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 제81장. 종막(終幕)의 장(章) (2)
* * * *
부친의 죽음에 깊이 분노하고 있었지만, 순수하게 그것만을 풀어낼 생각은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지독하게도 괴롭혀온 인연과 은원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강도혁은 도망친 양자성의 흔적을 정말 간절하게 찾았지만, 마귀성은 결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제멋대로 움직여대며 구조를 바꾸어가는 마귀성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았다.
바깥에서 격전의 굉음과 진동이 희미하게라도 느껴질 때면 마귀성 전체가 꿈틀거리듯 요동치면서 길이었던 자리에 갑자기 벽이 생기거나 벽이었던 자리에 길이 열리는 등의 현상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자 강도혁의 심정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다.
쾅! 쾅! 쾅!
검강을 휘두르고 분출하면서 토벽을 부쉈다.
몇 차례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잃어버린 방향감각을 찾을 수 있는 표지판이 나타날 리도 없었으니 이내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또, 또……! 그 개자식을 이대로 놓쳐야 한단 말이냐!”
강도혁이 절규하며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분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땅을 두들겨댔지만, 손만 아플 뿐 화는 풀리지 않았다. 절망감은 씻겨나가긴커녕 답답함만 더해졌다.
망연자실한 채로 그 자리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길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 어느 순간 천장에서부터 갑자기 모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토벽, 천장 등이 모두 무너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
그것이 모래로 끝나지 않고 아예 소멸하기도 하면서 마귀성이라고 여겨졌던 지형지물이 그의 시야에서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붉은 사막 위로 기암괴석들이 높이 솟아 있어서 그의 사방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풍경이 달라져 어안이벙벙해졌지만, 그는 이내 아단지모의 마귀성이라는 본래의 모습과 이름을 가진 곳의 어느 한 지점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기감을 끌어올리자 집단적 기척이 남동쪽으로 꽤 떨어진 곳에 있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북쪽에 보이는 거대한 모래 바위 너머로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아주 미약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강도혁은 떨어뜨렸던 검을 쥐고 일어나 그곳으로 걸어갔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걸어 기암괴석을 좌측으로 돌아 나가자 조금 떨어진 지점의 바닥에 누운 무언가를 발견했다.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처럼 강도혁은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 가까이에 이른 강도혁은 고개를 들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뭐냐, 자성아…….”
양자성은 무릎을 꿇고서, 그것도 엉덩이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이 움츠러든 자세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뜯어보니 여인은 맞으나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이의 노파 시신이었다.
가려지지 않은 팔다리에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앙상했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피부도 거의 말라비틀어져 있어서 양자성처럼 잘생기고 젊은 남자가 넋을 잃고 내려다보는 지금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양자성이 맥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허무함과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무얼 위해 여기까지 달려 온 것입니까……?”
정신없이 달렸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양자성은 아유타가 갇힌 감옥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바로 그때는 마귀성 중심에 알리 라 다바스가 연 차원의 문, 검은 태양이 떠올랐던 순간이었다.
철컹철컹!
“아, 안 돼! 안 돼! 알리 라 다바스, 멈춰!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아유타가 시선을 막힌 천장에 둔 채 몸부림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양자성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광란에 가깝게 몸부림치던 그녀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풀어.”
“뭐?”
“이거 풀어!”
철커덩!
아유타가 몸부림치자 사지를 속박한 족쇄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눈에 불을 켜고 요구하지만, 양자성에겐 푸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그녀를 묶어두기 위해 만든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금속도 아니었고 실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것이었다. 풀 수 있는 열쇠도, 열쇠 구멍도 없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계속해서 내공이 소실되고 있는 상황에서 힘으로 끊어낼 능력도 없었다.
양자성이 무심코 배를 쓰다듬자 붉은 피가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그것을 보았는지 아유타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 떠올랐다.
“오호호호! 네 꼬락서니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마갑과 마검을 모두 잃고 너 자신이 가진 것들도 잃었구나.”
“아유타는…… 내가 영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이 끝이 아니겠지. 내가 다음 해야 할 것을 얘기해라. 그럼 널 풀어주마.”
“호호호! 아니, 넌 이 족쇄를 풀 능력이 없어. 너 따위가 어찌 이 세상의 질서적 존재에 대항할 수 있단 말이냐?”
