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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28화 (428/432)

428화 - 제81장. 종막(終幕)의 장(章) (3)

* * * *

옥문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신강 사막 한가운데서 ‘마귀성’이라 불리었던 아단지모에서 다시 한번 위령제가 열렸다.

흙으로 단을 쌓고 남서쪽 멀지 않은 수풀림에서 엄동설한에 메마른 통나무, 나뭇가지 등을 구해와 그 위에 쌓았다. 그리고 이 결전에서 죽은 모든 시신을 정렬하여 눕히고 삼매진화를 일으켜 불을 놓았다.

해는 서쪽 하늘에 기울어 황혼이 지고 있었다.

천산의 만년설도 울긋불긋 물들어갔다.

바람은 겨울이기에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아단 괴석들 사이를 휘돌아 더 세차게 불었다.

그 바람이 장작들 사이로 스며 불길을 더 거세게 일으켰다.

완전히 타지 못하여 혹여나 이 메마른 황무지에 조그만 원념이라도 남을까 맹렬히 타오르면서 검은 연기를 하늘 높이 피워올렸다.

잠시간에 불과한 일이었다.

천상도의 영향력이 인간도에 미치면서 벌어진 기상천외한 결전이 끝나며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으리라 여기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붉은 기암괴석들은 아직도 이상한 느낌을 남기고 있었다.

큰 사건들로 놓고 보면 불과 4년.

하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이백 년은 거슬러 올라가 따져봐야 하는 거대한 싸움이 마침내 막을 내렸음에도 기쁨을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싸움은 많은 것을 앗아간 싸움이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누려왔던 걸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고 그 허탈함에 눈물짓는 일이 기쁨보다 더 많았다는 건 이 결전의 대가가 꽤 가혹한 일이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화장을 지내면서 넋을 위로하고서 그들은 오로목제까지 모두 함께 이동했다.

남아있는 마교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움직임은 조용히 또 오랫동안 이뤄질 일이었으니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은 걸릴 일이다.

반면 결사대로 싸웠던 이들은 지쳤고 휴식이 필요했다.

거기서 행보는 몇 갈래로 갈라졌다.

결전이 끝난 직후, 냉소평의 일월교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해져 있었다.

가장 초창기 백련교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운 터전을 찾았을 때 못지않게 약해져 있었다.

그들은 음양역전으로 발휘되는 혼돈을 이용하여 알리 라 다바스가 연 ‘검은 태양’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맡았었다.

검은 태양 현상으로 일어난 차원문이 일으키는 인력의 작용에 일월교가 호응함으로써 세상으로 퍼진 마기들을 온전히 차원문을 통해 저편으로 넘길 수 있는 기작을 완성할 수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그들 안에 내재된 모든 마기를 내어줘야만 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냉소평은 기꺼이 그래야 한다고 여겼고 일월교도들은 기꺼이 냉소평을 따랐다.

천하에 세를 일으키고자 했던 천마신교와 달리 그들은 스스로 입마의 길에 미륵의 길이 없음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마도를 걸었던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약해진 그들을 공격하기엔 최적의 기회였다.

애초에 마도의 씨를 박멸하는 것이 이 원정길의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무경은 직접 작별을 고하면서 기꺼이 열어주었다.

지난 은원을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결전에서 기꺼이 치러낸 희생까지 깎아내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찌할 것이오?”

천무경의 물음에 냉소평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도라는 그늘에 감춰진 길이 있다고 여겼기에 일월교를 세웠으나 그것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으니 다시 돌아가야겠지. 결국 백련교도 우릴 쫓아 마도에 들어섰으나 우리보다 먼저 업보를 벗어낸 셈. 일월교의 이름을 지우고 다시 백련교 경내에 들어 미륵경을 공부하는 게 우리가 할 일 아니겠는가?”

“마도의 불씨는 꺼졌어도 무도의 욕심은 지우기 어려울 텐데.”

“클클클! 새로운 무도를 개척하는 것도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지.”

“그럼 바로 고창성으로 향할 셈이오?”

“아니, 일월교 본산부터 정리를 함이 마땅하지 않겠나? 다 비워야 새로 시작할 수 있을 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소.”

“아아, 천산의 겨울은 몹시 춥지……. 클클클!”

냉소평의 웃음소리는 여전했지만, 거기서 예전만 한 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히 박격달봉을 바라보면서 천산산맥 지맥의 끝자락을 향하여 귀로에 오르는 냉소평과 일월교도들의 발걸음은 어째선지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너머로 보이는 천산 박격달봉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지 흐릿하게 보였다.

어쩐지 그들이 맞이할 남은 겨울이 가혹할 것처럼 보였다.

