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후욱―
느닷없는 뇌의 떨림에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윤 씨? 아윤 씨!”
뒤따라 나오던 한세정이 이런 나를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지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다.
지이이잉―
지잉―
머릿속의 진동이 더욱 심해진다고 느껴진 찰나.
탁―
전구에 불이 켜지듯 두 개의 영상이 나타나 시야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이건!’
기억.
양팔에 잠들어 있던 기억 일부가 떠오르고 있단 뜻이었다.
그래서.
‘이게 왜 지금……?’
너무나도 의아했다.
겨우 한 번 경험해 봤을 뿐이나, 이 ‘기억 회상’이 결코 제멋대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육체의 원주인이 과거에 겪었던 상황과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이 최소한 엇비슷하게라도 맞아떨어져야 체험 가능한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따라서 그저 문을 열고 나가는 것 정도로는 기억 회상이 일어날 리가…….
[축하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당신의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었습니다.]
[특수한 조건을 달성한 당신에게 ‘칭호 : 비밀을 엿본 자’를 부여합니다.]
[특수 조건 1 : 종족 ‘프레데터’로의 진화.]
[특수 조건 2 : 외부의 도움 없이 오직 본인의 힘으로 ‘특수 퀘스트’ 발견.]
[‘개인 정보’에 새로운 항목이 개설됩니다.]
[칭호의 효과로 기술 ‘비밀 엿보기’를 습득합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또! 게다가… 칭호?’
무척 당황스러운 가운데 나타난 몇 줄의 문장.
본능적으로 현 사태에 대한 대답이 적혀 있을 거라 직감하고서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나는 또다시 등장한 단어와 처음 보는 단어의 조합에 그제야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
《기술 : 비밀 엿보기》
- 특별한 조건을 달성한 대상에게 부여되는 능력. 칭호의 소유자가 「프레데터」임을 고려해 일부 양식이 변경되었다.
‘인간성’의 5%를 소모해 이식된 육체를 통해 각 종(種)의 〈특수 퀘스트〉 발동 조건을 알아낸다. 단, 격이 다른 등급의 육체는 읽지 못한다.
[‘기술 : 비밀 엿보기’의 습득을 축하하며, 처음 1회에 한하여 대가 제공 없이 엿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오르그」의 오른팔, 「플뤼」의 왼팔에 숨겨진 비밀이 공개됩니다.]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 * *
“아윤 씨, 괜찮아요?”
“예. 아마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니 가시죠.”
“조금 쉬었다가 해도…….”
“어차피 어디든 찾아서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옥상에서 버티기엔 추위 때문에 몸만 더 상할 겁니다.”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미심쩍은 혹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세정을 뒤로하고 15층 복도에 발을 디뎠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조금 전에 떠올랐던 기억들을 되짚어 갔다. 두 개의 과거가 한꺼번에 얽히고설킨 탓에 제대로 보기는커녕 빈혈처럼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하는 데에 몰두했던 터라 마치 처음 접하는 느낌을 받으며.
‘오르그는… 진짜 오르그답네.’
먼저 살펴본 오르그의 ‘특수 퀘스트’ 발동 조건은 정말이지 오르그라는 괴물의 특성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었다.
압도적인 근력으로 상대를 찢어발기는 놈과.
‘일대일 힘겨루기라니.’
양손을 맞잡고 근력 싸움을 벌여야 했으니까.
하나도 아니고 반드시 양손을 맞부딪쳐야만 하는, 보기에 따라 까다롭다면 까다롭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방식이었다.
또한.
이러한 특이성은 뒤이어 열람한 플뤼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술이 날아올 때 팔을 정확히 잘라 내기, 라……. 평범한 게 없네. 평범한 게.’
플뤼의 ‘특수 퀘스트’를 발동시키려면, 고무처럼 늘려 쏘아 낸 팔이 어딘가에 닿기 전에 갈라 버려야 했으니 말이다.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허나.
쭉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1501호에 닿는 내내 내 표정은 밝았다. 난이도가 어떻든 간에 일단 발동 조건을 알아냈다는 사실 자체가 심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정보는 곧 성장력.
더군다나.
앞으로도 ‘새로운 종(種)의 육체 이식’과 ‘인간성’이라는 요소만 충족된다면 정보는 계속 쌓이게 될 테니 기분 나쁠 리가 있나.
단지.
마지막 조항이 조금 걸릴 뿐.
‘격이 다른 등급의 육체는 읽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이지?’
뭘 의미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괴물을 죽이고 추출한 근원석도 분명하게 ‘등급’이 나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언젠가는 지금의 괴물들보다 등급이 높은, 훨씬 더 강한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소리인가?
‘…준비해 둬야겠어.’
불곰파에 잡혀 있을 당시에도.
노인의 도움을 받아 새 삶을 시작할 때에도 이에 대한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던 만큼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불안한 근거가 생긴 이상 당장 내일이라도 일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복수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가로막히지 않도록.
그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잡아먹히지 않으려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두드려, 볼까요?”
홀로 상념을 정리하는 사이 도착한 1501호.
운 좋게도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보며 한세정이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며 옆으로 물러나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자.
똑―
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서 훌쩍 물러나는 그녀.
전투가 벌어졌을 때 걸리적거리지 않으면서도 소음을 듣고 몰려오는 다른 적은 없는지 경계하려는 행동이었다.
다만.
“아무 반응도 없군요.”
