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 외전 하나.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쳤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얼어붙어 코와 입 주변엔 살얼음이 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사방엔 눈에 덮이지 않은 자리가 없어서 소문으로만 듣던 북해의 설경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곳은 청해였다.
본래 중원으로 향하기 위하여 한중을 넘던 황사열은 그곳에서 그를 알아본 하오문도를 만났다.
덥수룩한 수염과 조금 늘어난 얼굴 주름,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에 퀭한 눈을 한 자기 얼굴을 거울이나 호수에 비추어 봐도 예전의 인상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건만.
대체 어떻게 그가 황사열이라는 걸 알아봤는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그 하오문도는 그가 원하던 걸을 단번에 내놓음으로써 관심을 돌려버렸다.
“청해 서녕의 북쪽, 길이 없는 숲속에 무림향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사열은 자기를 대번에 알아본 눈썰미에서 비롯된 신뢰감을 바탕으로 기꺼이 발길을 돌렸다.
“과연 그렇군.”
숲을 헤쳐나가다 오른 언덕에서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숨어있는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는 적잖이 감탄했다.
신강이 아니어서 헛걸음이 비교적 짧았다고 생각하니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황사열은 곧장 언덕을 내려가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황사열이라고? 이거 몰라보겠구먼.”
“흑사왕은 오지 않은 것인가?”
“뭐 운명하셨다고? 허허, 이거 참 안타깝군.”
“흐음,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지.”
황사열은 이 상황을 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천마신교와 치렀던 결전 이후, 꼬박 30년이 흐른 지금이었다.
그때 당시에 활약했던 손꼽히는 고수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당장 그의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해도,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 동장군 속에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채 장작을 패고 있었던 철권왕 안효철과 눈만큼 하얀 백발에 허름한 의원 복장을 한 천수기륭 당혁수는 가장 대표적인 절대 고수들.
비슷한 또래에 상당한 기백을 갖춘 고수 중에도 눈에 익숙한 면면이 있으니 화산파의 매화검존(梅花劍尊) 영은성과 개방의 용공개(龍供丐) 최현걸, 대호거궐 백두기와 철권왕 안효철의 진전을 동시에 이은 소호무쌍(少虎無雙) 소문적 등이 그들이었다.
이외에도 아주 어린 소년소녀들도 몇 명 있었는데 오랜만에 외지인을 봐서 그런지 황사열을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효철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런데 자네……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게 느껴지는군. 역시 한판 하러 왔나?”
“그렇소만, 여긴 호랑이굴보다 더한 곳인 것 같소.”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당당히 도전하러 온 자를 핍박할 만큼 여기 사람들이 그리 좀팽이들이 아니야.”
“천무경 노선배는 살아계시오?”
“이런, 이런…….”
안효철이 시선을 돌려 북쪽의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가옥을 흘끔 바라보았다.
“살아야 계시지만, 살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를 상대로 힘자랑하는 건 아니겠지? 천하제일인이 목표라면 다른 사람을 골라야지.”
“……사부님께서 임종하시기 전에 천노선배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만, ……진도건이 정말 그 정도요?”
안효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보시게나.”
황사열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주변 풍경을 쓱 둘러보았다.
마음껏 싸울만한 장소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영은성과 최현걸, 그 외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고수들은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뭔가를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상대도 안 되는 녀석들이…….’
황사열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일생의 목표로 ‘증명’ 하나만을 품고서 지금까지 달려온 그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와 자웅을 겨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안효철과 당혁수 정도겠지만, 그들을 상대해도 그는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젊은 청년이었다.
“황사열 선배님이시죠? 진서우라고 합니다. 아버님과 할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사열은 조금 놀랐다.
잠깐 진도건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계 핏줄도 진하게 섞인 탓에 좀 더 곱상한 인상으로 느껴졌다.
“안내하거라.”
“예.”
