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시작하시죠.’
‘네.’
자욱하게 드리운 구름이 달빛마저 집어삼킬 즈음, 신호를 받은 한세정이 들고 있던 골프채로 계단 난간을 가볍게 두들긴다.
깡―
고요하던 세상에 울려 퍼지는 소음.
딱히 크지도 않았거늘.
날카로운 파동은 바람을 타고 전달되어 주변을 배회하던 괴인 몇을 101동으로 끌어당겼다.
그 수가 정확히 넷.
이를 지켜보던 한세정은 괴인들이 1층에 다다르자 지체 없이 물러나더니.
깡―
한달음에 4층까지 올라서서 다시금 난간을 두드려 소음을 일으켰다.
처음보다 작게.
허나.
101동 안으로 들어선 괴인들에게는 분명하게 들리도록.
“그어어어어!!”
“으어어어어…….”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었는지.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음에도 한세정의 뒤를 쫓아오는 괴인들.
그렇게.
잡힐 듯 잡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며 앞다투어 101동을 등반해 어느덧 10층에 올라설 무렵.
어둠 가운데 빛이 번뜩였다.
번쩍―
“그어억…….”
“으어…….”
풀숲에 도사리던 독사의 이빨처럼 느닷없이 점화된 다섯 줄기의 빛은 오직 위만 바라보며 달려오던 괴인들의 심장을 덮쳤다.
촤아아아아악!!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후두둑―
후둑―
별안간 솟구쳤던 빛이 사라진 자리로 핏줄기가 쏟아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좋아.’
나는 맥없이 쓰러지는 괴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인에 이은 암살이 계획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런 식으로 사냥을 이어 갈 수만 있다면 사흘이 아니라 하루 만에 퀘스트를 클리어해 버리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했다.
아니.
확실하다. 마력 수치가 낮아 회복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빠듯할지라도 실수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엔 하룻밤이면 적당하다.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을 테니…….’
결심이 섰다.
그 직후.
내 눈에 불이 피어올랐다.
* * *
서서히 아침 해가 떠오르던 시점.
콰직―
쿵―
철썩!
점차 사라져 가는 어둠의 빈자리를 찾아 쓰러진 괴인의 몸뚱어리가 잔잔한 물가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계단 아래로 흐르던 핏물을 한바탕 흔들어 놓는다.
그 참상 곁에 서서 손끝에 남은 흔적을 털어 낸 나는 뻐근해진 어깨를 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탁―
탁―
“서른, 끝.”
기어코.
이 밤이 가기 전에 할당된 목표를 모두 채웠다고.
그와 동시에.
〈특수 퀘스트 : 포타스의 번식〉
- 행성 ‘팔라니오(Pallanio)’의 지배종인 「포타스」는 번식을 위해 사방에 포자를 뿌린다. 이때 퍼져 나간 포자는 생명체의 뇌에 자리 잡고 숙주의 생명력을 빨아 먹으며 600시간의 숙성 기간을 거쳐 「포터스」로 진화할 ‘뿌리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기회는 곧 위기. ‘뿌리의 기회’를 얻은 포자가 발아하기 위해선 반드시 마력을 보유한 개체를 잡아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뿌리의 기회’를 얻은 포자를 사냥할 시 ‘특수 퀘스트 : 포타스의 번식’이 발동된다.
(30/30)
- 완료!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 포타스의 번식〉을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업적에 걸맞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으로 ‘칭호 : 포타스의 적수’를 습득합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2씩 상승합니다.]
[보상으로 ‘복종의 씨앗’을 습득합니다.]
《칭호 : 포타스의 적수》
- 특별한 업적을 달성한 대상에게 부여되는 칭호. 칭호 습득자를 기준으로 1km 범위에 존재하는 「포타스」 위치를 감지한다.
또한, 「포타스」 또는 ‘복종 포자’에 지배당하는 하수인을 상대로 전투가 일어날 경우 모든 신체 능력이 5% 상승한다.
밀려오는 문장의 파도 속에서, 나는 굉장한 보상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게 특수 퀘스트인가……? 생각보다도 더 많아.’
당연히 평범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밤새 노력해서 마무리 지은 보람이 팍팍 느껴지는 성과에 반사적으로 오르그와 플뤼의 ‘특수 퀘스트’ 발동 조건이 떠올랐다.
결코 쉽진 않겠지만.
하나만 클리어해도 이러할진대, 여기에 남은 두 가지마저 모두 달성해 낸다면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어.’
입맛이 동한다.
퀘스트를 하나하나 깨부숴 나갈 때마다 달라질 내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그래서였을까.
‘더는 못 하는 건가?’
불현듯 반복 가능성에 관한 의문이 들었다.
오르그나 플뤼에 비해 포타스의 ‘특수 퀘스트’는 발동 조건도 그렇고 클리어 방법까지 전체적으로 무난한 난이도였다.
받은 보상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때문에.
기회만 주어진다면 몇 번이고 재도전하고 싶었다. 약속과 달리 한세정에게 턴을 넘기지 않고 홀로 독차지하고픈 욕심이 생길 정도로.
다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향후 7일간 〈특수 퀘스트 : 포타스의 번식〉 진행 자격이 봉인됩니다.]
뒤늦게 출력된 문장을 통해 재도전 자체는 가능하되, 당장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쯧, 유예 기간이라니.’
너무나도 아쉬운 내용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7일.
엄청난 보상을 고려해 억지로 참고 견딘다면 못 기다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묶여 있을 시간에 차라리 여길 정리하고서 안정적인 거점을 중심으로 다른 괴물을 사냥하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탓에.
