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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2화 (12/232)

12화

‘헌혈, 카페?’

바람결에 스치듯 다가온 한마디가 내 정신을 번뜩 깨웠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했다.

‘그래. 왜 그곳을 떠올리지 못한 걸까? 꼭 병원이 아니더라도 피를 구할 곳이 있었어.’

‘인간성’이 성장의 족쇄이자 ‘프레데터’의 유일하다시피 한 결점이라는 걸 깨닫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책으로 으레 병원에 가야겠다고만 생각했었다.

수술이 잦은 대형 병원이라면 수혈용 혈액을 많이 비축해 두었을 거라 여겼기에.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아닌가 싶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시점이 고작 하루 전이었을뿐더러 그 부분에 대해 고심할 여유 따위 없이 줄곧 전투와 도주를 이어 가야 했던 탓에 다른 방도를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그랬는데.

‘헌혈 카페, 거기라면 병원만큼이나 피가 많을지도 몰라.’

유레카. 지금 난 딱 그런 심정이었다.

물론. 헌혈 카페의 존재에 대해 자각했다고 해서 사실 현재 상황이 급변하는 건 또 아니었다.

종말 이후로 한 달여가 흘러 대형 병원이든 헌혈 카페든 어디를 가도 혈액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오히려 차라리 처음 예상대로 전국 각지의 헌혈 카페에서 혈액을 공급받는 대형 병원이 더욱 적합한 장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나는 기존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 가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본 결과 헌혈 카페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략 여기서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정도? 이만한 거리라면 한 번쯤 들러 볼 만도 했다. 식량이나 안전한 주거지를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다만…….

여차여차해서 시간이 더 늦어져 며칠, 아니, 겨우 몇 시간 차이로 쓸 수 있었던 혈액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나도 아쉬울 것 같았다.

더군다나. 방향을 보아하니 저들이 가려고 하는 헌혈 카페와 내가 떠올린 헌혈 카페가 동일한 장소인 것 같다.

그러니 더더욱 늦장 부릴 수 없었다. 저들이 먼저 다녀간다면 더더욱 내겐 ‘다음’이 없을 테니 말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인간으로 남아야 할 이유가 있어.’

나는 벌써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새로 얻은 세 개의 근원석을 가방에 넣어 둔 후 조용히 어둠에 뛰어들었다.

【 도주 】

‘여기서… 왼쪽 열 시 방향!’

타다닷―

아파트 단지에서 헌혈 카페로 경로를 변경한 직후. 나는 인력 사무소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자리한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달렸다.

새로운 지형, 새로운 배경을 마주할 때마다 주변을 경계하며 나아가야 하는 탓에 영 속도가 붙진 않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느린 전진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들과는 꾸준히 간격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상자가 포함된 행렬 아니던가. 그것도 즉시 수혈이 필요한 중환자였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해도 자그마한 충격에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터라 나보다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벌어지는 거리.

‘이 페이스라면…….’

타닷― 탁!

나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무난하게 혈액을 확보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바람보다는 제발 식용 가능한 혈액이 남아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심, 이미 우리 사이의 경쟁은 내 압승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물론. 그 안일한 염원은 단 몇 초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여기 사거리에서 회전하면 바로 맞은편…….’

‘음?’

“오늘도 잔뜩 왔다 가는구나.”

“그러게나 말이다. 식량 구매자가 넷에 침구나 의약품 사고 싶다는 고객도 다섯이었으니.”

“참 신기하다니까? 인터넷도 안 되는 시대인데 다들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라냐. 누가 소문이라도 내는 것도 아닐 텐데.”

“내 말이.”

‘사…람?’

부푼 기대감을 안고 코너를 돌아 막 목적지를 목전에 둔 내 눈앞으로, 정확히 헌혈 카페가 들어선 5층짜리 건물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심심한 듯 시시덕거리는 사람만 네 명에 그 위로 각 층에 창문이나 붕괴한 부분을 망루 삼아 한 명씩. 총 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변수에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욱―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최대한 조용하게 바닥을 구르며 벽에 기대 몸을 은폐한 나는 연신 바깥을 훔쳐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설마 괴물도 아니고 사람이 저길 지키고 있을 줄이야.

당연히 버려진 공간이라고 여겼거늘.

‘…누굴까.’

예상치 못한 국면에 의문을 강하게 품은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기 위해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대화 소리에 집중했다. 사위가 워낙 조용한 덕분에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그런 식으로 하나둘 정보를 야금야금 얻어 낸 결과 저들의 규모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고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쓴 것 같기는 한데, 곧 보급 들어온다고 하더라.”

“아흐, 지겹다. 지겨워. 나도 좀 돌아다니고 싶다.”

