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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29화 (429/432)

429화 - 제81장. 종막(終幕)의 장(章) (4)

“혹시 눈이 내리고 있어?”

“아니.”

“흠.”

진도건이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서은은 그런 진도건의 얼굴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눈동자가 백화(白化)되면서 시력을 잃어버린 건 무척 당혹스러웠다.

반면 진도건의 표정은 무척 평안해 보였다.

바위 위에 앉은 채 어딘가를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차분하게 호흡하는 모습은 마치 득도한 도사처럼 보였다.

“방주님께서 오시는군.”

진도건의 말에 천서은이 고개를 돌렸다.

천무경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뒤로 금태하가 이쪽을 바라보다가 제자인 황사열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몸 상태는 어떠냐? 시력은 아직 그대로고?”

“예, 방주님.”

“천마신교는 무너졌고……, 흑막이라고 할 수 있는 천신들의 이야기는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

“방주님께서 느끼시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 땅의 염려는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흐음, 그거참 찝찝한 대답이군.”

천무경의 말에 진도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천서은이 그를 보고 득도한 도사로 본 것처럼 천무경의 눈에도 진도건은 그 누구보다 마음이 홀가분해진 상태인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마무리 짓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무너뜨렸어. 이런 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쉽게 굳어지는 법이 없는데 말이야.”

“저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님”

“자네가 짊어진 역할도 이 정도면 끝났을 테니……. 이제 내 딸이 장님이 된 자네를 아직 차버리지 않았다면 이젠 장인어른이라 불러도 좋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천서은이 부친을 타박하면서도 진도건의 한 손을 꼭 붙잡았다.

진도건이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인어른.”

“훗.”

천무경이 피식거리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은 대화였음에도 어쩐지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결전이 끝나고 위령제를 열었던 밤.

두 남녀는 천무경에게 다가와 강호 무림을 떠나 외진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때 만해도 진도건은 시력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정도였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나빠져 버렸다.

“천무방에서 영란이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진도건이 고개를 들었다.

천서은에겐 그가 천무경을 올려다보고 있다고 느꼈지만, 천무경은 진도건이 자신을 지나쳐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력을 잃었기 때문인지.

“장인어른. 마도의 근원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할퀴고 난 흉터는 지울 수 없습니다. 북방에서 시작된 전쟁의 전조는 조금씩 커져서 수십 년 후엔 중원을 시작으로 이곳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그것은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니 미리 내려놓는 것이 편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내다보고 있으니 미리 피신한다는 뜻이냐?”

평안했던 진도건의 표정이 슬픔에 물들었다.

“……어차피 싸울 준비는 또 해야 합니다. 시력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따로 떨어져서 저 자신을 다스려놓고 있는 것이 나은 일이겠지요.”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쉬고 싶긴 하구나.”

“……청해로 갈까 합니다. 자리를 잡으면 서신을 띄우겠습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천무경과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천천히 움직일 두 사람을 남겨두고 천무경은 무림인들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개방과 하오문은 알게 모르게 진도건과 천서은의 이동을 주시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땅으로 꺼진 듯, 하늘로 솟은 듯 사라져버렸다.

* * * *

보름간의 귀향길로 마침내 옥문관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이 여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결전의 날 이후로 무림인들은 내상과 소진된 기력을 회복해왔지만, 열흘째부터 내공이 흩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천무경과 당혁수, 안효철, 범굉대사, 홍두형, 제갈무문, 백두기, 남궁평 등 창천맹을 중심으로 한 무림세력 수반들은 무림의 대선배로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적으로 아래 단계로 전파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선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무공이라는 본질 자체는 사라지진 않아도 누려왔던 ‘기’의 축복은 점차 줄어들 거라는 걸.

이미 진도건과 여정을 함께 하거나 인연이 있었으므로 모두 어느 정도 이미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의도된 마도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을 때, 그것의 반작용으로 자연적 외기는 크게 들끓었다.

마도는 강력한 마인들, 마교도들을 양산하면서 동시에 신마라 불리는 존재들의 탄생까지 이뤄냈지만, 역으로 보통의 방법으로 수양하는 무림인들이 취할 수 있는 기운도 많아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파천무봉 천무경, 백령신검 강정학, 흑사왕 금태하와 같은 절대 고수들이 한 시대를 지배하고 바깥으로 활약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태극검선 소요자, 천수기륭 당혁수와 같은 신진 화경 고수가 등장했으며 밑바탕이 없었음에도 철권왕 안효철이나 혈마검귀 진도건과 같은 자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도라는 열원이 사라졌으니 다시 들끓었던 자연기의 온도는 점점 가라앉을 것이고, 들끓었던 시기에 가장 큰 혜택을 누렸던 강호 무림은 가졌던 것들을 다시 자연에 내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불가항력일 테니, 그저 순응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다른 무림인들의 혼란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 골치 아픈 부분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천무경 등은 며칠 뒤에 좋은 해결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서주랑을 따라 주천을 지나 장액을 바라보는 길에 이르렀을 때, 무림인들은 발길을 멈추었다.

