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 제80장. 천제전(天祭戰), 검은 태양의 날 (5)
* * * *
소년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황제가 되는 것이 소년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겐 왕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환경도 없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황제의 행차를 구경하면서 동경하던 것만이 소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싶다.
황제가 되고 싶다.
나의 나라를, 세상을 통치하고 싶다.
소년은 눈길을 돌렸습니다.
강호무림이란 세상이 소년의 눈에 비쳤습니다.
그 세상은 자유로웠고 누구나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상엔 질서가 필요한 법이고 강호무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만의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질서란 몹시 허술하고 또 빈약하여 제대로 된 책임을 지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한 기득권을 가졌고 공간을 허용하는 법이 없었으며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기에 소년은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장성의 바깥은 그런 질서가 약했습니다.
국가의 것도, 무림의 것도.
하지만, 기회도 매우 적었습니다.
땅은 컸지만, 사람은 적고 제각각 흩어져 있어서 큰 동력을 일으키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좌절했습니다.
왕이 되고 싶은데, 황제가 되고 싶은데.
좌절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소년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넌 꿈이 뭐니?”
“왕이요, 황제요. 아니, 세상을 전부 통치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거 같네요. 너무 헛된 꿈을 가지고 달려와 버렸어요. 더 혼자가 되어버렸어요.”
“멋진 꿈을 갖고 있구나. 세상을 전부 통치하는 건 왕도, 황제도 못 하는 건데.”
“하나의 질서로 온 세상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향이고 극락정토가 아닌가요? 왜 사람들은 저들끼리 싸우죠. 내 고향의 나라도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중원을 빼앗겼어요. 하지만, 침략자들도 통일은 하지도 못했죠. 이곳은 또 어떤가요? 작은 땅과 성을 가지고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으스대는 것밖에 못 하죠. 어째서 저들은 그렇게 배포가 작은지 모르겠어요.”
“너의 그 큰 꿈은 왕으로, 황제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는 목표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들이 크다면 큰 대로, 작다면 작은 대로 만족하는 것이다. 정복 전쟁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생각보다 작았던 힘, 생각보다 작았던 권위. 왕도, 황제도 다를 바 없었으니 온 세상을 통치할 수는 없는 거란다.”
“그럼 전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로군요.”
“가능한 길은 딱 하나뿐이지만, 인간의 몸으론 할 수 없단다. 오직 신이 되어야만 가능하지.”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잖아요. 부처도, 노군도 그저 이야기만 남긴 헛소리꾼이었을 뿐이지. 신이 되지 못했잖아요.”
“난 인간에서 신이 되었단다. 내 세상에서 그렇게 됐고 이렇게 이 세상으로 여행도 올 수 있었지.”
소년은 그제야 남자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던 남자에서 그동안 느껴지지 않은 분위기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의 눈이 붉게 물들더니 눈동자는 금색으로 빛나고 그것마저 금빛 동공이 두 개의 금빛 고리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신이라고요?”
“그래, 원래 인간이었던 내 이름은 알리 라 다바스. 다른 세상에서 온 신이다. 나는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궁금하니?”
“알려주세요. 저도 신이 되고 싶어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신이 될 수 있는 긴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꾸나.”
“고마워요. 전 신이 될 거예요. 이 세상을 제가 만든 질서로 통치할 수 있는 신이 될 거예요.”
* * * *
“나 단용후, 천마의 이름으로 제칠천(第七天)의 주인이 되어 욕계의 질서를 다시 세울 것이니……! 알리 라 다바스여, 의식을 거행하여라!”
단용후의 외침이 터진 그 순간,
사방을 가득 채웠던 마천경의 어둠이 하늘 어느 한 꼭지에 빨려들 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지점은 때마침 태양이 떠오른 지점이었고 어둠은 빠르게 모여서 원형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달이 가린 것도 아닌데 마치 일식이 일어나듯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대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바람의 줄기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그 암흑의 만월(暗黑之滿月)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을 뒤집어 태양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한 광경에 단용후는 강렬한 고양감을 느끼면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핫!”
그의 웃음이 마귀성 권역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누군가는 일식의 달을 떠올렸지만, 누군가는 다른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태양의 날……!”
검은 태양이 뜨는 날.
마침내 태고의 의지가 드러날 것이나 이미 모든 인과의 흐름이 그 아래 모여 있어 생멸이 공존하리라.
칠흑의 밤, 피 먹은 공기 속에 남게 될 것 또한 그와 마찬가지일지니,
아아! 억겁을 내달릴 번뇌의 마왕이여!
죽음 위에 우뚝 서리라!
그리고 오직 공허만이 그 전부를 평정하여 잠재우리라!
그리고 신 또한 함께 소멸하리라!
한낮임에도 마천경으로 인해 하늘은 밤처럼 그늘져 있었고 생존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칠흑의 밤을 얘기하기엔 지금의 하늘은 고작 해봐야 초저녁 수준.
그때였다.
단용후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란 속에서 은밀하게 다가와 원형의 포위진을 구축한 자들.
그들의 등장에 단용후의 시선이 어딘가로 꽂혔으니 그 시선 끝에 바로 일월신마 냉소평이 있었다.
“냉소평!”
“후후후후……! 신이라니, 주제파악을 해야지.”
