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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5화 (15/232)

15화

* * *

스윽―

스윽―

귓가를 간질이는 자그마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차갑, 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린 감촉도 느껴졌다.

무언가가 볼을 비롯한 얼굴 곳곳을 쓸어내렸고, 그 의문의 물체가 지나간 자리마다 방울방울 지는 액체의 흔적이 남았다.

그 반복적인 움직임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물……. 물?’

내 얼굴에 남은 게 다른 무엇도 아닌 ‘물’이라는 걸.

번쩍―

이를 인지한 순간 저절로 눈이 뜨였다.

매우 중요한 물자인 물이 어째서 내 얼굴에 흐르고 있는가 놀라 육체가 저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눈앞에.

“아, 안녕하세요……?”

물에 젖은 수건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인사하는 여인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

“…….”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한쪽은 갑작스레 깨어난 상대 때문에 당황해서. 또 한쪽은 설마 깨어나자마자 여인과 눈을 맞추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 정도 흘렀을까.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여인이었다.

꾸벅―

“그, 어…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여 주며 애매한 텐션을 유지하던 그녀가 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는 깊게 고개를 숙여 무척이나 정중한 태도로 감사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 한마디가 공간을 타고 전해지기 무섭게 여러 개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독한 실력 격차와 또다시 불곰파의 손에 무너져 내리는 스스로에게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서 이성을 잃은 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세상 속에서 상대를 허무하리만치 쉽게 찢어 죽였던.

마지막으로.

콰드득―

“……!”

귀신에 홀린 듯 머리가 박살 난 남자의 가슴을 갈라 뜯어 낸 심장을 서슴없이 씹어 삼켰던 일까지 전부.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떠올린 찰나.

“……! 우읍!”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사람의 심장을 먹어 치우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거니와 이를 기억해 낸 직후 입 안에 머물렀던 심장의 맛과 감촉 등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속이 메스껍다 못해 뒤집힐 것처럼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아… 아니, 움직이시면 안 돼요! 상처가…….”

“우읍, 욱…….”

이런 나를 보고 당황한 여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뭐라 소리쳤지만, 제정신이 아닌 탓에 하나도 귀에 들리질 않았다.

그저.

위장에 남아 있는 심장 조작을 게워 낼 때까지, 혀에 새겨진 심장의 촉감이 지워질 때까지 비우고 또 비워 냈다.

5분, 10분, 15분…….

“헉, 헉…….”

나는 한참을 토해 내고서 신물조차 올라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성을 되찾았다.

허나.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 놓고 단숨에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괘, 괜찮으세요? 아아, 여기 물…….”

급격하게 창백해진 내게 물을 가져다주는 저 여인 때문이었다.

외인.

내게 목숨을 구원해 달라 빌었던 사람이자 실제로 도와주기 위해 데려왔던 인물이지만, 우리의 관계는 거기서 끝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날 간호해 준 걸 보아 악인은 아닌 듯했으나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게 인간 아니던가.

그러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몸가짐을 바로 할 필요가 있었다.

퉤―

여인이 건네준 물로 간단하게 입을 헹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찌릿―

찌릿―

“크읍.”

전투 중에 다친 상처가 생각보다 훨씬 심했던가.

벽에 기대어 앉는 크지 않은 행동에도 전신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문을 당하며 웬만한 고통에는 무감각해진 나로서도 참기 어려울 만큼.

아무래도.

전투를 치르면서 상처가 새로 생기기도 했지만, 그 외에 노인과 아이가 치료해 준 덕분에 겨우 봉합되어 가던 고문의 흔적들이 재차 터지고 갈라지면서 더욱 지독해진 것 같았다.

꽈아아악―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어 억지로 아픔을 견뎌 낸 나는 한 차례 감았다 뜬 눈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 우선 간단한 통성명과 더불어 나 또한 감사를 표했다.

“…아윤, 이라고 합니다. 간호해 줘서 고맙습니다.”

디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날 간호해 준 것만큼은 진실이었으니까.

이런 내 인사에 여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저는 한세정이라고 해요. 저야말로 다시 한번 감사해요. 아윤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리고 죄송해요. 열도 심하게 나시고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허락도 없이 가방을 열어 물을 사용했어요. 제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여인은 간호라고 해 봐야 별거 아니었다며, 오히려 매우 중요한 물자인 물을 함부로 사용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에.

“괜찮습니다. 그보다…….”

나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물이 소모된 건 분명 아쉽고 또 아까운 일이었지만, 본인의 갈증을 채우려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날 위해 쓰인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남은 자들이 있었을 텐데……. 제가 쓰러지고 나서 어떻게 된 건지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내가 쓰러뜨린 적은 단 한 명. 반면 추격자는 못해도 십여 명 이상이었다.

죽은 이가 간부이자 그들의 우두머리이긴 했으나 수적 우위가 확실한 터라 쫓아오려면 더 쫓아올 수도 있었던 바.

당장 근처에 보이진 않지만.

만일 가까이 있거나 아예 그들에게 잡혀 있는 처지라면 다시금 목숨 걸고 싸울 준비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그 부분에 관해 묻자.

“아, 그게…….”

질문을 받은 여인, 한세정이 당시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차근차근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으아아아아악!!”

흐릿한 가운데 귓가를 울리는 처절한 비명.

뒤이어.

