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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1화 (11/232)

11화

* * *

“후우…….”

툭―

이미 쓸 만한 물건은 죄다 털린, 남은 거라곤 헤진 소파에 철제 사물함 몇 개가 전부인 인력 사무소.

이래저래 찾아보다 적당히 허름해서 사람이든 괴물이든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법한 건물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벽에 기대앉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입에서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밤새 죽음의 문턱을 오고 가는 전투와 추격전을 치르면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위험하다면 위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튜토리얼’ 보상으로 한 차례 회복되었기에 망정이지. 추격전이 길어지든가 해서 시간이 더 지체됐다면 누적된 피로를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졸도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워낙 급하게 주거지를 찾느라 페르니스들과 헤어졌던 장소와 가까운 데다가 여전히 오른팔에 남은 크루톤의 혈 향에 더해 땀까지 흘린 탓에 몸에서 풍기는 악취로 자는 사이에 괴물들이 들이닥치는 건 아닌가 불안하다만.

“어차피 이런 컨디션으로는 얼마 못 버텨.”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잠을 자자.

최소한의 체력이라도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으니까.

끄덕―

확고하게 마음을 정한 나는 속으로 괜찮을 거란 얘기를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하며 장포에 몸을 감춘 채 구석진 곳으로 기어 들어가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와 적막함으로 가득한 공간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 * *

“으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눈이 번뜩 뜨이며 사라졌던 빛이 돌아왔다. 다만 눈을 감기 전과 다르게 곳곳이 불그스름하게 칠해져 있었다.

놀랍게도.

반나절이나 잠들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깬 것이었다.

“대책 없는 놈.”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의 체력 회복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 대다가 결국 무방비한 상태로 반나절이나 흘려보냈다니.

참 황당하고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론 대책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본디.

수면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 그런 만큼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종종 일어날 것이다.

까딱하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니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기 전에 대비해 둬야 했다.

“…차원 상점.”

그 고민 끝에 나온 답은 ‘차원 상점’이었다.

동료…….

내 등을 믿고 맡길 누군가가 생긴다면 베스트겠지만, 작금의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도 위험한 게 사람 아니던가.

따라서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나아가 언제든 내 방패가 되어 줄 주거지 마련을 위해 고를 선택지는 차원 상점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안전지대 설치권’인가 하는 물건만 사면 괴물은 물론 허가되지 않은 사람의 침입까지 막을 수 있다고 들었다.

빠른 시일 내에 그런 물건을 구매해서 방호벽을 세우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단지.

이를 행하려면.

“일단 모아 둬야 하나.”

근원석 복용을 멈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장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나약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판단했기에 근원석을 습득하는 즉시 복용해 왔다.

헌데 수면이라는 항거 불능의 문제를 겪고 나니 비축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흐음음…….”

복용이냐, 비축이냐.

무엇이 옳은지 고민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꼬르르르륵―

“우선… 밥부터 먹자.”

지독하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지는 상념의 끝자락에서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난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방에서 고구마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탁―

탁―

으적―

굽지도, 그렇다고 찌지도 않은 생고구마를 어떻게 먹을까 고심하다 대강 겉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껍질째 입으로 가져갔다.

노인이 싸 준 짐에는 라이터도 있기에 구워 먹으려면 얼마든지 구워 먹을 수 있다.

허나.

굳이 굽지 않아도 식용 가능한 걸 구태여 소중한 가스까지 낭비하면서 호사스럽게 굴고 싶지 않았다.

아끼다 뭐 된다는 말은 잘 알지만.

한번 피워 놓고 장작만 공급해 주면 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을 맞이하기 전까지 불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둘 요량이었다.

그나저나.

으적―

으적―

향상된 감각 때문인가.

고구마를 씹을 때마다 달고, 쓰고, 떫은맛이 제각기 따로 노는 데다가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할 수준은 아니나 먹는 내내 찌그러진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다른 감각들의 변화를 이미 경험해 본 터라 미각 역시 적응이 필요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거 제대로 적응하기 전까진 되도록 자극적인 음식을 피해야겠다.

뭐.

가진 거라곤 고구마와 감자밖에 없으니 상관없을 테지만 말이다.

꿀꺽―

끝끝내 얼굴을 찌푸린 채로 물을 마시며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를 정리한 후 천천히 몸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 일도 없겠다.

밤이 오기 전까지 남은 두세 시간 동안 성장한 육체에 100% 익숙해지기 위한 적응 훈련을 하고, 이후 어둠이 내려앉으면 이동하는 쪽으로 계획을 잡으며 먼저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멀리, 또 얼마나 잘 보이는가.

발전된 시각의 한계치를 알아내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 * *

‘슬슬 가 볼까.’

짙은 어둠이 깔린 도시.

이따금씩 들려오던 괴물들의 포효마저 사라질 즈음,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대기하던 나는 사위가 조용해지자 거리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목표는 전과 동일했다.

‘아파트 단지가… 이쪽이었지.’

중간에 원치 않게 길이 좀 틀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최종 목적지는 아파트 단지.

거리는 대략 30여 분.

이런저런 위험 요소를 고려해도 서너 시간 안팎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

타다다다닷!!

“키에에에엑!!”

“키에엑!”

‘……!’

앞뒤를 살피며 나아가려던 찰나.

뭔가가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짙은 그림자 속에서 아침에 헤어졌던 페르니스들이 괴성을 지르며 불쑥 튀어나왔다.

안 좋은 이별을 했던 탓일까?

