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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4화 (14/232)

14화

“묻잖냐, 너 누구냐고.”

“…….”

대답 없이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자 질문을 던졌던 남자가 표정을 찌푸리며 재차 묻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남자의 외형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이마에 박힌 ‘火’자 문신. 저 괴이한 표식을 가진 인물과 한가로이 대화 나눌 마음 따윈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뒤를 잡혀 전투를 회피할 수 없는 이상 떠들 시간에 상대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파악해 두는 게 이로웠다.

그렇게.

툭―

촤르륵―

조심스레 여자를 통로 한쪽에 내려놓으며 면밀히 살펴본 결과.

다른 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놈이야.’

모르는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내가 기억하는 불곰파 인물이라고는 두목인 이덕구와 간부 조창기, 그리고 그가 데려왔던 부하 일곱에 열흘간 돌아가며 날 고문했던 다섯 명이 전부다.

하여 익숙한 인물보단 낯선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쉬웠다.

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긴 듯 본인들 입으로 주절주절 떠들어 준 덕분에 앞서 열거한 인물 중 이덕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유 능력이나 사용 무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일 그놈들과 대치한 자리였다면 최소한의 방비는 했을 터인데.

‘…무기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인가? 고유 능력은… 속도?’

일면식도 없던 놈이다 보니 자그마한 단서라도 놓칠세라 필사적으로 정보를 탐색해야 했다.

하나라도 놓쳤다간 목숨이 위태로웠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벙어리 새끼야? 왜 대답을 안 해, 이 개 같은 놈아. 뒈지고 싶어?”

퉷―

놈이 대놓고 시도한 탐색이 끝날 때까지 급진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걸쭉한 욕설과 함께 가래가 섞인 침을 뱉었을 뿐.

아마도.

뭘 하나 지켜보려는 눈치 같았다. 더 정확하게는 뭘 해도 상관없다는 의도였을 거다. 남들 등쳐 먹고 성장한 주제에 제 잘난 맛에 사는 종자들이었으니.

빠득!

자꾸만 그 당시 생활이 떠오른 탓인지.

이 가는 소리가 통로 내에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 씨X 새끼. 됐고, 그년이나 내놔. 오지랖 부리다 뒈지지 말… 아니다. 그냥 뒈져라. 오랜만에 원 없이 칼질이나 좀 하자. 요새 노예 단속이 심해서 손도 근질근질했는데 잘됐다.”

스릉―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친 놈이 예상대로 허리춤에서 서슬 퍼런 예기(銳氣)로 번쩍거리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대략 30cm가 좀 안 되는 칼날에서 마치 라세르타의 이빨처럼 흉흉한 기운이 솟구쳤다.

그 감각을 느꼈을 때.

타닷―

후우우우웅!!

비로소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촤아악!

“어이고? 피해?”

후욱!

훅―

특이하게 칼을 거꾸로 쥐고 아랫단에서 위로 올려 치는 대각선 베기를 기점 삼아 연달아 공격을 시도하는 놈.

그 맹렬한 기세에 나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떻게 반격할 여지조차 없었다.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겪어 보니 차이가 훨씬 더 극심했다. 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그래서 계속 물러났으나 이 또한 한계였다.

“그러다 저년 밟겠다. 밟겠어.”

‘젠장……!’

조롱하듯 떠들어 대는 놈의 말대로 어느덧 여인이 지척이었다. 더 후퇴했다가는 여인을 밟거나 찰 지경.

반격을.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아가야 했다. 여전히 누나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은 저 여인을 데리고 도망친 이유를 잃지 않으려면.

끄덕―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불태운 나는 정신없이 퇴각하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지금!’

펄럭!

기습적으로 장포를 던졌다.

안 그래도 어둡던 통로에서 거대한 오른팔을 포함해 전신을 뒤덮을 정도로 크게 제작했던 장포가 놈과 나 사이에 벽을 세우며 시야를 완전히 빼앗아 간다.

그러자.

“별 지랄을, 다… 하네!”

후우우웅―

타닥―

탁!

즉시 공격을 멈추고 후퇴하는 놈.

