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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30화 (430/432)

430화 - 제81장. 종막(終幕)의 장(章) (5)

흔히 이야기하는 금분세수가 아니었다.

산서 태원 천무방의 현판도 내려가고 터전도 비워졌다.

천마신교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죽어 얼마 남지 않기도 했지만, 천무방이 가진 무학과 자산, 명성 등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정말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소속했던 무림인들은 이합집산하면서 몇 개의 군소방파가 생겨났다.

하지만, 가장 명성이 드높았던 천가와 백가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천무방 해산 때 방주 대행을 맡았던 천준이 반대 의견을 냈다가 천무경의 바위 같은 주먹에 머리를 한 대 쥐어박히고 굴복했다는 우스운 소문 정도만이 강호에 남았다.

강도혁과 검객들은 팔공산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사망자의 부러진 검 자루만을 챙겨왔고 한동안 마을에 통곡하는 소리만 가득했다고 하였다.

강도혁도 검림을 해산하였다.

검림을 상징하는 것은 총수였던 백령신검 강정학의 존재였는데 그가 사라졌으니 유지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검객들은 일부는 흩어져 호북과 호남 등지에 검파를 세웠고 일부는 가족과 함께 그대로 팔공산 마을에 남았다.

강도혁과 서저위, 매연선, 이현탁 등 사위검총은 강호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천무방에 이어 검림의 핵심 전력도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자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필 그 사라진 인원들 대부분은 마귀성 결사대에 참전했던 사파의 고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천도 강호에서 점차 잊혀졌다.

그들은 마교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청해와 신강 등 새외를 떠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 없었다.

반면 정파의 고수들 몇몇은 그대로 사문에 남아있었지만,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는 선택을 했다.

소림의 범굉대사는 장경각주가 되었다. 방장은 계속해서 범우대사가 맡으면서 소림사는 한동안 내실을 다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마교와 치렀던 일전을 물어볼 때면 범굉대사는 정심으로 수양에 몰두하여 입마에 들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개방의 홍두형은 방주 자리를 내려놓고 원로원에 들었고 소개 최현걸은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다며 사라져버렸다. 후임은 홍두형의 사촌이자 장로 신분을 가졌던 자였는데 이름이 칠공(七公)이라 했다.

화산파는 문파의 재건에 계속해서 힘을 썼고 영은성은 장문인의 자리에 오르는 대신 모두의 검술 스승이 되었다. 하지만, 그도 복귀한 지 10년째가 되던 해에, 화산에 나타난 최현걸과 함께 어딘가로 떠나버리고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무당파는 소요자와 청명 모두 돌아오지 않자 큰 혼란에 빠졌다.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 세력이 위축된 건 당연했다. 그들은 자신의 검술과 무학을 지키면서 언젠가 다시 한번 태상노군이 점지한 천재가 무당산에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천당문은 다리에 장애가 있던 아들이 가주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당혁수 역시도 종적을 감추었다.

천하오절이 모두 사라지면서 새로운 세력과 인물들이 강호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종남파의 멸문으로 비워졌던 종남산에 새로이 들어선 도문이 금나라의 횡포에 맞서거나 중재하면서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니 명성이 급부상하였다.

종남산에 자리 잡은 도문의 이름은 전진교(全眞敎)라 하였고 전진교주는 새로운 천하오절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어느 도화가 가득 피는 섬에는 황씨 성을 가진 고수가 유력한 실력과 괴팍한 성격으로 명성을 크게 얻었고, 감숙 난주에 백타산장(白塔山莊)이라는 문파가 신흥 사파중에서도 악독함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곳 장주의 성이 구양씨(歐陽)씨라고 하였는데, 운남의 사혈주 잔당이 세운 산장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강호에 우려가 떠올랐다.

천마신교가 절멸했던 시기 운남에선 사혈주가 완전히 지리멸렬하였는데 당시 사혈주를 쫓았던 녹림의 주태소는 사혈주를 멸한 건 자신들이 아니라 대리국의 황제가 직접 토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강호에 소문이 크게 퍼졌다.

대리국 18대 황제는 그 시기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보고자 사천당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천수기륭 당혁수를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금분세수를 한 탓에 실력을 겨뤄보지 못하고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간 것에 크게 아쉬워했다.

다만 ‘대리국의 황제의 지법(指法)이 매우 훌륭하였다’라는 당혁수의 평가가 후문으로 사천과 운남 일대에 퍼지기도 했다.