냉소평이 단용후의 부름에 대답 대신 조소를 머금었다.
함께 모습을 드러낸 비로파가 외침을 터뜨렸다.
“시작하라!”
사방을 둘러싼 일월교의 사제들, 제사장들이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펼치면서 범어(梵語)로 이뤄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양과 달이 겹치는 때, 세상에 자리한 혼란을 거두고 미륵정토의 햇살을 다시 내려달라는 내용이 주가 된 염불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냉소평과 삼대수라가 전장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단용후를 중심으로 사방을 점유했다.
일월혼극마공 혼천일기현주(混天一期現呪).
그들이 창천맹 결사대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완성해낸 모두에게 머문 마를 혼돈의 원형으로 되돌리는 주술.
단용후가 외쳤다.
“뭘 하려는 지 모르겠지만, 다 소용없는……!”
“크하하하하핫……! 크하하하하하하핫……!”
그때 하늘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는 거리가 어떻고 간에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들은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단용후의 눈빛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마라 파피야스……!”
“그동안 네가 삼대에 걸쳐 일으켜온 환란 속에서 파생한 열락을 즐기는 일은 참 즐거웠다만, 이젠 네 청운(靑雲)의 야심은 이제 거기까지다.”
“뭣?”
“본원(本原) 마라 파피야스를 가리켜 제육천마왕으로서 열반에 이르는 걸 방해하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 이면의 본질이란 욕계의 질서, 혼돈의 일기 그 자체와 다름이 없느니라. 내 위에 제칠천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꾸리겠다고? 크하하핫! 한심한 자로고. 자식과 손자의 영혼에 기생해 지내는 동안 한심한 야망을 위해 형식적인 것들을 쫓느라 본질을 공부하진 못하였구나. 내 위에 있을 하늘이란 오직 열반에 들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우주의 먼지가 되는 길밖에는 있을 수가 없느니라.”
“……거짓말! 감히 날 농락하려 들다니! 네놈은 그냥 허상일 뿐이야! 새로운 질서는 명확한 본질 위에 다시 싹트는 법……! 다바스! 알리 라 다바스! 나를 어서 저 하늘로 올려라!”
“클클클! 알리 라 다바스는 이미 그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뭣?”
“네가 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가 너를 통해 이 땅에 심은 모든 것과 함께 자기 세상으로, 자기 영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문을 열어달라고 말이야. 이제 작별의 시간이다. 재밌었어, 단용후. 제칠천이라니……. 푸흐흐흐! 내가 천마고, 마라 파피야스이거늘……. 넌 대체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이냐? 크하하하하하……!”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다바스! 다바스! ……다바스으……!”
단용후의 광기 어린 외침에 알리 라 다바스는 응답하였다.
쿠아아아앙……!
그 순간 태양을 가렸던 암흑의 만월, 검은 태양이 갑자기 하늘 전체 가운데 북방 중심 권역을 모두 가릴 정도로 거대해지면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형의 것들을 대한 흡성을 시작한 것이다.
“힘이…… 빠져 나간다……!”
“내 기운이…….”
“내 마기가……!”
알리 라 다바스가 단용후를 통해, 천마신교를 통해 씨앗을 내렸던 세상의 모든 마기가 북천의 검은 태양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 세상에 퍼진 마의 혼돈, 그 잔재들 전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아……!
냉소평을 비롯한 일월교의 교도들 모두 그 자리에서 쓰러져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숨을 헐떡였다. 금태하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이고 있었다.
단순히 마공을 익히고 마성을 깨달은 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강대한 내공을 축적해온 자들조차 그들 안에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혼탁한 마기들까지 빠져나가면서 기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는 그것보다 더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단용후의 육신이 다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진도건이 남긴 검상을 기준으로 피륙이 까뒤집어지면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점점 단지운의 것으로 변해가는 한편, 그 위로 칠흑의 인간 형체가 몸부림치면서 하늘로 빨려들어 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신이다……! …내가 ……천마다……! 오직 나만이…… 제칠천의 유일한 신마란 말이다……!”
같은 목소리임에도 다르게 들리니 모두 그것이 귀곡성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빨아들이는 데 저항하는 귀신 단용후가 그 칠흑의 마기를 팔처럼 사방에 뻗어내어 단지운의 육신을 붙들고 또 지각을 붙들면서 그 인력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신을 버티고 있었다.
마치 검은 귀신이 하늘을 뒤덮어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으니 전장의 무림인들은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비단 단용후뿐만이 아니었다.
“클클클클! 이것이 내 앞에 기다리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구나!”
혈마의 피처럼 붉은 기운의 인간 형체가 귀신처럼 진도건의 위로 거대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진도건 안의 혈마 또한 알리 라 다바스가 단용후와 천마신교를 통해 이 땅에 심었던 마의 씨앗이자 궁극적인 목적에 해당하는 존재.
혈마가 그 피의 불길처럼 일렁이는 몸체 위로 머리를 드러내더니 자신을 올려다보던 진도건을 내려다보며 눈을 맞추었다.
“나 잊지 마라, 이 새끼야.”
진도건이 씩 웃었다.
“어떻게 널 잊을 수가 있겠냐?”
진도건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일렁이는 형체 속에서 혈마도 웃고 있는 듯 보였다.
“큭큭! 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