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17화 (17/232)

17화

구원?

“……!”

한세정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저 ‘구원’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추론하기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불곰파의 손에서 도망친 여인, 그런 그녀가 바라는 친구의 구원. 이것이 의미하는 바라고 해 봐야 하나뿐이었으니까.

“불곰파 사람들이 제 친구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어요……! 매일같이 찾아가서…….”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한세정이 말하는 친구의 구원은 불곰파와 관련된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납치된 여성 대부분에게 적용되는, 발정 난 개새끼들이 욕정을 해소하는 도구 취급을 받으며 그 지옥 같은 삶을 견디고 있는 듯했다.

“이령이가 아니었으면 저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꼭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지만, 보다시피 겨우 도망치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저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이령이를 도울 수 없어요. 제발, 제발 제 친구에게도……!”

그녀는 그 나락에서 하루라도 빨리 친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간청하고 있었다.

나는.

“…….”

눈물로 울부짖는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불곰파와 직접적이고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한세정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순간의 연민이나 영웅심에 취해 선뜻 들어줄 정도로 간단한 수준의 부탁이 절대 아니었다.

크게 보면 어차피 불곰파에 복수할 예정이니 동선도 겹치는 김에 친구도 구해 내면 될 일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으나, 이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단순히 ‘때려 부순다’라는 일차원적인 목표와 ‘누군가를 구하면서 때려 부순다’라는 부수적인 목표가 딸린 계획은 단어의 수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니까.

구조에 신경 쓰는 과정에서 발목을 잡혀 내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되레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도 잡지 못하고 굶주림에 아사(餓死)하는 머저리 사냥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나는 합리적인 판단하에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면서도 거절하려 했다.

딱.

“미안하지…….”

“뭐든지, 정말 뭐든지 할게요! 제발, 제 친구를 도와주세요!”

“…뭐든지?”

“네! 시키시는 건,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한세정의 입에서 ‘무엇이든 하겠다’라는 문구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뭐든지?’

겨우 단어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마치 어둡던 공간에 밝은 빛을 품은 전구가 켜진 듯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든지, 뭐든지……. 만약.’

순식간에 쏟아지는 수많은 가정.

그중.

특히 날 사로잡는 생각은 당연하게도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물건을 한세정에게서 얻어 내는 것이었다.

피.

‘혈액’을 말이다.

만일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안 그래도 과감하게 시도하려던 ‘기억 포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게 될 테고,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성장은 가히 엄청날 게 분명하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후 한세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면.”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제가 한세정 씨에게 원하는 건 딱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요?”

“예.”

“어, 어떤…….”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무심결에 제 몸을 감싸는 한세정.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진 묻지 않아도 뻔했다.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만.

“하나는 도와줄 수 있으나 당장은 불가능하기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피’를 내어 줘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피, 피를요?!”

오히려 오해가 더욱 심각해진 것 같았지만 말이다.

“…….”

아무래도.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내 비밀을 조금 풀어야 할 듯싶었다.

* * *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해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굉장히 미안한 눈치로 고개를 숙이는 한세정.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오해하게 만든 건 내 잘못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앞뒤 설명 없이 대뜸 피를 달라고 했으니 충분히 오해할 만도 합니다.”

여하튼.

덕분에 더 이상의 곡해는 사라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오해를 하는 중인 건 맞다.

단지 나를 피만 보면 환장하는 사이코나,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뱀파이어 따위로 여기지 않을 뿐.

오른팔을 예시로 들며 ‘고유 능력’을 통해 괴물들의 육체를 빌려 오는 대신 지속적인 혈액 공급이 필요하다고 오인하게 만들어 뒀으니.

하도 급작스럽게 그럴싸한 이유를 말해 줘야 해서 조금 엉성한 부분도 있다만, 워낙 기괴하고 신묘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그런가.

“할게요. 이령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매일 원하는 때에 피를 드릴게요.”

어찌어찌 잘 넘어간 듯.

이전처럼 돌아와 오로지 친구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열의를 보이는 한세정.

우리의 동행은.

그렇게 조금 특이하게 시작되었다.

* * *

“지금부터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네.”

“안전한 주거지, 식량과 식수 확보, 그리고 사냥입니다.”

“여기는… 위험하겠죠?”

“불곰파에게 발각당한 이상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가능하다면 옮기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제가 생각하던 곳은 아파트 단지입니다.”

“아파트 단지라면… 혹시 성풍 아파트인가요?”

작은 해프닝이 일단락되고 나는 한세정과 함께 계획 세우기에 들어갔다.

사고 아닌 사고를 친 탓일까.

이미지를 수습하기 위함인지 그녀는 회의에 상당히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그 덕택에 계획을 짜는 건 매우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애당초.

모든 부분에서 나를 중심으로 짜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한다기보단 이미 어느 정도 수립해 두었던 그림에 한세정을 추가하는 게 전부였고.

“예. 먼저 성풍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자리를 잡은 뒤, 모든 준비가 됐다 생각될 때 불곰파의 본거지로 가겠습니다.”