“괴물 보고 오줌 지리던 새끼가 돌아다니긴 개뿔, 경계나 잘 서.”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보급이 곧 들어온다. 상위 조직이 하위 조직에게 물자를 나누어 줄 때나 쓰는 말 아니던가.

게다가. 그렇게 채워진 보급품이 사람들과의 거래에 쓰일 정도로 많다는 건, 웬만한 사이즈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설마, 불곰파의 지부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접 경험해 본 만큼 불곰파의 힘이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

인정하긴 싫지만 그들의 위세라면 본진인 ‘세성 초등학교’를 벗어나 지부를 차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마에 문신이 없어.’

사람들에게서. 불곰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조직원들을 단합시키기 위해 머리부터 꼬리까지 일률적으로 새겨 넣는 ‘火’자 문신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다 왔다!”

“와, 진짜 있었네. 솔직히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떠들 시간 없어. 거래는 내가 할 테니까 너희는 형석이 상태 좀 다시 한번 확인해 줘.”

‘…아!’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쟁자라고 여겼던 이들이 마침내 벌어졌던 간격을 좁혀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와 달리 저 미지의 집단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듯 일말의 주저함 없이 곧장 나아가 말을 섞었다.

“정지! 더 다가오지 말고 정체부터 밝히십시오!”

“착호 부대원분들이신가요? 저희는 수혈용 혈액을 구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대화.

귀를 쫑긋하고 엿듣던 나는 주고받는 얘기 속에서 미지의 집단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착호 부대……. 군인들이었나?’

처음 듣는 명칭. 단순히 이름만 그러한 집단인가 싶기도 했으나.

저들이 진짜 군 조직이라면 굉장히 위험한 집단임은 확실했다. 군부대 특성상 총화기를 소유했을 가능성이 여타 조직에 비해 극도로 높았으니까.

한 발만 잘못 맞아도 곧바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최악의 병기.

외계 종족들마저 위협하던 무기를 손에 쥔 이들이라면 이 근방에서 저들과 견줄 조직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으리라. 불곰파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고객이셨군. 무장을 해제하시고 들어가겠습니다.”

뇌리에 새로운 정보를 각인하는 동안 간단한 대화를 끝으로 검문을 마친 경계 인원 중 하나가 사람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물건은 오로지 내부에서 거래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마저 사라진 이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뇌에 빠졌다.

혈액을 가져가려던 계획이 제대로 어그러진 탓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더 정확하게는. 혈액을 얻게 되면 이래저래 써야지 하고 품었던 희망이 한순간에 절망으로 뒤집힌 게 타격이 좀 컸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나.’

나는 한숨이 푹푹 내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애매해지긴 했어도 딱 하나만큼은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으니까. 조금 전 대화를 통해 착호 부대라는 집단이 혈액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 오기 전. 최악의 경우 아예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헌데. 대가만 충족한다면 혈액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으니 마냥 나쁘게만 보긴 어려웠다.

‘오른팔 때문에 과연 원만한 거래가 가능할까 걱정은 된다만…….’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면 저들도 구태여 나를 밀어내려 하진 않을 테니 지금부터라도 근원석을 모아 혈액을 구매해 ‘인간성’을 관리한다.

그러면. 성장에도, 복수에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생각의 전환이 이래서 중요한 건가?

방향을 약간 틀어 주었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두통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찝찝하고 아쉬움은 남아 있지만. 세상만사 내 뜻대로 안 되던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나는 애써 마음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현재 보유 중인 근원석 정도로는 여기 있어 봐야 할 게 없을 테니 일단은 자리를 뜰 예정이었다.

“가자.”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 나는 흐트러졌던 장포를 정리하고서 미련 없이 방향을 꺾었다.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을 향해.

잠시. 원활한 혈액 구매를 위해 이 근처에 자리를 잡을까도 고려해 봤으나, 그랬다가 착호 부대와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피곤해지는 건 오로지 내 쪽이었기에 거리를 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중간중간 맞닥뜨릴 괴물들만 제외하면 여기서 아파트 단지까지 왕복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퍼엉!

번쩍―

“……?”

순간적으로 제법 큼지막한 폭음과 함께 밤하늘이 일순간 환해진다. 마치 폭죽이 터진 것처럼.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저쪽이다!”

“잡아라!!”

하나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생생하게 들릴 만큼 거친 포효였고. 또 하나는.

파앗!

털썩―

“사, 살… ㄹ…….”

“……?!”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듯 일렁거리는 허공을 뚫고 눈앞에 나타난,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였으나 극히 미약한 탓에 귀를 기울여도 제대로 듣기 힘든 여인의 읊조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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