로 죽어 나간 조직원들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의제의 살해범을 찾는 데 몰두할 뿐이었다.
“고맙다, 김성태.”
“……?”
괴물의 입에서.
너무나도 또렷한 사람의 음성이, 나아가 자신의 이름이 들리기 전까지 말이다.
* * *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혈액」을 흡수했습니다.]
[‘상태 이상 : 분노 조절 장애’가 사라집니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으로 몇 사람을 소멸시키고, 이후 둘을 베어 넘기며 쏟아진 핏물을 삼켜 이성을 되찾을 즈음.
“죽여.”
첫 번째로 전달된 목소리의 주인이 김성태였던 건.
우연이든 운명이든 나는 다 좋았다.
그가 살아 있었기에.
괴물이 되어 미쳐 날뛰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전 날.
‘누나의 동생으로서 복수할게.’
누나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으니까.
“고맙다. 김성태.”
“……?”
그러한 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건넨 한마디에 김성태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이렇게 생겨서 사람처럼 말을 하니 놀랄 만도 했다.
특히.
많고 많은 단어 중에 하필 본인의 이름이 나왔으니.
“…너, 뭐지?”
저리 반응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더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허나.
우리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죽여라!”
“하아!”
“으아아아아, 뒈져!!”
김성태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 달려든 탓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본격적인 대화는 조금 미뤄야 할 듯싶었다. 다만 이런 상황이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이마에 ‘火’자를 새겨 넣은 놈들은 모조리 찢어 죽일 예정이었으니까.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툭―
쿠구구구구구궁―!
그 염원을 담아 내디딘 발걸음에 맞춰 대지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마치 파도가 이는 양.
직경 15m에 이르는 비틀림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물론 불곰파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허무하게 쓰러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되레.
“뭣들 해!”
“놀러 왔냐, 이 새끼들아! 공격하라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딱.
플러스 효과가 발현되기 전까지는.
쾅!
쾅!
쾅!
“뭐, 뭐야!”
“바위가, 바위가!”
“벗어나!”
“끄아아악!!”
요동치는 마력을 양분 삼아 치솟아 오르는 바위는 전장을 금세 아수라장으로 바꿔 놓았다.
당황한 기색으로 벗어나려는 이들, 바위에 치여 비명을 지르는 이들, 아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 터져 주는 이들까지.
가지각색으로 날뛰는 사람들의 행위는 가히 한 편의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아니.
지옥도라기보다는.
씨익―
아주아주 행복한 미소를 그리게 만드는 절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