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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3화 (13/232)

13화

당황스럽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갑작스런 등장에 나는 잠시간 할 말을 잃고 앞에 쓰러진 여인을 바라만 봤다.

도무지.

뭘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딱.

‘느닷없이 나타나서 살려 달라니, 이게 뭔…….’

촤르르륵―

겨우겨우 살려 달라는 의미만 전달한 채 고꾸라진 여인의 발목에서 어울리지 않는 쇳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 이, 이게 왜!’

그 이질적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다 발견한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덥석―

어찌나 놀랐는지.

나도 모르게 처음 보는 여인의 발목을 붙잡아 버렸다.

해선 안 될 짓이란 걸 알았지만, 그런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못할 만큼 격양된 감정으로 얼굴까지 들이밀었다.

그 직후.

나는 여인의 발목에 채워진 물건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것과 일치함을 확인하고서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말도 아닌.

“…누나.”

‘누나’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인의 발목에 채워진 물건은, 마치 피로 물들인 듯 시뻘건 색으로 칠해진 바탕에 흰색으로 ‘B’라는 영어 등급이 새겨진 물건은……!

과거 불곰파에 잡혀 들어간 다음 날, 발가벗겨진 채로 첫 고문을 당하기 직전 악마들의 손에 끌려 나오던 누나의 발목에 채워진 것과 같은 ‘족쇄’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 여인도.

불곰파 놈들에게 붙잡혔던 여자라는 뜻이었다.

“아, 아아…….”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목구멍을 비집고 괴성이 흘러나왔다.

애써 감춰 놓았던 악몽 같은 기억이 하나둘 되살아나 급속도로 격해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불곰파’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뇌리를 지배했다.

이런 내 귓가로.

“이 근방이다! 이 근방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으니 각자 나눠서 수색해!”

“옛!”

“너는 가서 착호 부대에 알려. 상품 중 하나가 도망쳐서 찾고 있다, 금방 수습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뭣들 해! 빨리 안 잡아 와, 이 새끼들아!”

십수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음성.

조금 전 사방을 울리던 포효의 주인과 그가 부리는 아랫사람들 같았다.

그 말인즉슨.

“불, 곰파……!”

저놈들의 정체가 더 볼 것도 없이 불곰파라는 의미였다.

으드득―

꽈아아아아악!

맞물린 어금니 사이에서 진득한 살기가 배어 나온다. 강하게 쥔 주먹은 피가 통하질 않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신을 휘감는 분노.

‘죽인다……!’

나는 그 폭발적인 감정에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죽이기 위해.

누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자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리라, 살점마저 씹어 삼키리라 다짐했던 그대로 이행하고자.

이 순간.

저들의 숫자가 몇인지, 무장은 어떠한지, 싸워도 되는 형세인지 따위의 이성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죄다 잡아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 살려…….”

툭―

“…….”

몸을 숨기고 있던 건물에서 걸어 나가려던 찰나.

아주아주 미약한 목소리와 함께 한 점의 힘조차 없어 자그마한 촉감을 선사하는 게 전부인 손길이 나를 붙잡았다.

실신했다 여겼던 여인이 바들바들 떨며 나를 부른 것이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던 내 모습이, 자신을 버리고 가는 행위로 받아들여진 듯.

“살려, 살… 살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내게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제발.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고. 분명,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헌데.

‘왜…….’

저 처절한 바람이 고문받던 동생을 구원하고픈 누나의 간절한 외침으로 보이는 걸까.

단지.

‘살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ㅅ…요, 제…발…….”

나열된 단어와 내뱉어진 문장이 같을 뿐인데, 담겨 있는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인데 어째서.

“…….”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허나.

한번 덧입혀진 누나의 그림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진해져만 갔다. 그런 탓에 더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당장 밖에 나가 불곰파와 관련된 사람들을 처죽이라고 속삭이고 있었으나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여인이 불곰파 사람들에게 발각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란 미래가. 살아남는다 한들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게 되리란 걸.

그런 꼴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무엇이 만들어 낸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나의 그림자가 비친 여인이었다. 최소한 내 눈앞에서만큼이라도 죽음과 멀어지게 하고 싶었다.

“…살려 볼 테니까, 최대한 조용히 하세요. 조금이라도 소리 냈다가 걸리면 끝이니까.”

스으윽―

결국 전투를 포기한 나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하게 당부한 후 그녀를 품에 안았다.

편히 업고 싶었으나 발목에 걸린 쇠사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촤르륵―

“쯧.”

볼 때마다, 또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당장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꾹 참았다.

“여긴 없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좀 잘 찾아봐! 이 새끼들아!”

더욱 가까워졌는지.

바람을 타고 전달되는 소리의 파동이 매우 선명했다. 거리로 계산한다면 최대로 잡아 봐야 3~40m 정도.

웬만한 성인 남자는 몇 초면 주파할 간격이었기에 발목에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앞으로 내달렸다.

‘흐읍!’

타앗―

묵직한 밤공기가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 * *

펑!

펑!

“후읍, 후……. 후음…….”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어 가는 도주극.

이런 내 뒤로 짤막한 폭발이 일고 곧이어 사냥개들의 포효가 들려온다.

“두 시 방향! 두 시 방향이다!”

제아무리 밤이라지만.