진서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황사열도 뒤따랐다. 부엌으로 들어가서는 처음 들어왔던 문의 반대 방향에 나 있는 문을 열자 바깥 풍경이 드러난다.
“봄이었다면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렸을 텐데요, 하하하.”
진서우가 너스레를 떨면서 중얼거린다.
아버지와 어머니 성격의 딱 중간 정도로 느껴졌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손님 모셔 왔습니다.”
진서우가 앞으로 쭉 나서서 두 손 모아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데 바깥의 햇살로 인해 그의 뒷모습이 좀 더 명확하게 황사열의 눈에 들어왔다.
적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북풍에 휘날리면서 잠시 옛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시 돌아서서 황사열을 바라보는데 눈동자도 묘하게 붉은 기운이 감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진서우는 황사열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
황사열은 아주 잠깐 사패소룡비무제 때를 떠올렸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별거 없는 사내처럼 느껴졌던 당시의 진도건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 기억이었다.
지붕이 하얗게 눈 덮인 정자엔 진도건과 천서은 그리고 천무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찻물을 뜨겁게 우려 하얀 김이 새어 나오는 찻주전자와 다반, 다기 등이 놓여있었다.
황사열이 천무경을 향하여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사열이 천노선배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은발에 가까울 정도로 반투명한 백발과 수염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우화등선할 것처럼 보이는 천무경의 모습은 그의 과거 기억을 반추해보았을 땐 체격이 조금 작게 느껴졌다.
나이를 셈하면 100세에 가까워졌으니 어울리는 모습으로 늙었다고 생각되었다.
“와서 차부터 드는 게 어때요?”
50세가 훌쩍 넘은 천서은은 여전히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그녀의 미소는 봄꽃처럼 화사하고 동장군마저 물러설 정도로 따스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나는 그리 여유 부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누구와 붙으면 되겠습니까? 천노선배께서 기백이 여전하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안효철 선배는 진도건과 겨루길 권하더군요. 눈은 회복된 것 같으니 검을 쥐는 건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괜찮겠나?”
황사열이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헤어질 때만 해도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눈동자, 장님 신세로 기억하던 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처럼 검은색으로 회복되어 있었고 두 눈의 초점도 분명하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입 주변부터 턱 아래 조금 길 정도로 턱수염까지 길었으니 모두 정상적으로 나이가 들었음을 느꼈다.
진도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내려왔다.
천무경, 천서은 부녀는 딱히 걱정하지 않는 표정.
진도건이 정자 한쪽에 세워놓았던 목검을 들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목검이라고? 자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건방이 너무 심하군. 현철흑검을 들게. 내 기억하기로 자네 부인의 것은 부러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여길 누가 가르쳐주었는가? 혹시 누군가 그댈 바로 알아보고 알려주지 않았던가?”
처음 물음에서 황사열은 진도건이 두려워하거나 경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두 번째 질문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왜 묻지?”
“역시 그렇군. ……인적없는 곳에서 수련했을 자네를 누군가 바로 알아보았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도 계속해서 봐야 옛 얼굴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자네 얼굴에 고난이 새겨져 있는데,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그자, 마라 파피야스다. 기억하겠지.”
진도건의 말에 황사열이 미간이 좁아지다 점점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네게서 느껴진다. 마지막 남은 마정 한 조각, 아마 금태하가 다시 끌어모은 것이지.”
검은 태양의 날.
단용후가 소환한 아홉 개의 마정.
거기에는 금태하의 것이 포함되지 않았다.
세상에 퍼진 혼돈의 마는 개개인의 손에 의해 명확한 기색을 가진 마도로 분할되었고 경지에 이른 자들은 모두 단원진의 손에 의해 마정을 형성할 수 있었다.
금태하도 엄연히 명확한 마도를 이루었다 볼 수 있지만, 그는 그런 과정의 기회가 없었던 만큼 상당한 기운을 빼앗기면서도 중핵만큼은 지켜낼 수 있던 것이다.
