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 제80장. 천제전(天祭戰), 검은 태양의 날 (3)
* * * *
“……이겨라…………!”
순식간에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 그 끝에 남긴 이혁성의 마지막 말.
진도건의 눈빛이 흔들린 건 전해진 의지에 감화된 반응이었고, 이를 악문 것은 천마신궁 제육천마라대전에서 만났던 존재들의 말이 봉인된 기억으로부터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그놈의 요구로 녀석들의 정신을 지배하여 수족으로 만들어줬다. ……워허허……! 화를 내지 말라고. 어차피 그 당주인 놈을 죽이면 지금 이 대화가 떠오르도록 기억을 봉인할 생각이지만, 세상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생각해.”
‘마라 파피야스……!’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화를 낸다 한들 ‘그’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겠지만, 그날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멈출 수가 없다.
꽈르르르릉!
쿠콰콰콰! 콰콰콰쾅-!
칠흑의 폭풍과 푸른 벼락이 한데서 휘몰아치면서 옥문관에서의 쟁투를 또다시 재현하는 천무경과 단지운.
‘단지운이 아니라고……?’
단지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단지운이 아니라고 한다면 천무경과 싸우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비상식적인 말에도 이미 비상식적인 위력이 현현하는 지금 이 땅에서 스스로 생각을 비틀어보면 떠오를 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
‘단원진……! 정녕 자기 아들의 육신을 삼킨 것이란 말인가?’
비단 파괴적인 전투를 일으키는 것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양자성과 강정학, 강도혁, 천서은의 전장.
스칸다와 금태하의 전장.
야마와 당혁수, 안효철의 전장.
이혁성의 죽음으로 황검당원들이 일제히 무너지면서 공격을 방어하지도 못하고 모두 허무하게 죽음이나 준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위협해오는 토괴들도 흙으로 돌아가 전장이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삼사십여 명의 고수들은 그것만으로도 극도로 다치고 지쳐서 재앙과도 같은 대결의 현장을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
금태하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가운데 백두기가 나서서 스칸다의 뇌화를 막는 방패가 되었고 남궁평의 가문 대대로 지켜온 창궁대연신공의 정순한 내공을 토대로 펼치는 제왕검형은 야마가 펼치는 지옥의 불길을 갈라내었다.
사방에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사특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전투가 격화될수록 사람들의 정신마저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불나방이 되어 저 죽음의 폭풍 속으로 몸을 던지라고 현혹하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그때 범굉대사와 사대금강이 전장의 오방을 점유하면서 일제히 반야심경을 외기 시작했다.
내공을 실은 그들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울려 퍼지며 전장에 무형의 장벽을 쳤다.
무당파 도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궁의 방위를 점유하여 진기를 끌어올리자 자연기의 흐름이 그들 안에 흘러 충만하게 차올랐다.
이것이 무당파의 구궁태극진(九宮太極陣)이다.
다섯 승려가 만드는 염불은 마를 퇴치하는 사자후의 장벽으로서 우(宇)가 되고, 아홉 도사가 구성한 구궁태극진은 주(宙)를 이루어 휘몰아치는 사마의 기운에 굳건히 대항했다.
빌게포첸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전장에 펼쳐진 정백(淨白)의 기반을 등 뒤에 두고 천지를 뒤덮는 사마의 환란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그 경계에 눈을 감은 채 두 발로 섰다.
‘아유타시여, 당신을 구하기 위하여 이 한 몸 보존하려 한다면 종국엔 이 싸움에서 패해 당신께서 그리던 평정(平靜)의 세상도 도래하는 일은 없어지겠지요. 또한 당신께서 오늘날까지 사신 건 오직 미래를 구할 순간에 자신을 던지기 위함임을 빈승은 잘 알고 있습니다.’
빌게포첸이 두 팔을 앞으로 손바닥과 같이 펼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두 눈이 서로 다른 광채가 흐르기 시작했다.
좌안금광(左眼金光), 우안적광(右眼赤光).