야행성 괴물들을 마주할 가능성이 적지 않음에도 무슨 자신감인지 추적용 폭죽을 펑펑 터트려 대는 추격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쫓아왔다.

“꺾었다! 오른쪽으로 틀어!”

‘끈질긴 추적’에 비견되는 혹은 그보다 뛰어난 추적 기술이 존재하는 듯 도통 간격이 벌어지질 않았다.

여기에.

‘후읍, 후……. 몸이 무겁다.’

더 큰 문제는 체력적인 부담이었다.

근원석을 복용함으로써 신체 능력이 향상됐다. 하나 그 차이가 아직 작을뿐더러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터라 페르니스와의 추격전 당시보다 피로 누적이 배는 더 빠른 상태였다.

‘이대로는……!’

스멀스멀 그려지는 최악의 결말에 인상을 한껏 찌푸린 나는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뭔가.

특별한 한 수가 필요했다.

저들을 떨쳐 내거나 적어도 거리를 확 벌릴 만한 그런…….

‘아! 거길 이용하면…….’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문득 공중화장실과 연결되어 있던 퇴폐업소의 비밀 통로가 떠올랐다.

그곳을 활용한다면 통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상 제아무리 추적 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쫓아오기가 쉽진 않을 듯했다.

작금의 세상에선 불빛 한 점 없는 미지의 장소를 돌파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들고 부담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무지성으로 따라올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애당초 뭐라도 해 보자는 생각으로 시도하는 중.

앞뒤 잴 처지가 아니었다.

‘후아!’

생각을 마친 나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한 발, 한 발.

죽기 살기로 달려가다 보니 어둠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공중화장실의 윤곽.

그 형상 아래로 난장판이 돼 버린 주변과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사체들이 보였다.

사체는 총 세 구.

하나는 처음 보는 형태의 괴물이었고, 다른 둘은 페르니스였다.

‘저게 그건가.’

상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섯이었던 페르니스가 셋으로 줄어든 이유를 설명해 주는 풍경이라는 걸.

그렇기에.

‘추출.’

단숨에 다가가 ‘추출 작업’을 시도했다.

급한 와중이라지만 이런 귀한 보물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추출 작업이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헌데.

[‘추출’ 가능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 되는 건가?’

시체임이 확실한데 아무리 외쳐 봐도 추출이 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직접 죽이지 않은 괴물은 추출 작업을 시도할 수 없도록 설계된 건가?

모르겠다.

‘파악은 나중에.’

정보를 구해 놓고는 싶으나 그것까지 파악할 여유는 되지 않으니.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세 구의 사체를 무심하게 지나쳐 공중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통로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바깥이 그러하듯 화장실도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여덟 마리나 되는 페르니스들이 힘으로 밀고 나온 탓에 뚜껑 형식의 문은 속된 말로 개박살이 났고, 화장실 칸막이도 죄다 부서져 있었다.

“잘됐네.”

나는 곳곳에 나뒹구는 장애물을 밟고 지나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는 시체가, 안쪽은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 같은 느낌이니 추격자들의 망설임을 부추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여인을 조심스럽게 안고 통로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거친 말들이 들려왔다.

“뭐, 뭐야!”

“페르니스 시체입니다! 아무래도 무루와 싸우다가 둘 다 죽은 것 같습니다!”

“썅, 그년은 왜 이런 데 들어가고 지랄이야?! 가서 끌고 나와!”

“옛!”

저벅저벅―

바스락―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다만.

예상대로 시체 전경이 적절한 방지턱 역할을 해 준 듯 혹은 화장실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이 도움이 된 건지 추격자들은 단박에 몰아치지 않았다.

쾅―

쾅―

“곱게 말할 때 기어 나와라.”

“빨리 잡히면 팔이든 다리든 하나로 만족하신단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포식자처럼.

추격자들은 상대에게 극심한 공포를 심어 주려는 듯 느긋하게 진입해 벽을 두드리거나 바닥을 짓밟으며 여유롭게 좁혀 들어왔다.

그 덕분에.

“…이런 미친! 형님! 여기 개구멍이!”

“그게 뭔 개소리야!”

통로 발각은 상당히 늦어졌고, 그들이 알아차릴 즈음 우린 이미 평지로 바뀐 길을 밟아 나가고 있었다.

좋다.

당장 처죽여도 모자를 놈들을 뒤에 두고 도망쳐야 하는 현실이 분했지만 십 보, 백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나아갔다.

언젠가.

다시 마주할 복수의 날을 기원하…….

후우우우욱!

후우욱!

“……?!”

뭐지?

부단히 걷던 순간, 기묘한 감각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르르하게 떨리는 울림.

이건.

위험 신호였다.

본능이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이를 깨달았을 때.

후우욱!

타앗―

“휘유. 드디어 따라잡아… 응? 넌 뭐냐?”

누군가 날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도주 시작부터 계속해서 들어 왔던 포효의 주인이자 추격자들을 이끄는 인물.

그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금껏 여자 홀로 도망치는 줄로 알고 있었던 듯했다.

물론 나는 그의 감정 따위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상대는 인지 범위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여 주는 실력자였으니까.

다른 곳에선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제껏 상대했던 크루톤이나 페르니스보다 훨씬 위험한 포식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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