일단의 군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조태상군이 그들을 환영하며 나타난 줄 알았다.

하지만, 뒤편으로도 일단의 군이 나타나 가로막고서 마침내 장군기를 들어 올렸을 때,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완안기로군!”

범굉대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홍두형이 황당해하며 천무경을 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무슨 의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홍두형은 발을 떼지 못했다.

제갈무문이 그의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금황제 완안옹은 상처 입은 무림의 맹수들을 토사구팽하려는 생각입니다. 아마 저 황금갑옷의 주인은 완안홍균이겠지요.”

전위를 가로막은 군사들 사이에서 백마를 탄 황금갑옷의 장수가 그들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완안홍균이 맞아.”

안효철이 시야를 돋워 먼 거리를 꿰뚫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서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행했을 때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전투 준비! 궁수 준비!”

앞뒤로 지휘관들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찌합니까?”

범굉대사의 물음에 천무경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교가 사라지고 무림의 단합을 두려워하니 그렇게 해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게 무슨…….”

“아무래도 여기서 창천맹 해산을 선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무경의 말에 범굉대사는 물론 다른 이들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바로 그때 금군 측에서 ‘발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후훅!

섬뜩한 울림을 담은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앞뒤로 화살들이 새까맣게 솟아올라 하늘을 가렸다.

천무경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가주와 내가 화살을 멈추지요. 아직 기운들 차고 넘칠 때 실력 발휘 좀 해봅시다.”

천무경이 그 말을 하면서 하늘 높이 뛰어오르자 당혁수도 피식 웃으면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띄웠다.

두 사람만큼 상단전이 개방된 고수들도 없었으니 그들이 발휘하는 허공섭물의 신력에 의해 거짓말처럼 화살들이 하늘에서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무경이 파천신공의 기운을 일으켜 화살이 수놓은 하늘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꽈르르르릉-!

파천의 벽력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만 발이 넘는 화살을 타고 번갯불이 타고 흐르니 모두 산산이 조각나고 불이 붙은 채로 땅에 떨어져 내렸다.

군사들에게서도 무림인들에게서도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당혁수는 지면에 착지했지만, 천무경은 그대로 하늘에 떠 있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다니.

무림인들도 여전히 익숙한 광경이 아니었으며, 금군은 더더욱 그러하여 혼란이 일어난다.

천무경은 그 상태로 하늘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외쳤다.

“마도척결에 앞장서서 싸워준 강호의 동지들이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이제 마침내 창천이 열렸으니 맹의 역할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천무경은, 창천맹주로서 맹의 해산을 선언한다! 그리고 동지들의 귀향을 돕기 위하여 길을 여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할 것이다! 그대들 앞을 우리가 지킬 것이다……!”

천무경이 그렇게 말을 마치면서 가장 최전선으로 날아가 땅에 두 발을 놓으니 천하오절로 불렸던 고수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 여겨졌던 고수들 모두 천여 명의 무림인들 사방에 포진하여 선다.

그 외침을 듣지 못한 금군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 때, 천무경이 광의에 가득 찬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소리쳤다.

“하하하하! 창천의 선도자(先導者)들이여! 길을 열어라!”

그날.

3만 명의 금군은 약 5천여 명의 부상병을 남긴 채 혼비백산하여 퇴각했다. 그리고 창천맹과 강호무림의 결사대를 비롯한 천여 명의 무림 고수들은 금군을 뚫고서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사방으로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창천맹의 해산 소식은 곧 강호 전역으로 퍼졌다.

무림의 중심 세력이 사라지면서 다시 강호는 문파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금나라와 관군은 창천맹을 토사구팽하려 했다는 전적으로 보복을 염려했지만, 단합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자 일부는 안심하는 태세를 보였다.

그렇게 평범한 시간이 흐르면서 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또 하나의 큰 소식이 강호 무림에 퍼졌다.

그것은 천무경이 창천맹에 이어서 천무방마저 해산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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