빌게포첸은 자신에게 흐르는 신과 마의 간섭을 인지하고 있었으니,
좌수에 서장불교의 정수 대수인을.
우수에 마도에 발을 담근 성혈교의 정수 마라대수인을.
성스럽고도 파괴적인 기운이 각자 다른 양손에서 휘몰아쳐 거대한 부처의 손바닥들을 형성한다.
‘내 안의 부처시여 눈을 뜨소서, 내 안의 마라 파피야스여 눈을 감으소서. 내 안의 불마(佛魔)를 모두 태워 천문(天門)을 열고자 하니 세상이 올바른 섭리로 평정되기를, 내 목숨이 그 밑거름이 되기를!’
두 손바닥을 서로 맞부딪쳐,
대수인(大手印) 합장(合掌).
투웅!
가슴 앞으로 끌어모으니,
합인(合引).
성혈신마 빌게포첸.
혼돈의 근원, 성스러운 피로부터 성화(聖火)가 일어나 그의 영혼과 육신을 불태우니 그 화염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다.
파아아아아아……!
마도의 거마와 불편한 동행을 하는 것이라 여겼던 무림인들의 눈빛이 급격히 떨렸다.
격렬한 성화 속에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육신이 모두의 눈동자에 담기는 순간,
천문이 열리며 비춘 서광이 다섯 명의 절대고수들에게 닿았다.
“도리천과 사왕천의 가호가 그대들을 비추니 마라의 음모를 분쇄하리라! 파순의 껍데기를 불태우리라!”
“크하하하하하하……!”
다섯 천신의 호령에 마라 파피야스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하늘을 타고 울려 퍼졌다.
제석천의 제천뇌광(諸天雷光)이 천무경의 파천신공에,
증장천왕의 판선천검(判善天劍)이 강정학의 백염극원 백령검에,
지국천왕의 비파음사(琵琶音絲)가 당혁수의 만천화우신공에,
광목천왕의 광목용권(廣目龍拳)이 안효철의 무쌍류 두 주먹에,
다문천왕의 영롱보탑(玲瓏寶塔)이 백두기의 육신에 깃들었다.
스칸다를 휘감아서 뇌화를 일으키던 위타천의 타락한 신력이, 야마에게 내재되어 지옥의 겁화를 일으키던 염마의 타락한 신력이 천신들의 위력에 내쫓기듯 물리쳐졌다.
마라 파피야스로부터 금쇄 당해 타락이 깃들었던 두 천신이 마침내 해방된 것이었다.
금태하의 가공할 마공은 스칸다를 짓이겼고, 남궁평의 제왕검형은 야마의 허리를 갈랐으니 두 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천상의 신력은 그렇게 잠깐, 강렬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으니 오직 무너지지 않고 버틴 것은 단지운과 양자성 두 사람뿐이었지만, 둘 모두 위태로운 지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양자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령의 기운이 사방으로 굽이치니 강정학과 강도혁, 천서은은 감히 그에게 오래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그 이상으로 그가 휘두르는 참격을 따라 방출되는 검강의 위력에 절망의 경계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합심하여 틈을 만들고 이따금 공격을 펼쳤지만, 마령검의 위협과 탈혼갑의 방호에 막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빌게포첸의 성화에 의해 천문이 열리고 증장천왕의 신력이 자신에게 깃들었음을 느낀 강정학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전신을 백염으로 덮은 채 양자성이 만든 사령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계속해서 합을 맞춰 싸우다가 멋대로 뛰어 들어간 강정학의 뒷모습을 보면서 강도혁과 천서은이 일제히 소리쳤다.
“아버지!”
“위험……!”
채챙!
순식간에 두 차례 검격이 맞부딪치는 순간, 양자성의 눈빛이 탈혼갑의 가면 뒤에서 급격히 흔들렸다.
사령의 기운이 일시 강정학을 위협하지 못했던 것은 작은 문제였다.