아유타가 그렇게 비웃고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라 파피야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감히 우리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네가 그 왕좌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가만두지 않겠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뜻 모를 말만 소리치는 아유타를 멍하니 바라보던 양자성이 화난 얼굴로 그녀를 덮쳐 두 손으로 목을 졸랐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 말해! 영생을 산다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
양자성은 가진 기력을 다 짜내어 아유타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고통으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기도가 막힐 정도였음에도 오히려 섬뜩하리만치 기괴한 환청 같은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이미 데스나이트에 복종하기로 한 순간부터 네 운명은 네가 가진 것들에 종속된 것이었다. 그 갑옷과 검 속에서만이 자유를 구속당한 채 영생할 수 있었으나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껍데기마저 죽어버렸으니 네가 영생을 위해 내린 선택은 ‘무의미’해진 것이니라.”
“이익……!”
“그러나 예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상에서 무한의 열반에 드는 길은 깨달음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후후후후후……!”
양자성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이미 출혈이 대량 발생하기도 했고 절망스러운 기분이 감정을 가득 채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은 그만 두 다리로 서지 못 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귀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
천장도, 벽도 무너지면서 사막의 풍경이 조금씩 시야 속에 들어올 때, 족쇄도 사라지면서 자유의 몸이 된 아유타가 두 손을 뻗어 양자성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
“호호호……. 알리 라 다바스, 이 지독한 녀석. 마라 파피야스에 이어 태상노군까지 끌어들여 끝내 혈마를 갈취해갔구나. 아니, 애초에 그것이 네가 그리려던 그림이었겠지. 그래, 이제야 이해하고 만 나의 멍청함이 실패를 부른 것이야. 하지만, 날 이렇게 골탕 먹인 건 네 실수야. 이젠 우리가 널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양자성은 도대체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아유타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러다 말이 끝맺어지고 잠시 후, 아유타의 형형한 눈빛이 점차 꺼져가 결국엔 완전히 빛을 잃었다.
눈빛에 생기가 한 점도 남지 않게 된 순간, 양자성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자리를 빠져나가 사라진 듯한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에 아찔해지는 그때, 아유타가 늙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노화가 일어나며 피부의 탄력을 쪼그라들어 주름을 양산했고 근골이 허약해지는지 몸도 움츠러들듯 작아져 갔다. 말 그대로 손쓸 새도 없이 급격한 노화의 변화를 맞이한 아유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양 공자…….”
아유타의 마지막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남아 귓가에 맴돌다 사라져버렸다.
‘아…….’
…….
어느 날, 천하제일의 검기에 맞선 불길을 보았다.
크고 아름다우며 매우 잔혹한 불길이었다.
철옹성처럼 굳건하던 자부심과 거기서 훔쳐 온 오만함에 깊은 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무자비한 불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불길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깨달았다.
불길을 갖고 싶었다기보다는 마음속에 잠들어있던 무언가에 생명의 불꽃을 지핀 것이다.
언제는 그 불길이 새로운 열의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엔 그 불길이 지나친 욕심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
지나고 다시 되돌아보았을 때, 불길이 태우던 것은 그의 과거와 미래, 그가 가졌고 또 가져야 할 평범한 모든 것들이었을…….
깨달은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음을 깨닫는다.
저벅저벅.
“이게 뭐냐, 자성아…….”
양자성이 간신히 힘을 내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사형의 분노와 회한이 섞인 눈빛이 그림자 사이로 그의 눈에 비쳤다.
사형도 그의 꼬락서니를 보고 알게 된 것이 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허무했다.
자조 섞인 웃음이 절로 지어졌지만, 자신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소리 내진 않았다.
그저 사형을 향하여 고백하고 싶었다.
“……저는 무얼 위해 여기까지 달려 온 것입니까……?”
강도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붉은 핏방울이 입가에 맺혔다.
눈살을 찌푸린 것은 고통 때문인가, 안타까운 감정 때문인가.
강도혁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라도 스승님께 돌아가거라.”
하지만, 그것에 대해 감화가 있었는지 양자성의 메마른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양자성은 강도혁에게 눈길을 거두고 다시 아유타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끝내야 할 때.
몸을 더 깊이 수그리면서 목을 길게 늘어뜨려 빼낸다.
강도혁은 하얗게 드러난 양자성의 목덜미를 보았다.
강정학의 백령검을 하늘을 향하여 세워 들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 힘껏 내리쳤다.
서컥!
아유타의 시신 위로 떨어져 두 바퀴 구르는 양자성의 마지막 얼굴은 눈을 감은 채 어떠한 감정도 남기지 않아 마치 뿌연 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도혁은 백령검을 자신의 검집에 돌려놓고는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양자성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 잃은 육신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천천히 걸었다.
사막의 모래는 붉어서 핏물로 길을 만들었음에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그 피의 길 끝엔 아유타의 시신만이 외롭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