놈들은 새벽 내내 보여 주었던 집요함을 완전히 각인시키듯, 날이 저물고 편히 활동할 수 있는 밤이 되자마자 내 뒤를 쫓아와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추격에 능한 놈들이라곤 하나 벌써 반나절이나 지나 거리에 남아 있는 냄새도 거의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이게 끈질긴 추적의 힘인가?’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나조차도 지정한 대상이 1km 내에 존재한다면 추적할 수 있지 않던가. 하물며 ‘감각’이 훨씬 뛰어난 저놈들이라면 시간의 흐름으로 옅어진 냄새일지라도 어렵지 않게 따라왔으리라.

기민하게 원인 파악을 마친 나는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잠깐, 왜 세 마리뿐이지?’

서서히 뒷걸음치던 차에 흐릿하게나마 시야에 잡힌 페르니스들의 숫자가 고작 세 마리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분명 다섯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둘은 어디 가고 셋만 쫓아오는 거지?

게다가.

‘…다쳤어?’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는 개체는 몸통 한쪽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놈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했다. 그랬기 때문에 늦은 밤이 되어서야 쫓아온 것 같았다.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면야 태양이 사라진 직후 바로 따라왔을 테니까.

‘이건, 기회야.’

무의식적으로 도주를 떠올렸던 나는 페르니스들의 모습에 우뚝 섰다.

세 마리.

저 정도면 굳이 도망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전투에 있어선 크루톤보다 약한 게 페르니스였다. 무리를 짓고 돌아다니는 탓에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지. 숫자도 줄고 심지어 상처까지 입었다면 사냥 못 할 이유가 없다.

꽈아아아아악―!

가능성이 보이자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해 보자.’

각오를 다진 나는 일부러 느릿하게 걸으며 거리가 좁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빠져나왔던 인력 사무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교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입구를 틀어막고 싸울 작정이었다.

투다다다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침없이 뛰어오는 페르니스들. 줄어든 간격 속에서 서로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흐읍!’

머릿속으로 타이밍을 재던 나는 선두에 선 페르니스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먹을 뻗었다.

어느덧 세 번째 전투.

실전만큼 경험을 빨리 쌓을 수 있는 무대는 없다고 하던가. 이를 증명하듯 싸움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내 눈에 적과의 간격이 보였고 공격의 타이밍이 보였다.

이 싸움.

정말로 할 만했다.

후우우우우욱―

콰직!

“키에엑!”

칼 같은 타이밍에 뻗어 나간 주먹에 깔끔하게 부서지는 페르니스의 머리통. 손끝을 타고 함몰되는 머리뼈와 박살 난 눈알 따위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쿠웅―

‘다음!’

단숨에 하나를 쓰러뜨린 나는 기세를 몰아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주먹 쥔 손등을 채찍인 양 휘둘러 뒤따라 들어오던 두 번째 페르니스를 후려쳤다.

퍼억!

“케엑, 켁…….”

쭉 뻗은 손등에 목을 가격당해 묵직한 무게감을 선사하며 옆으로 휙 날아가 벽에 처박히는 페르니스.

한 번에 죽이진 못했지만, 충격이 상당한 듯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부들부들 몸을 떨어 댔다.

‘저놈부터!’

나는 쓰러진 놈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 뒤늦게 입구로 들어서던 페르니스를 공격했다.

전투 중에 적에게 뒤를 내주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후방을 무시하고 앞을 뚫을 수 있는 한.

‘하아!’

뒤를 내준다 해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우욱―

쾅!

콰드득―

강렬한 파육음과 함께 짓이겨진 머리를 땅에 박으며 쓰러지는 페르니스.

즉사였다.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엑!!”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던 페르니스가 동족들의 허무한 죽음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그 소리가 마치 절규처럼 들렸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재빨리 다가가 몸통을 후려쳤다.

후우우웅―

쿠웅!

우에서 좌로 온 힘을 다해 뻗은 스트레이트에 2m에 다다르던 페르니스가 버티지 못하고 날아간다.

“켁, 케엑…….”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부들부들 떠는 놈.

콰직!

일말의 자비 없이 머리를 터트려 죽여 버렸다.

순식간에 끝나 버린 전투.

“후우.”

종전과 동시에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바로잡은 나는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예상외의 선전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늘어난 신체 능력이 힘을 발휘한 건가?

이런 기세라면 지형을 잘 잡는다는 가정하에 페르니스는 다섯까지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전의가 전신에 휘몰아쳤다.

그렇게 승리를 만끽하던 와중.

“…이쪽이야!”

“…음?”

조용해지던 밤거리를 가르며 느닷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빨리! 좀 더 빨리!”

“형석아! 좀만 버텨! 금방…….”

족히 너덧 명 이상은 되는 숫자가 단번에 뽑아내는 음성의 파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감을 느낀 나는 서둘러 페르니스의 시체에서 근원석을 추출한 후 몸을 숨겼다.

태양이 불태워 주지 못하는 탓에 역한 피 냄새가 퍼지고 있는 터라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정체불명의 저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꾹 참고 기다렸다.

그사이.

“아! 그놈들까지 잡았어야 하는 건데!!”

“지금 그게 중요해? 형석이부터 살려야지!!”

“누가 뭐래? 살리러 가고 있잖아! 그냥 아까워서 그러는 거야. 아까워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가 나서 몇 초만 일찍 도착했어도 그놈들까지…….”

“쉿! 둘 다 조용히 해!”

이젠 다급한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무리.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지 경계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앞을 빠르게 지나쳐 가는 사람들.

듣자 하니 누군가 다쳐서 치료하기 위한 장소를 찾는 중인 듯했다.

하여.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이라 여겼고, 곱게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딱.

“형석아! 조금만 버텨 줘……! 곧 ‘헌혈 카페’야! 금방 ‘수혈’해 줄 테니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

‘……?’

기묘한 단어가 들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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