한껏 달아오르던 감정이 급속도로 식어 버린 나는 애써 헛헛한 기색을 털어 내며 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큼지막한 오른손 위에 놓여 유난히 더 작게만 보이는 씨앗 하나.
‘복종의 씨앗, 이었나.’
종말 이후.
근원석을 제외하고서 처음으로 손에 넣은 아이템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김성원과의 전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괴물의 가죽조차 손쉽게 갈라 버리는 단검과 특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대신하여 부서졌던 반지의 존재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비슷하기만 해도 좋을 텐데.’
근원석을 수십 개나 바치고서야 구매했다는 아이템과 얼추 비등한 효과라도 가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리라는 심정으로 씨앗의 정보를 확인했다.
《복종의 씨앗》
- 행성 ‘팔라니오(Pallanio)’의 지배종인 「포타스」의 번식에 쓰이는 씨앗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복종 포자’라고도 불리며, 내부에 「포타스」의 에너지가 잠들어 있어 복용 시 복용자의 ‘마력’을 상승시킨다.
또한 본래의 목적대로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흡수시킬 시 명령을 따르는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으나, 이 경우 사용 전에 씨앗에 지배자가 될 인물의 ‘혈액’을 묻혀야 한다.
‘으음.’
쭉 읽어 보니 역시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민간인 혹은 아무 능력도 없는 짐승에게나 쓸 법한 효과인 탓에 복용하는 길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하나를 추가한다면.
갖고 있다가 ‘차원 상점’에 판매하는 것?
하여.
우득―
긴 고민 없이 바로 삼켜 버렸다.
근원석이나 다를 바 없다면 미래보다는 현재의 성장을 위해 능력치로 치환하는 게 더 좋다고 판단…….
[‘복종의 씨앗’을 복용했습니다.]
[마력이 5 상승합니다.]
‘호?’
크게 기대하지 않고 씨앗을 먹어 치우던 나는 뜨거워지는 복부에 맞춰 등장한 문장에 적잖게 놀랐다.
1이나 2.
아무리 많아도 3 이상 증가하진 않을 거로 예측했는데, 보란 듯이 무려 5나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현재 내 마력은 17.
‘오르그의 파괴 본능’을 습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작 4에 불과했던 게 10이나 향상된 상태였다.
이에.
‘이러면… 최소 단위로 잡았을 때 탄성 일격은 다섯 번 가까이, 파괴 본능도 세 번은 쓸 수 있다!’
반사적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본 나는 마력에 구애받지 않고 기술을 남발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꿀꺽―
쾅!
쾅!
쾅!
몰아치는 폭발과 퍼져 나가는 충격파.
대지가 갈라지고 괴물들의 살점이 찢겨 나가는 모습을 단지 상상했을 뿐인데 절로 전율이 일었고 몸이 근질거렸다.
물론.
본능에 이끌려 날뛸 생각은 1도 없었다. 오히려 이성이 흔들릴수록 더욱 단단하게 정신을 붙잡으려 했다.
여전히.
내가 약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 * *
“슬슬, 유인하러 가시죠.”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나갔는지.
검붉은 빛을 뿌리며 금세 저물어 버린 태양을 지켜보다 한세정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니, 준비하라고.
“…네!”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된 탓인지 잔뜩 굳어 있는 한세정을 데리고 조심스레 101동을 벗어났다.
퀘스트 진행 과정에서 근방의 괴인들을 모조리 사냥한 터라 새로운 먹잇감부터 구해야 했다.
어떻게?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저기 있네.’
우선 대부분의 괴인이 몰려 있는 102동으로 이동한 후, 득실거리는 사냥감을 발견하게 되면.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웅―
콰앙!
망설임 없이 어그로용 기술을 발동.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더없이 시끄러운 한 방에 이어 일부러 모습까지 보여 주며 괴인들을 자극하고서 미친 듯이 따라오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다가.
“할게요!”
“예.”
번쩍!
탁―
101동 근방에서 공간 이동으로 숨어 버린다.
극히 심플한 방식이었으나.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이렇게만 해 둬도 소실되었던 사냥터를 활성화하기에는 충분했다.
“머리 외에는 노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잘라 내지 않는 한 골프채로는 별 의미 없을 테니까요.”
“알겠어요.”
“위험할 경우 바로 동참하겠습니다. 신호는 공간 이동으로 하겠습니다.”
“후읍, 후, 후읍, 후……. 네!”
“그럼.”
단숨에 채워진 공간을 지켜보며 몇 가지 규칙을 정한 나는 더더욱 얼어붙은 표정으로 숨을 고르는 한세정을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저대로 전투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조금 걱정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고유 능력’을 얻으며, 또 그 이후에 ‘튜토리얼’을 겪으며 이미 두 차례나 괴물과 싸워 승리한 여인 아니던가.
그에 비하면 겨우 인간에 불과한 괴인들 따위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예감은.
깡―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흐으읍!”
후우우우욱―
퍽!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흐읍!”
한세정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괴인들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싸워 나갔다.
“흐으읍!”
뻐걱!
콰직―
따로 자극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으나.
정 떨린다면.
‘불곰파라고 생각하십시오.’
저 괴인들을 최악의 개새끼들처럼 여기라고 했던 얘기가.
“주그어어……!”
콰직!
콰직!
그녀를 제대로 각성시킨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와 살점에 떨리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힘없이 무너지려던 육체는 굳건하게 세워졌다.
두려운 와중에도 이 악물고 버티며 골프채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 선 기사처럼 담대했다.
그렇게.
우리의 전쟁은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