무슨 짓을 하든 당해 줄 마음이 없다는 의미였다.

다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으로 한 발 크게 내디디며 꽉 쥐고 있던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놈이 물러난 거리라고 해 봐야 대강 3~4m 수준일 터.

고작 그 정도 간격이라면.

‘실수, 한 거다… 이 개새끼야!’

내가 노리기엔 충분한 사정권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장포째로 밀어낸 주먹이 거칠게 공간을 찢어발기며 전방을 두들긴다.

그 끝자락엔.

‘잉? 뭐, 뭐야. 저…….’

기대했던 놈이 서 있었다.

암흑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주먹에 당황한 기색으로.

콰앙!

손끝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 사방을 울리는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헌데.

펄럭―

충격의 여파가 지나가고 장포가 떨어졌을 때 드러난 놈의 모습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상했다.

못해도 어디 한 곳은 으그러졌으리란 상상과 달리.

‘…버, 텨?’

“어후, 쓰바. 뭔데, 저건?”

놈이 단검으로 내 공격을 막아 낸 듯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당황하는 사이.

파직―

챙!

놈의 손에서 짤막한 스파크가 튀더니 두 조각으로 나뉜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반지였다.

‘아.’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불현듯 차원 상점에서 구매 가능한 물건 중에는 저런 형태의 장비도 존재한다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가격이 무지막지하게 비싸서 하나 구하기에도 벅차다고 하던.

설마.

그런 고가의 아이템을 갖고 있을 줄이야.

‘제길…….’

상황을 깨닫자 절로 욕이 나왔다.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였던 공격에 실패했다는 게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귀중한 아이템이 부서진 데다가 심지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상대를 제대로 자극한 듯.

“하……. 내가 저걸 구하려고 근원석을 몇 개나 바른 줄 아냐? 서른 개야. 서른 개, 이 엿 같은 새끼야.”

놈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 자, 한 자 씹어 내는 목소리에서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살기가 흡사 더 이상 기회란 없을 거라 강조하는 것 같았다.

“곱게는 안 죽일 거니까 기대해. 이 새끼야.”

후욱―

칼날을 들어 올리며 죽음을 약속한 놈이 한순간에 간격을 좁히며 다가왔다.

속도가 엄청났다.

눈으로 보면서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나타난 놈은 단언한 대로 정확히 오른팔을 노려 칼날을 휘둘렀다.

서걱!

“크읍……!”

부지불식간에 팔뚝이 갈라졌다.

우연인지.

혹은 일부러 그러한 건지 깊게 베이진 않았으나,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상처 부위에서 송골송골 맺히는 핏방울이 무척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흡사.

장난감이 된 느낌이어서.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가 된 기분이라서.

“힘줄을 잘라 줄까? 축 늘어져 있으면 회 뜨기 딱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서걱!

서걱!

“……!”

베인다.

또.

베인다.

도화지에 선을 긋는 화가처럼 놈이 휘젓는 대로 상처가 새겨졌고, 방울지던 피는 금세 물줄기가 되어 팔을 타고 뚝뚝 흘러내려 온다.

그 무자비한 참극에서.

‘이렇게, 까지…….’

나는 육체의 고통 대신 정신적인 통증을 느꼈다.

무력감 때문이었다.

차이가 나리란 건 예상했지만, 그 격차가 너무 압도적이라는 현실에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우습기도 했다.

이런 놈도 어쩌지 못하는 머저리가 바짝 엎드리기는커녕 앞뒤 분간 못 한 채 새로운 팔에 취해 복수니 뭐니 쏟아 내며 다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날뛰었던 게.

무엇보다.

‘아무것도…….’

다시금.

누나가 끌려갈 때도, 누나가 무너질 때도, 누나가 절규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과거처럼 당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으득―

깊은 무력감 속에서 피어오른 분노가 내 영혼을 짓밟고 있었…….

‘염병. 처 뒈져 가지고, 그년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뭔 난리야?’

“…….”

허물어진 몸으로 바닥의 차가운 촉감이 전해지던 차에.

문득.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누나가 자살한 직후, 장난감을 잃어 화가 난 이덕구의 명령하에 날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패던 놈들의 육성이었다.