강정학이 거리를 두지 않고 바짝 붙으려 하는 생각이 읽힌 움직임이었는데 그 속에서 동귀어진을 각오한 필사의 기세마저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푸욱!
마령검이 강정학의 명치를 깊이 꿰뚫었다.
등 뒤로 불쑥 솟아오르는 마령검의 기괴한 검신에 강도혁과 천서은이 놀라 내지르는 비명은 두 사람 누구도 듣지 못했다.
“……너로서 죽도록 해주마……!”
“……스승님……!”
강정학의 목소리에 양자성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여 부르니 밀쳐졌던 스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화끈!
양자성은 그 순간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백염을 두른 강정학의 검이 탈혼갑을 뚫고 복부를 관통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그는 애초에 마라 파피야스의 권능으로 힘을 얻은 것이 아닌 ‘죽음의 기사’들의 정점에 있는 존재의 껍데기에 보호받았던 것.
증창천왕의 판선천검이 악갑의 강력한 결속을 갈라내어 길을 열었고 강정학의 검은 관성에 따라 양자성의 육신을 기어코 뚫어낸 것이다.
키아아아아……!
알 수 없는 비명이 귀곡성이 되어 양자성의 머릿속을 때렸다.
복부에서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양자성의 전신을 휘감았던 탈혼갑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손에 쥔 마령검조차 생물과도 같던 조직이 굳어버려 작은 움직임에도 부서지기 시작하니 금방 산산조각 무너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갑자기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양자성이 기겁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면 복부를 꿰뚫은 검을 바로 뽑는 게 위험한 행동이란 걸 알고 자제했을 테지만, 그는 절망과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검을 뽑아버리더니 마귀성 한구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강도혁이 몸을 날려 강정학의 곁에 도달한 순간, 감히 두 손으로 아버지의 몸을 만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천서은도 다가와서 살피니 울컥하는 슬픔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에게 등을 돌린 애제자를 쫓아 안휘 팔공산에서 서역 신강 마귀성까지.
무엇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안심하게 했던 것일까.
한심한 제자가 맹목적으로 쫓던 마의 껍질을 마침내 벗겨내고야 만 것이 기뻤던 것일까.
아니면 마의 주구가 되는 대가로 백령검 대신 쥐었던 마검을 꺾은 것이 기뻤던 것일까.
가슴에 남은 깊은 구멍으로 흘러나온 피가 고풍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은 잦은 사투로 넝마가 되어버린 청의를 검게 물들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반쯤 열린 입술을 적시고 흘러내린 피는 새하얀 수염을 붉게 물들였다. 눈을 감은 모습은 평안했으며 입가엔 마지막에 띄운 옅은 미소를 아직 지키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라 일컬어졌던 검림의 총수.
백령신검 강정학이 운명한 모습은 그가 걸었던 풍운의 족적을 자신에게 새긴듯했다.
마침내 강도혁도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깊이 통곡했다.
“아버지이……!”
천서은도 눈물지으며 강도혁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것이 슬픔의 못에서 그를 끄집어내었는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천서은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후위로 물려주게.”
“그럼 선배께선……?”
“난…… 자성이를 쫓겠네.”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도혁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맙네.”
강도혁은 그 말을 남기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정학의 백령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경공을 펼쳐 양자성이 달아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눈빛은 스승을 해친 제자를, 아버지를 해친 사제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품고 있었다.
강도혁이 자리를 뜨자 천서은은 강정학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얼굴을 적신 눈물을 미처 지우지도 못한 채 경공을 펼쳐 후위로 향했고 바로 보였던 천무방 적멸당의 고수들의 앞에 강정학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시신이 더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강도혁 선배께서 동지 검객들과 함께 시신을 모시고 검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요.”
“맡겨주십시오, 아가씨.”
천서은은 다시 몸을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장에 일어났던 세 개의 축이 무너지고 사천왕들의 가호가 빠져나간 절대고수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장에서 진도건이 몸을 날리며 천무경을 몰아치는 단지운에게로 쇄도하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