금태하는 검은 태양이 열려 그의 안에 마화(魔化)되었던 내공이 흩어지듯 증발해버리는 그때의 기분을 가리켜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비유했다.

백제성 전투의 패배와 주화입마.

청명의 도움으로 벗어나 마침내 진정한 ‘입마’의 길에 들어서서 무한한 마공의 가능성에 눈을 떴으나 그 장대한 고양감을 끌고 이곳까지 쫓아와서는 모든 걸 잃어버렸으니 일장춘몽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공의 일부에 불과했다.

마화되었으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상당한 내공을 가짐으로써 암연소혼신공으로 대표되는 무공은 조금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몸에 남았다.

하지만, 천하오절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그가 그 정도에 만족할 리는 당연히 없었다.

“난 돌아가지 않겠다.”

“……내가 아는 흑사왕 금태하라면 예전 실력을 되찾는 것도, 구룡문을 재건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연고(緣故) 따위 내다 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흑사왕이 파천무봉 아래에 거론되는 건 딱 질색이야.”

금태하를 향한 천무경의 평가도, 거기에 대한 금태하의 화답도 모두 진심이었다.

“그럼 어디로 갈 텐가?”

“일월이야 지긋지긋한 것이었겠지만, 나는 이제야 맛을 들였는데 벌써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내가 들었던 속삭임이 춘몽에 불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군.”

“비슷하지. 난 내 길을 다시 찾아내겠다. 어쩌면 그게 마도일지도 모르고. 천가야, 세상에 다시 마도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니 걱정된다면 지금 날 치는 게 좋을 거야.”

“……갈등을 끝내고 싶다면 비겁해지면 안 되지. 가시오. 기꺼이 놓아주고 또 기다리리다.”

“후후후! 후회할 텐데? 나는 진심으로 너를 꺾고 싶거든.”

“우리 나이가 있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오. 저승에서 만나는 건 의미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마도 최강자와 겨루길 원하는 당신의 욕심은 채우지 못할 것이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도망치려고?”

“약해진 건 당신이나 마도인들만이 아니오. 화경에 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건 아닌 듯하지만, 나는 알 수 있소. 결전의 날 이후로 우리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후대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이 자연이 앞으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일뿐더러 우리가 소진한 것들을 온전히 회복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오.”

금태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거운 말을 쏟아내는 천무경의 눈빛에서 깊은 현기를 느꼈다.

허황한 일을 실체로써 경험한 이상, 천무경의 이런 말도 허황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네놈은 진정 신화경(神化境)에 이른 것이로구나. ……네가 고금래제일(古今來第一)이다.’

금태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식으로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도망칠 생각은 없소만,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그때가 되면 아마 천하제일고수는 내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소.”

“……무슨 뜻이냐?”

금태하의 물음에 천무경이 시선을 돌렸다. 한곳을 지긋이 응시하자 금태하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의 풍경과 한 인물이 이내 그의 눈빛을 사로잡았다.

원래는 피처럼 시뻘겋게 물들어있어야 할 긴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린 채로 겨울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원래는 피처럼 시뻘겋게 물들어있어야 할 눈동자는 주변 흰자위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백화되어 있었다.

천서은이 곁에서 그의 팔을 붙잡은 채로 함께 걷고 있었는데 돌부리에 발끝이 채여 크게 휘청여댔다.

천서은이 쓰러지지 않도록 버텨주었기에 다시 두 발로 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짓고 감사를 표하는데 그 얼굴이 향하는 방향이나 시선 처리가 어째선지 천서은의 얼굴에 미묘하게 비켜 간 듯한 모습이었다.

금태하가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설마 저 장님을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네 딸년을 말하는 것이냐?”

“지아비를 모실 아이가 얼마나 성취를 이룰 수 있겠소? 게다가 독립하겠다는 얘길 하고 있으니……. 늙은 아비 섭섭하게, 쯧.”

천무경이 금태하에게서 떠나 천서은과 백발백안으로 장님 신세가 된 진도건을 향해 걸어갔다.

금태하는 천서은을 잠깐 보았다가 천무경의 흔들리는 팔 옆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진도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놈이?’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황사열이 그에게 다가왔다.

“인사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넌 준비 되었느냐?”

“저는 언제나 사부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사열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금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자. ……너를 천하제일로 만들어주마.”

“사부님이 먼저 이루실 것입니다. 제자는 그 길을 이어가는 존재이고요.”

“클클클!”

금태하와 황사열이 떠나자 사람들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서쪽 하늘에 천산산맥의 새하얀 봉우리가 장벽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폐허로 남게 될 천마신궁이 있는 요마산의 산봉우리가 한낮임에도 음습한 그늘을 품은 채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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