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 제81장. 종막(終幕)의 장(章) (1)
검은 태양은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문이었다.
검은 태양의 인력은 천산에서 시작되어 세상으로 점차 퍼져나갔던 저편의 마기를 모두 끌어당겼다.
마치 물과 물이 가까이 이르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리고 사이에 적절한 매개체만 있으면 조금 더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또한 경사가 이뤄진 길을 놓으면 결국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는 것처럼.
‘문’과 마법적인 인력 구현이 그런 작용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인력은 단용후를, 완성된 천마성을 제대로 끌어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집중되지 못한 힘은 역부족이었다.
단용후의 영혼이 신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혈통을 희생하고 강력한 마력을 담은 매개물로부터 힘을 흡수할 수 있을 때 영격이 신격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알리 라 다바스의 조언은 진실한 것이었다.
단지 그 조언의 실현과 그 후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알리 라 다바스도, 마라 파피야스도, 단용후도 모두 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크아아아아아악……!”
단지운의 육신에서 벗어난 칠흑의 마기로 형성된 영체가 갈가리 찢어져 흩어졌다 뭉치길 반복하면서 단용후의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검은 태양에서 비롯된 마기를 빨아들이는 인력은 너무나 광범위하여 단용후를 단숨에 빨아들이진 못하였지만, 세상으로부터 모여드는 마기의 흐름은 혼돈의 와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세기가 무형의 기력에 대해서 상상하기 힘들 만큼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거기에 저항하면 할수록 칠흑빛 마기는 하늘로 흩어져 퍼져나가 아직 거둬지지 않은 마천경의 어둠과 맞물려 한낮에 칠흑의 밤을 구현했다.
슈아아아악!
진도건으로부터 일어난 혈마의 영체가 검을 든 핏빛 귀신의 형체를 구축하며 하늘로 쇄도했다.
단용후가 전장의 상공을 덮을 정도로 흩어질 듯 몸부림치고 있는 바람에 되려 인력과 와류의 강제력을 덜 받은 혈마의 영체는 오히려 훨씬 구체적이고 집약적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아무리 단용후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마기를 가졌다고 한들 혈마란 존재는 뭉툭한 솜방망이가 아니라 예리한 검극과도 같으니, 마치 신검합일을 연상시킬 듯한 핏빛 검으로 변하여 칠흑의 밤 중심을 찔렀다.
푸와아앙-!
칠흑의 밤하늘에 거대한 핏빛 구멍이 뚫렸다.
그 핏빛 구멍을 중심으로 밤하늘 전체에 흩어져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기를 탐닉하는 혈마의 본성이 천마 단용후의 최심부에서부터 작용한 것이다.
마치 한 방울의 극독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크와아아악!”
“크크크크! 같이 가자고!”
천마 단용후의 끔찍한 비명 속에서 혈마가 웃음을 흘렸다.
“크으으으! ……감히, ……감히!”
천마 단용후가 분노하면서 격렬히 저항하는 그때.
피로 물들어가는 칠흑의 밤에 가려져 땅 위의 인간들은 볼 수 없는 하늘에서 빛무리가 일어나면서 네 명의 존재가 나타났으니,
“인간의 몸으로 천마가 되려 했던 자여, 이젠 봉인될 시간이다.”
“누, 누구냐?”
태상노군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함께 나타난 세 명의 선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영역의 관문에서 아수라들과 싸움 이후, 태상노군의 인도에 따라 우화등선을 마친 도무선인(道武仙人) 주백자가 대답했다.
“천하를 떠돌며 마의 본원을 찾아 헤맸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오늘과 같은 결과로 생을 마감하는 길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검원선인(劍原仙人) 조강선이 고개를 숙여 천마의 밤 너머를 꿰뚫어 보고선 제자 진도건을 시야에 담으며 말했다.
“제가 짊어져야 했던 큰 짐을 제자에게 지우고 죽어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죽고 나서라도 마지막 남은 짐을 거둘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직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제자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가 없다는 것 정도겠지요.”
마찬가지로 억지로 이어왔던 육신의 굴레를 벗어낸 마유선인(魔病仙人) 유변이 천마 단용후의 거대한 어둠을 한눈에 담으며 말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지금 이 노구의 마음은 그와 같습니다. 제 욕심에 빠져 마를 잉태하는 걸 도왔고 그 후 다시 입마를 다스리는 약을 위해 끈질기게 연명해왔지만, 결국 마지막 과업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순간이라면 저의 실수와 과업 모두를 담아내기에 충분할 듯하니 제 삶과 그 끝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태상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고 합장하며 염을 읊조렸다.