“내가, 데려간다고 했잖아.”

누군가의 담담한 음성도 들렸다.

그 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막 한 사람이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털썩―

사방이 어두컴컴한 탓에 제대로 보이는 건 많지 않았으나, 그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던 한세정은 조금씩 적응돼 가는 어둠 사이로 쓰러진 이가 자신을 구해 준 사람임을 직감했다.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오던 불곰파의 간부 김성원이 남자의 앞에 시체가 되어 고꾸라져 있었으니까.

머리가 으깨진 끔찍한 몰골이었기에 믿기 어려웠으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 벌써 며칠째 봐 왔던 저 단검이 시체의 신원을 증명해 주었다.

허나.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저, 저기……!”

불러도 대답 없는 반응을 통해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캐치한 한세정은 황급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철컥―

철컥―

다리에 채워진 족쇄가 움직임을 방해하는 탓에 거의 기다시피 하며 가까이 가니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전신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족히 수십 개는 되는 상처들.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임을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아아…….”

어쩌지?

한세정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은인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치료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꼴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절대.

절대로 그냥 죽게 둘 수는…….

툭―

투둑―

“사, 상처가…….”

문자 그대로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기적이 일어났다.

죽음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심각하게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왜?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 기사회생의 기적이 저 남자의 ‘고유 능력’ 같은 게 아닐까 짐작될 뿐.

사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그가 살아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물론.

“제발, 제발…….”

남자가 회복되는 중이라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계십니까!”

“……!”

김성원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사냥꾼의 곁에 넘쳐나던 충실한 사냥개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의 파도가 바람을 타고 밀려오고 있었다.

한세정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일촉즉발의 위기.

어디로든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다급히 체내의 마력을 확인했다.

‘있다……! 이 정도면…….’

남자의 품에 안겨 도주하면서 요양할 시간이 생긴 덕분에 바닥을 치던 마력이 ‘고유 능력 : 단거리 공간 이동’을 두세 번 정도는 사용 가능할 만큼 모여 있었다.

다만.

문제는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이동 위치도 특정하지 못할뿐더러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도움을 받아 왔던 은인.

그를 데려가려면 가진 마력을 전부 털어 넣는다 해도 한 번 이동하는 게 최선일 터.

그리된다면 공간 이동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붙잡힐 확률이 매우 높았다.

즉.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홀로 도망쳐 살 확률을 높이거나, 같이 가되 낮은 확률에 목숨을 걸거나.

탁―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그녀는 받은 은혜를 모른 체할 만큼 매정하고 비열하지 않았으니까.

한세정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도박.

그녀는 지금 그것에 목숨을 걸어 볼 요량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이동하고 어둠에 몸을 숨기는 거야. 김성원이 시체가 됐으니 그걸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더 쫓아오지만 않으면 살 수 있어……!’

추격조장인 김성원의 죽음을 빌미로 상대의 감정이 흔들리길 믿는 것.

무척 빈약한 계획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이외의 선택지가 없기에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 기도하며 남자의 몸을 붙잡고 남은 마력을 쥐어짜 고유 능력을 발동시켰다.

[고유 능력 : 단거리 공간 이동]

우우우우웅―

파앗!

마력이 두 사람의 몸을 감싼다 싶은 순간 사방이 흐릿해지더니 세상이 뒤바뀐다.

털썩―

새로운 공간에 도착한 한세정은 남자의 몸을 살피는 동시에 얼마나 이동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돌아봤다.

결과는.

“형님! 어디 계십니까?!”

“형님!”

‘……!’

최악에 가까웠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곰파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거리로 따졌을 때.

김성원의 사체가 있는 곳에서 멀어져 봐야 대략 5~6m 정도 벗어난 듯싶었다. 사방이 어둡지 않았다면 바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간격.

질끈―

이 암담한 상황에 입술을 깨물며 초조함을 드러낸 한세정은 남자와 함께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부디.

생각한 바대로 김성원의 시체를 발견한 추격자들이 물러나 주길 바라며.

“어, 어? 형, 형님!!”

“성원 형님!!”

“왜 형님이…….”

“혀, 형님 맞아? 잘못 본 거 아냐? 다른 놈의 시체라든가…….”

“이거, 형님 단검이야. 형님 맞아…….”

숨소리마저 죽이며 기다리는 가운데 드디어 추격자들이 시체를 마주하고서 빽빽 소리를 질러 대는 게 들렸다.

처음엔 부정하는 여론도 있었으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이 김성원의 죽음을 증명해 주자 곧 당황한 감정으로 가득하던 대화의 방향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해……!”

“뭐? 그년은 어쩌고!”

“형님이 이리되셨는데 우리끼리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래. 난 개죽음당하기 싫어. 성원이 형님 모습을 봐. 머리고 가슴이고……. 형님을 저런 꼴로 만들 정도면 우리 정도는……. 못 가. 아니, 안 가!”

“너 이 새끼, 성원이 형님하고의 의리는…….”

“의리는 개뿔. 산 사람은 살아야지! 젠장, 갈려면 너 혼자 가. 우린 돌아갈 테니까. 야, 가자!”

“아니, 잠시만…….”

이대로 물러나자는 쪽으로.

다행스럽게도, 살려 달라던 비명과 처참한 시신이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자극한 것 같았다.

천운.

간절히 빌었던 기도가 하늘에 닿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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