1501호는 아주 조용했다.
아무래도.
“진입하겠습니다.”
직접 들어가 봐야 할 듯하여 한세정에게 후방 경계를 맡기고 문을 훌쩍 열어젖히며 내부로 향했다.
적막함만이 감도는 집 안.
귀를 쫑긋 세우며 거실을 비롯해 세 개의 방과 화장실까지 모두 뒤져 봤으나, 누군가 살았던 흔적 외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완벽하게 빈 공간이었다.
“들어오시죠.”
이에 안전하다고 판단한 나는 바깥에 서 있던 한세정을 불러들이며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어서 확인해 보고팠다.
내가 짐작한 게 맞았는지.
그리고.
“……!!”
목도할 수 있었다.
“라면! 라면이에요!”
눈앞에 가득한 음식들을.
* * *
후루룩―
후룩―
혀끝을 타고 올라가는 뜨거운 면발.
출렁거림을 따라 떨어지는 국물이 식도를 넘어 위장에 전달될 때마다 전신이 열기에 휩싸인다.
이렇게까지 맛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동을 선사하는 라면 다섯 봉지가 한세정과 나의 손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시국에 라면을 다섯 봉지나 끓여 먹다니.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으나 누구도 제지하는 이가 없다.
먹을 건.
이 외에도 넘쳐났으니까.
“아아… 더는 못 먹겠다…….”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해 대던 한세정의 입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많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포타스의 하수인이 된 괴인들은 인간의 식량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예 먹는 행위가 필요 없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게만 의미를 두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덕분에 그저 집 몇 채만 잘 털어도 다가오는 겨울은 굶주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지경이라 모처럼 든든한 식사를 마친 뒤.
끼이이익―
탁―
“…음? 저건…….”
한세정이 부엌 정리에 나선 동안 집 안을 돌아다니던 나는 안방에서 제법 쓸 만한 무기를 발견했다.
곧게 뻗은 자태를 자랑하는 은빛 물체.
촤르르륵―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진 여섯 자루의 골프채였다.
‘괴물들을 상대로는 힘들겠지만, 여기서는 충분하겠어.’
하나하나 들어 보며 상태를 점검해 본 결과.
사람의 육체를 지닌 괴인들을 상대로라면 상당히 효과적이리라 생각하며 죄다 가지고 나와 한세정에게 건넸다.
“이거라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골프채! 이런 게 있었네요?!”
한세정도 꽤 반기는 눈치였다.
이제껏 싸움이 두려워 피하는 데 급급했던 그녀의 성격상 리치가 긴 골프채를 보니 비교적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뭐.
실제로 뭔가를 두들겨 패고 나면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연습을 좀 해도 될까요?”
끄덕―
한시라도 빨리 익숙해지려는 듯.
한세정은 동의를 구하더니 거실 한쪽에 서서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세는 영 어색했으나 바람 가르는 소리 하나만큼은 일품인 그녀의 훈련은 내가 다른 방에서 가져온 캐리어에 식량과 물을 전부 담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대략 30분에 걸쳐 얼추 적응이 될 즈음 우린 1501호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원했던 거점과 식량 등을 다 확보했으니 이젠 ‘특수 퀘스트’를 이행할 시간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해치워야 할 숫자는 총 30마리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우선은 저부터 퀘스트를 완료하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네.”
“더해서 앞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으니 수신호를 정하겠습니다.”
한세정과 몇 가지 신호를 맞추고 밖으로 나온 나는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우며 거침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광역 어그로가 끌렸던 탓인지 전체적으로 잠잠한 101동.
우린.
4층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목표와 마주할 수 있었다.
“으어어어어어…….”
스윽―
3층 복도와 계단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 괴인.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놈의 머리통부터 확인했다. ‘뿌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개체는 표식이…….
‘있다!’
있었다.
밤에도 쉬이 알아보게끔 붉은색으로 색칠된 꽃봉오리 형상이 놈의 머리 위에서 빛을 뿌려 대는 중이었다.
이에 즉시 엄지를 아래쪽으로 내려 사냥할 것을 알린 나는 슬금슬금 물러나며 바닥을 두드렸다.
굳이 다른 놈들까지 끌어들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유인해서 처리할 작정이었다.
쿵―
쿵―
“그어어어? 그어어어어어.”
침묵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소음이 발생하자 바로 반응하는 괴인을 계속해서 자극하며 4층으로 올라오도록 만들고 복도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
저벅―
저벅―
저벅―
“그어어어…….”
‘지금.’
“…어어어억.”
순진하게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후우우우욱!
콰직!
“…….”
털썩―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주먹을 뻗었다.
전과 달리 피나 더러운 게 묻지 않게끔 천으로 덮은 손이 괴인의 두개골을 간단히 박살 내 버린다.
“으읍…….”
으깨진 머리통에서 쏟아져 나오는 뇌수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한세정.
허나.
의외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직접 행해야 할 일이라는 걸, 해내야만 친구를 도와줄 수 있음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기에 억지로라도 버텨 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한세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나마 독려하고서 다시금 걸어 내려가자.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으어어…….”
3층을 넘어 2층에 다다를 무렵 괴인 특유의 낮고 가래 끓는 괴성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슬쩍 내다보니.
‘하나, 둘, 셋… 일곱.’
목표만 일곱에 그 외에도 평범한 개체가 스물이나 되는 큰 무리가 101동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거.
오늘 낚시는 만선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