“세 선인의 이름은 인간도에 남지 않겠지만, 천상도와 선도에 길이 남아 그 희생을 기릴 것이니, 원시천존의 가호가 그대들과 함께하리라.”
태상노군이 염을 마치고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보패 태극도.
검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활짝 펼치자 두루마리가 태상노군의 손안에서 흩어져 빛무리를 이루더니 검은 태양의 앞에 구궁팔괘와 태극으로 이뤄진 광진(光陣)을 형성했다. 그리고 태상노군이 천마의 어둠을 바라보며 외쳤다.
“영쇄(靈鎖), 구금(構金), 천마(天魔), 봉신(封神)!”
태상노군의 외침에 마침내 태극도의 절대적 봉신력(封神力)이 천마 단용후의 본질에 닿았다.
“안 돼애-!”
천마 단용후가 비명을 질렀다.
칠흑의 어둠이 태극도를 거쳐 검은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격을 갖추었기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온전히 거스를 수는 없어 시간을 늦출 뿐.
천마 단용후가 혈마를 향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속사포처럼 절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놈도 이용당하는 거라는 왜 모르느냐! 나와 함께 하자! 나와 하나가 되어 제칠천의 주인이 되자! 저 오만한 존재들을 모두 굴복시켜……!”
“크크크크……!”
혈마의 조소를 듣는 순간, 천마 단용후는 깨달았다.
신격을 갖춘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진도건이 장태환이 지녔던 음양쌍고검을 깨어 혈마가 귀문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순간, 그는 아수라왕 마하발리로부터 신격의 면모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귀문은 결국 비슈누의 시야가 비치도록 하는 창(窓)이 되었으니…….
지금 혈마는 아수라왕 마하발리와 동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마치 세상 저편으로 떠나는 혈마에게 이 땅의 질서가 전하는 선물처럼.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죽지 않을 것이야! 다시 돌아와 네놈들을 모두 씹어먹어 주리라……!”
“넌 정말 갈 때까지 시끄러운 놈이로구나. 그만 발버둥 치고 들어가, 이 새끼야.”
혈마의 힘이 폭주했다.
혈관처럼 밤하늘을 타고 뻗어나가던 그의 마기가 한순간 모든 어둠을 집어삼키며 하늘을 피로 물들었다.
그 끔찍한 풍경에 땅 위의 인간들이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하는 순간,
제멋대로 흩어지고 퍼져나갔던 칠흑의 어둠이 어느새 인간의 형상을 띠었다.
단용후 생전의 모습이 어둠에 물든 채로 발버둥 치면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니 그를 밀어 올리는 건 그의 심장 검을 찌른 채 피로 물든 진도건의 모습을 갖춘 혈마였다.
영체였으니 심장을 찌른다는 것에 큰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검은 태양의 인력과 혈마의 손아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영적 구속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천마 단용후는 자신에게 무엇이 더 치명적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마기를 빨아들이는 검은 태양도 아니요, 그의 심장을 찌른 혈마도 아니었다.
검은 태양 앞에 펼쳐진 황금빛 태극도진(太極圖陣).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저항의 자유’조차 앗아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천마 단용후의 심경을 태상노군도 느끼고 무심하게 말을 던지니,
“태극도의 선택은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네 영혼은 쓸모가 있어 세 선인이 지켜줄 것이니 영멸(永滅)은 피할 수 있으리라.”
“뭣!?”
천마 단용후가 놀라는데 그가 태극도에 점점 가까워지자 세 선인이 빛으로 변해 다가오더니 도무선인 주백자가 왼팔을, 검원선인 조강선이 오른팔을 붙들었다.
의식에 작동하는 족쇄.
마유선인 유변까지 뒤로 다가와 목을 끌어안으면서 귀에 대고 속삭이니,
“날 마도로 끌어들인 단용후여, 네 마지막을 내가 함께해줄 것이니 외로워하지 말아라.”
“크아아아아……!”
삼선인에 휘감긴 천마 단용후의 영체가 마침내 태극도를 통과했다.
단용후의 검은 영혼이 둥그렇게 뭉쳐지고 세 줄기 백광이 검은 구체의 표면을 타고 휘감았다.
오직 멀쩡했던 혈마가 그것에 팔을 뻗어 손에 쥐고는 잠시 시선을 돌려 태상노군을 한번, 땅 위를 향하여 진도건을 한번 바라보았다.
“잘 가시게.”
태상노군의 말에 혈마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검은 태양이 꿈틀거렸고 이내 혈마를 집어삼키면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 땅에 머물 이유가 사라진 태상노군도 그가 머물러야 할 영역으로 떠나며 모습을 감추었다.