수년이 지나면서 강호는 천마신교와 일전을 치렀던 세력들과 사람들을 점차 잊게 되었다. 노소를 불문하고 은퇴와 같은 선택을 한 그들을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지만, 조금씩 확산하는 전화의 조짐과 금과 남송, 서하 등 삼국의 치안이 악화하면서 새로운 협객과 영웅을 찾기에 바빴다.

다만 어느 시점에 한 가지 이야기가 사천 땅에 잠시 오르내리다 사라졌다.

그건 청해에 무림향(武林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산다는 이야기였다.

강 위를 두 발로 건너거나 바람에 몸을 태워 하늘을 나는 듯 달리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모두 어느 깊은 산골짜기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하였다.

곤륜산에 신선이 산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너무나 허황한 이야기였기에 그것을 진실로 믿고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문의 진실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 * * *

쏴아아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진도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폭포를 바라보았다.

그와 폭포 사이에 나타나서는 날갯짓하며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새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그저 흐릿한 형체뿐이었다. 물소리 사이로 들리는 옥구슬 굴러가듯이 지저귀는 소리에 그것이 새라고 유추한 것이었다.

“쩝.”

진도건이 입맛을 다시면서 몸을 돌렸다.

정자의 그늘 아래로 산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눈처럼 하얗게 셌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잿빛으로 본래의 검은 색이 조금 차오른 듯했는데 눈동자도 머리카락과 동색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이 돌아온 만큼 잃어버렸던 시력에도 차도가 조금 있었다.

처음엔 그저 하얗고 뿌옇게만 보이던 세상이 조금씩 색깔 구분이 가능해졌다.

사물이 색의 대비를 이룰 때면 형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여서 사람처럼 그 크기가 큼지막하면 기척과 목소리 등을 취합하여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폭포 때문에 귀가 소란스러웠지만, 아주 미약한 기척 하나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그가 앉아 있는 정자 아래의 초록색 지면으로 작은 뭔가가 꼬물거리면서 느린 듯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진도건이 씩 웃었다.

“서우(瑞尤)야, 이리 온.”

“아빠아-!”

네 살짜리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으로 정자로 다가왔다. 하지만, 머리만큼 높은 정자 위로 아이가 올라올 수는 없었다.

“우으……!”

아이가 바둥거리자 진도건은 소리를 쫓아 정자 위를 기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서 더듬거리다가 마침내 아이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고 안아 들 수 있었다.

“이쁜 서건이가 아빠 보고 싶어서 왔구나? 오구오구……. 아들, 엄마는 어딨니? 응?”

“아빠. 손님. 손님 왔어요.”

“손님? 혁우 아저씨가 왔니?”

“아니, 아니.”

진서우가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했다.

진도건이 아이의 몸이 좌우로 뒤뚱거리는 걸 품에 꼭 안으며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 뒤뜰로 통하는 집의 뒷문 쪽에서 기척을 읽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한없이 흐릿하기만 했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방문에 진도건은 속으로 간만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마라 파피야스.”

마라 파피야스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후! 좋아 보이는군.”

진도건이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가 있는데 뱀을…….”

“아아, 걱정하지 마라. 네가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은 네 심안에 비친 모습이니. 아이의 눈에는 그저 노인네로 보일 것이다.”

진도건은 그 말에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음을 알았다.

마라 파피야스는 천외천 이상의 존재.

염소의 뿔을 이마에, 드러난 두 팔엔 비늘이 두드러지고 티베트 고승과 같은 옷차림 사이로 검은 뱀이 그의 몸을 타고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마음에 비친 환상이라고 그가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다.

‘검이…….’

그렇다고 경계하지 않아도 될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의도가 더욱 의심스러운 존재.

검이라도 곁에 두어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지만,

“내게 네 검이 통할 거로 생각하느냐?”

“……안 통하겠지.”

진도건은 이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너와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이야.”

“가까운 미래?”

“그래. 가까우면서도 너의 사후에 네 손주 녀석이 마주할 일에 대해서 말이야.”

“손자라면, 서우의 아들?”

“너도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나타나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까. 너의 입으로 이야기를 대를 이어 전하게 한다면 마음의 준비들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말이야.”

“어째 피하고 싶은데.”