끄덕―

말을 마치자 이해했다는 듯 무언으로 대답하는 한세정.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큰 눈망울에 그녀의 불안한 속내가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도 불곰파로 향하는 기간을 정확히 정하지 않아서인 듯했다.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도 부디 빨리 가 줬으면 한다고 재촉하지 못하는 처지가 주는 초조함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여.

더 마음 쓰지 않도록.

“2주, 2주입니다.”

이번 계획의 가장 큰 핵심이자, 불공평한 달리기 시합에서 한 달여를 일찍 출발한 불곰파 놈들을 추월하는 데까지 2주 안에 끝내리라 약속했다.

혹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각오였을지도 몰랐다.

더 질질 끌지 않겠다는 다짐.

어느 쪽이든 그 말이 전해진 직후 기다렸다는 듯 한세정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 * *

[‘1등급 근원석’을 복용했습니다.]

[순발력이 2 상승합니다.]

‘2? 기술은 없지만 어쨌든 세 개를 복용해서 순발력이 총 4나 올랐으면… 나쁘지 않아.’

이슥한 밤.

성풍 아파트로 향하기 직전 가지고 있던 근원석을 모조리 복용한 나는 신체의 변화를 느끼며 주억거렸다.

본래.

복용과 비축의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으나, 이래저래 흘러가는 과정에서 한세정이라는 임시 동료가 생겨 ‘차원 상점’에 들르지 않더라도 뒤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 터라 복용 쪽으로 방향을 정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네.”

“말했던 대로 후방 경계 위주로 하시면 됩니다. 위험을 감지하면 소리 대신 장포를 당겨 주십시오.”

“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선 거리.

내려앉은 어둠만큼이나 조용한 도심 사이로 발을 뻗어 남쪽으로 향했다.

숨기 바빴던 전과는 달리.

‘나와라, 괴물들아.’

목적지로 가되 일부러 길을 이리저리 틀며 다소 과격하게 행동했다.

생각의 변화로.

삶의 우선순위 중 사냥이 최상위층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런 나의 노력은 금세 빛을 발했다. 마음먹고 피하려 해도 마주치는 게 외계 생물인데, 이제는 마주치려고 날뛰고 있었으니까.

콰아앙!

쾅!

츠에에에에엑―!!

그 발단은 느닷없이 들려온 폭음과 괴성이었다.

‘어디……. 저기다!’

행보를 시작한 지 채 10여 분도 되지 않아 들려온 소음에 한세정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기니 반쯤 무너진 상가 안에서 포효 중인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3m는 될 법한 체구에 그 육중한 무게를 버텨 낼 만큼 단단해 보이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놈이었다.

다만.

진정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건 하체가 아니라 상체, 그중에서도 흡사 고양잇과 맹수처럼 칼날을 박아 넣은 듯 날카롭게 뻗은 손톱을 보유한 팔이었다.

‘저거라면…….’

괴물을 발견한 순간부터 이식을 염두에 두며 위아래로 훑어보던 나는 놈의 팔에 꽤나 흥미가 돋았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살피지 못해 확답하긴 어려웠지만, 다른 것보다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게 주효했다.

오르그처럼.

인간과 비슷한 신체 구조인 만큼 이식하더라도 다루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장점이 있단 뜻이었으니까.

툭툭―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한세정이 장포를 잡아당기며 나를 불렀다.

다른 개체가 나타난 건가 싶어 급히 얼굴을 돌리니 그녀가 전방의 괴물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플뤼예요. 저거.”

“플뤼?”

“네.”

“팔을 고무줄같이 늘려서 기습하는 게 특징이에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다름 아닌 괴물의 정보였다.

“도망치면서 한 번 본 적 있어요. 팔이 거의 3m까지 늘어났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행히 무리 지어서 생활하진 않는 것 같고, 괴물이든 사람이든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난폭한 성격이었어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연이어 정보를 쏟아 내는 한세정.

그래.

무력이 약한 탓에, 불곰파에 붙잡혔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도망치는 모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괴물을 죽여 특별한 힘을 손에 넣은 능력자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자였다.

결코 내 뒤에만 붙여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정보, 감사합니다.”

“뭘요. 그나저나 사냥하실 건가요?”

“가능하다면 사냥 후에 제 ‘고유 능력’으로 흡수할 예정입니다.”

“그럼… 제가 시선을 끌게요.”

“예?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셨잖아요. 다리가 묶여 있어도 도망 하나는 누구보다 잘한다는 거.”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죠. 대신 근원석은 넘겨드리겠습니다.”

씨익―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고요했던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며 나타난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대기를 뒤틀며 몸을 돌리는 괴물 플뤼.

“츠에에에엑!!”

“그래, 여기야. 이 괴물아.”

살기 등등한 기세로 당장 잡아먹을 듯 포효하는 괴물과 마주하고서도 두려움 없이 호기롭게 맞대응하는 한세정.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2주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낼지도 모르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