“내게 그렇게 말하더군. 마지막 한 조각 청소를 부탁한다고 말이야.”
황사열이 가만히 서서 잠시 생각했다.
‘날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 내가 찾아온 것이다. 나로선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
황사열이 마지막 생각의 단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로선 달라질 건 없어.”
진도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혈마라도 내 안에 있었다면 네 안의 그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오직 나 하나뿐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 목숨을 끊어내는 수밖에 없다. 네가 마도를 포기하면 다른 길을 모색해볼 수 있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황사열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듯한 웃음 속엔 광기와 슬픔 모두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다.
“……큭! 이봐, 진도건 동생. 내가 왜 내 아버지가 이끌었던 백호계파를 두고 흑사계파의 계주의 제자가 된 줄 아나? 천하제일인의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야. 마교와의 결전 이후로도 힘을 잃은 사부를 계속해서 따라간 줄 아는가? 내 사부가 걷는 길이 나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내 선택이 옳았는지 증명하는 것일 뿐이네. 다른 길은 없어.”
“길이 한 가지인 방법은 없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지. ……이제 그만하지. 싸우기에 여긴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자네가 장소를 지정하면 내 그 자리로 가겠다.”
“……여기서 하지.”
“살림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충분하네.”
피해를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황사열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뭔가 무시당하는 느낌.
황사열은 두꺼운 장포를 훌렁 벗어버렸다.
그렇다면 남김없이 다 박살 내버릴 기세로 암흑구백마공의 진기를 일으키는데,
‘엇……!?’
맹렬하게 일어났던 마기가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어둠을 품고서 불길처럼 일어난 기운이 그에게서 얼마 벗어나지 못하고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줄어들어서 피부에 맞닿더니 더더욱 몸속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황사열이 진도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오른손에 목검을 쥐고 그를 고고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무언가가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귀신……?’
그렇게 의문을 품을 때, 진도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땅에 마(魔)가 떠나지 않은 이상, 신(神)은 언제나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네.”
“감히 건방지게!”
황사열이 소리치면서 진도건에게 쇄도했다.
아니.
그러기 위해 도약했으나 몸에 힘도, 속도도 실리지 않는다.
몇 걸음 달리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는 순간, 진도건이 그를 향해 진정으로 쇄도했다.
검귀(劍鬼)가 마(魔)를 제압하니, 마침내 신(神)이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리라.
심검(心劍)은 폭주하려는 마기를 억눌러 심장으로 응축, 결정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향하여 내지르는 진도건의 목검에서 무형의 검기가 발현하여 마정을 꿰뚫는다.
동시에 그를 지나쳐서 몸을 바로 세우며 목검을 휘두르니 꿰뚫린 마정이 검기의 꼬리를 물고 황사열의 심장에서 흘러나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순간의 황사열은 죽은 자.
한계까지 몰아붙여서 미약하기 그지없었던 여생의 불꽃은 그렇게 마지막 남은 마의 한 조각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털썩.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은 결투의 결말에 천서은은 합장하여 황사열의 넋을 위로했다.
진서우가 들어오자 진도건이 말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동지였었고, 젊었을 땐 경쟁자였던 분이다. 황 숙부의 장례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신경을 쓰거라.”
“예, 아버님.”
진서우는 황사열의 시신을 끌어안고 뒤뜰을 나섰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천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길,
“마지막 남아있던 우려도, 오래도록 경쟁하던 미운 벗의 미련도 사라졌으니 나도 이제 고집스럽지 않게 남을 필요가 없어졌구나.”
천서은은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지우며 늙은 부친의 주름진 손을 쓰다듬었다.
“아버지, 손주도 보고 가셔야죠.”
딸의 이야기에 천무경이 웃음을 흘리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껄껄껄…….”
그리고 평온한 표정으로 부녀가 이마를 맞대며 미소 지었다.
진도건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자 위로 얼어붙은 폭포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