‘똑똑히 기억해. 네 누나는 네가 죽인 거야. 병신같이 버텨서. 곱게 포기했으면 네 누나가 그렇게 뒈졌겠냐?’

‘젠장, 잘만 했으면 내 차례까지 왔을 텐데 좀만 기다렸다 뒈지지.’

두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 놓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도리어 더 즐기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악마들의 아쉬움 가득한 감상평.

그것들이 하나둘 떠올라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아.

이유를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죽더라도, 그냥 뒈지지 말란 소리구나. 그렇지?”

분명했다.

저놈 하나를 죽인다 한들 불곰파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을지언정, 영혼에 박아 넣었던 복수의 의지를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혼자 가지는 말란 뜻이었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진짜 머저리같이 포기할 뻔했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새끼가.”

스윽―

누나, 기다려.

하나로는 모자라겠지만… 내가, 이 한심한 새끼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라 이놈이라도 같이 데려갈 테니까.

찢어 죽일 준비 하고 있어.

콰직―

[한계 이상의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상태 이상 : 미약한 분노 조절 장애’가 발동합니다.]

[당신의 「이성」이 잠시 눈을 감습니다.]

[영혼 깊숙이 잠들어 있던 「프레데터」의 온전한 힘이 깨어납니다.]

[최초 「이성 상실」 보상으로 보유한 ‘마력’ 수치의 네 배만큼 모든 신체 능력이 상승합…….]

[향후 이 효과는 절반으로 하향 조정…….]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선 「혈액」을 섭취하거나…….]

“반드시.”

후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앙!!

데려갈 테니까.

* * *

꿈을 꾸었다.

온 천지가 안개에 휩싸인 듯 뿌연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이동하는 내가 보였다.

무엇을 하는 걸까.

눈에 비친 나는 뭔가를 쫓고 있었다. 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쥐고 있는… 남자, 남자였다.

“그래. 이제 뒈질 때가 됐지!”

그는 달려오는 날 향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칼을 휘둘렀다.

매우 빠른 공격이었다.

헌데.

어떻게 된 일인지.

쉬익―

‘……?!’

바람을 가를 정도로 빠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몸을 트는 것만으로도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의아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워어어어어!!”

내 움직임을 따라가기에도 바빴으니까.

단숨에 공격을 회피한 나는 어딘가 익숙한 포효를 내지르며 오른팔로 바닥을 휩쓸었다.

촤아아아아악―

제법 단단하게 제작된 통로 바닥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거센 손짓이 원하는 건.

터업!

다리.

남자의 다리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왜 그랬을까?

그건 따로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본능.

날랜 다리를 가진 ‘먹잇감’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본능적인 한 수였다.

“미, 미친!”

그 의도를 파악한 남자는 공격에 실패하자마자 뒤로 물러나며 손길을 피하려 했으나 급격하게 빨라진 내 움직임을 당해 내지 못하고 결국 다리를 내주었고.

꾸우우우욱―

콰직!

“끄으으으으읍!!”

곧이어 끔찍한 비명과 함께 남자의 다리가 수수깡처럼 으스러졌다.

박살 난 뼈가 살가죽을 찢으며 튀어나왔고, 입고 있던 바지가 금세 붉디붉은 핏물로 적셔졌다.

그때쯤.

안개는 사라지고 고통으로 가득한 남자의 표정과 오른팔에 남은 진한 촉감, 울부짖는 괴성까지 생생해졌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 아닌 듯했다.

물론.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감각보다.

“으아아… 으, 으아아아!!”

터억―

“으읍! 읍!!”

꽈아아아악!

퍼석―!

후두둑―

쥐여 오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머리통이 뭉개져 즉사한 남자의 가슴을 갈라.

“내가, 데려간다고 했잖아.”

쿵―

쿵―

쿵―

여전히 뛰고 있던 ‘심장’을 씹어 먹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으적!

그게.

[「혈액」을 흡수했습니다.]

[‘상태 이상 : 미약한 분노 조절 장애’가 사라집니다.]

털썩―

내가 지켜본 최후의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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