“하하하! 뭐, 이해한다. 나의 꼬임에 빠진 단씨 삼대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너는 알고 있으니까. 진씨 삼대가 같은 꼴이 되지 않을지 어떻게 장담하겠어?”

“잘 아는군.”

“하지만, 듣지 않을 도리도 없고. 안타깝게 됐네.”

마라 파피야스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진도건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얘기해봐, 무슨 이야기인지.”

“앞으로 백 년쯤 뒤에 네가 떠나보낸 단짝이 잠시 돌아올 거야.”

“단짝?”

진도건은 반문하자마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모습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한, 그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였다.

“혈마?”

마라 파피야스가 씩 웃었다.

“어때? 더 듣고 싶지?”

“하하하하……!”

진도건이 어느 때보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살면서 굳이 떠올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 이름이었지만, 마라 파피야스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서 들었다.

진도건과 마라 파피야스의 대화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야기도, 요구도 명확했으며 진도건은 거기에 공감하고 또 수긍했다.

잠시 후, 뒤뜰로 들어선 천서은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들 진서우는 뒤뜰에서 나무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정자엔 남편이 된 진도건이 한 노인과 마주 앉아 나누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럼 여생을 잘 보내게나. 마을도 잘 이루고 말이야.”

“결국은 내 손자의 선택에 달린 일이야.”

“후후후! 알고 있어. 그리고 네 손자는 반드시 내 뜻대로 움직여줄 것이네. 그 시기의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고 긴 전쟁으로 인해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을 거거든. 알리 라 다바스가 만든 폭풍의 여파로 말이야.”

마라 파피야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천서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천서은의 눈동자엔 노인의 모습으로 비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인의 몸에서 그녀의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공을 익힌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낭자는 언제나 아름답구려.”

“당신은 누구죠?”

“아아, 내 진짜 이름은 남편에게 들으면 될 것이고……. 이 늙은이의 원주인을 소개하자면…… 이름은 영서, 성은 권씨라고 하네.”

마라 파피야스가 대답하면서 그녀를 지나치는데 마지막 이름과 성을 들은 천서은은 깜짝 놀랐다.

권영서.

천마신교와 싸우면서 천마신궁과 마귀성 어느 곳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자의 이름.

“무영각주!”

천서은이 급히 몸을 돌려 부르는데 어안이벙벙해졌다.

권영서의 모습이 어디 멀어져가는 기척도 없이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천서은이 다시 몸을 돌려 진도건을 불렀다.

“여보!”

진도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권영서가 마라 파피야스였을 줄이야.”

천서은은 너무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진서우를 품에 안고는 정자로 가서 진도건의 앞에 앉았다.

“여보,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눈……!”

천서은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아이를 안지 않은 손은 반사적으로 벌린 입을 가리는데 동그랗게 떠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진서우가 조막만 한 손을 펼쳐 진도건을 가리키면서 방긋 웃었다.

“아빠, 머리카락이랑 눈이 까매지고 있어요.”

진도건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가 웃으면서 아들과 아내를 같이 끌어안았다.

“그래, 너무나 잘 보이는구나.”

남편과 아내가 조용히 흐느끼고 아이는 신기한 듯이 잿빛에서 검게 변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꺄르륵 웃는다. 그리고 그들의 하늘에서 폭포 소리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선명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만 들려왔다.

“이건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뭐, 그렇다고 고마워하진 않아도 돼. 내 요구를 받아주었으니 보답을 하는 게 인지상정인 데다가, 장인이 찾아왔는데 눈먼 상태로 맞이하는 게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어서 맞이하라고.”

진도건과 천서은은 마라 파피야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부부는 더 기뻐할 틈도 없이 눈물을 훔친 채 정자를 달려 내려와 집의 뒷문을 통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정문으로 나온 부부와 아이는 그들이 사는 집 앞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진도건과 천서은 부부가 사는 집은 예전에 대마의 유변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의원들이 모두 떠나면서 버려진 마을과 함께 두 사람이 자리 잡은 이후 처음으로 들어서는 방문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맨 앞에서 금방 노익장이라도 과시할 듯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진도건과 천서은 그리고 두 사람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발견하고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으하하하하! 손주야, 손주야! 네 할아버지가 왔다!”

천무경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산천이 떨었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에 진서우가 화들짝 놀랐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급히 달래보았지만, 진서우는 끝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으애애애애앵……!”

“아버지!”

천서은이 화를 내며 소리치자 천무경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그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은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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