피와 어둠으로 그득했던 하늘이 걷히면서 창천이 다시 열렸다.
어느새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은 태양이 구름을 물리치며 그 광휘를 땅에 비추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하늘에 펼쳐졌던 귀신들의 놀음이 꿈처럼 사라지고 마귀성의 환상은 무너져 아단지모의 붉은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사막 한 가운데서 몽롱한 기분 속에 현실을 인지한다.
차원 저편에서 기인했던 마기는 모두 거두어졌으나 그것만 사라졌다고 볼 수 없었다.
세상에 퍼져나갔던 마기는 역으로 자연지기를 들끓게 하여 충만하게 하였는데 그 열원이 사라지면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달라진 공기는 비단 화경의 고수들뿐만 아닌 전장에 살아남은 무림 고수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기진한 기분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로.
마도를 걸었던 자들도, 정파와 사파로 갈라져 무공을 쌓아 올렸던 자들도.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손에 쥘 수 없고, 가졌던 것들을 잃어버렸음을 느낀다.
휘이이잉…….
따스한 햇살보다 서늘한 사막의 바람이 고요함을 가로질렀다.
부스럭.
그 바람 소리 속에서 작은 소음을 느끼고 바로 반응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공허하고 허망한 기분에 깊이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끝나지 않았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적막 속에 부스럭대듯 들려왔을 때도 그 목소리의 진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당연히 듣지 못했으며 비교적 가까이 있던 사람도 놓치기 쉬웠을 정도였다.
오직 무심코 시선을 던진 자들만이 경악할 자유를 먼저 누릴 수 있었다.
“미, 미친……!”
누군가 토해낸 그 짤막한 말로 인해 모두의 관심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대로 쏠린다.
그 관심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피투성이 몰골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내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뿜어내는 기백은 명백하게 천마성의 마기를 띠면서 전장에 경악을 선물한다.
단지운.
제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영혼을 구속당했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육신을 되찾아 마지막 야심과 자존심을 드러내었다.
쿠쿠쿠쿠쿠!
섬뜩한 마기로 이뤄진 강대한 기백에 고수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모두 휘청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기진한 상태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천무경 등 천하오절을 비롯한 화경의 고수들 모두 마찬가지.
마도를 상대로 한 전투, 검은 태양으로 소실된 마기, 들끓던 자연지기의 진정 등.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을 다시 힘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몹시 위험하고 절망적인 순간이 재차 도래했음을 직감하였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 자루 흑검을 든 채 단지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는 피처럼 붉었던 머리카락이 멀리 보이는 천산의 만년설처럼 새하얗게 새어버린 모습.
머리카락이 그러하듯 혈마에 물들었던 붉은 눈동자도 흰자위에 가깝게 하얗게 변해버린 눈으로 단지운이 서 있을 지점을 바라보면서 진도건이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아니. ……다 끝났다. 이제 다시 시작(原)에 머물러(留)야 할 때다. 그만 끝내자, 단지운.”
진도건이 발을 떼었다.
앞으로 달렸다.
방향이 단지운에게서 조금 빗겨나게 달리고 있었는데,
“……마도의 지존, ……천하무림의 황제.”
단지운이 억지로 쥐어 짜내지만, 크게 나올 수가 없는 갈라진 목소리로 비틀거리며 중얼거리자 비로소 진도건이 달리는 방향이 바로 수정되었다.
천마의 마기가 마지막 불길처럼 격렬히 일렁이고 그 아래서 단지운도 발걸음을 떼며 진도건을 향하여 전진한다.
“……천마군림.”
비틀거리며 걷는 천마의 걸음은 느리되 무거웠다.
달리는 진도건의 발걸음은 경공을 쓸 수 있던 전보다 빠르지 않았으나 매우 경쾌했다.
“……광명대천.”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내가 천마다!”
콰아아아아……!
단지운이 검을 번쩍 들어 천마의 마기를 파도처럼 쏟아내며 쇄도해오는 진도건을 덮쳤다. 그리고 진도건도 망설임 없이 어둠 속에 뛰어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스컥!
어둠이 걷히고 단지운의 머리가 하늘로 튀어 올랐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천마의 잔재를, 야망과 꿈을 불살랐던 단지운의 피투성이 육신이 사막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털썩!
툭!
마지막 마기의 파도를 모두 받아내었던 현철흑검 군자검도 두 동강이 났다.
진도건도 천천히 무릎을 꿇고는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지니 백발이 눈발처럼 맥없이 흩날리다 가라앉는다.
천서은이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내달리며 소리쳤다.
“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