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 제79장. 결전의 전야제 (5)
잠시 벌어졌던 소요가 진정된 뒤, 다시 전야제는 정상적인 풍경을 되찾았고 점점 막바지에 이르러 갔다. 그리고 진도건과 천서은은 황사열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패소룡비무제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군. 한 녀석만 빼고 말이야.”
“그렇군요.”
4년여의 세월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씁쓸하군. 비무제가 열리기 전에 나는 내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가장 뒤처져있어. 게다가 삼파전일 줄 알았던 천하오절의 후계들보다 그저 호위무사일 뿐인 녀석이 더 주목을 끌더니 갑자기 실종되어 버리고 말이야. 다시 나타나 오늘에 이르러선 제일 선두에 서 있군.”
“그렇소?”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마교주에게도 한 방 먹였다는 얘길 들었는데. 검마라는 이명을 얻었다던 양자성 그놈이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넷 중에 가장 빛날 사람은 결국 가장 보잘것없어 보였던 자네지 않았나 싶네. 이런 미녀와 짝도 이루고 말이야.”
진도건과 천서은이 서로를 보면서 픽 웃음을 흘렸다.
천서은이 잘 모은 자기 무릎에 팔꿈치를 놓고는 손에 턱을 괴였다.
황사열을 바라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서렸다.
“당신도 그 자식만큼이나 오만했던 인상이 있었는데, 이런 얘기를 들을 줄 몰랐네요. 변한 건가요? 아니면 저희를 방심하게 할 요량이신가요?”
“난 머리는 적당히 쓰자는 주의라네. 다만 지금은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도 흑사왕을 쫓아서 왔어요. 금태하란 한 인물의 성격이 바뀌진 않았지만, 그가 걷는 길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데도 말이죠. 제자로서 아직 얻을 게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들었나?”
“암연소혼신공이 주화입마를 부른다는 것은요. 무엇을 보고 있는 건가요?”
천마신교가 무너진다는 것은 곧 마도가 무너진다는 것과 연결된다.
또 천마신교로부터 느꼈던 강호의 공포는 또 하나의 마도 세력의 깃발이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금태하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하다.
그는 암연소혼신공이 궁극적으로 흑암구백마공으로 발전하게 된 자신의 상황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 자신감이 독자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긴 했으나 구룡문과 사패련을 이끌었던 경험은 다시 그로 하여금 세력을 구축하도록 재촉할지도 몰랐다.
혹은 천하를 주유하면서 강자들에게 도전하는 행보를 걷는다면, 그래서 그의 손에 쓰러지는 자가 많아진다면 그 또한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음이다.
여러모로 견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도건은 황사열이 그런 사부의 진로에 의문과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전쟁이 끝나면 이 시대에 마성으로부터 힘을 얻은 것들은 모두 소멸할 수도 있소.”
“음? 그게 무슨 말인가?”
“금태하는 무공을 크게 잃거나 혹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오.”
“하하하! 자네 실력을 내 칭찬하긴 했지만, 상승무공에 대한 경험은 내가 더 깊은데 말이야. 한 사람이 가진 기질(器質)도 쉽게 바뀌는 법은 없지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쌓아 올린 내력의 기질(氣質) 또한 그리 쉽게 사라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네.”
“흐음.”
진도건은 황사열에게 굳이 천상도의 천신들이나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전의 회의에서 어느 정도 상황 설명을 해주긴 했어도 그것이 무림의 많은 고수가 이룬 성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진도건이 지적한 지점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으나 인과를 모르는 황사열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황사열의 반응은 또 의외였다.
“사부님도 똑같은 소리를 하던데. 우리 중 선두에 있으니 예상하기 힘든 지점을 내다보고 있다 이건가?”
진도건은 내심 조금 놀랐다.
‘금태하가 마성 소실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건가?’
눈빛이 잠깐 가늘게 흔들렸지만, 겨울밤의 그늘과 아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며 불빛을 비추는 화톳불로 인해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황사열은 진도건의 관심 어린 속내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덧붙였다.
“무작정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제자를 버릴 생각은 없었는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셨고 나도 관심을 두게 됐지. 주화입마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는 분명 다른 마도인들처럼 사부님께도 힘과 영감을 동시에 주었다네. 그러면서도 아무런 정보도, 어떤 도움도 없이 이곳까지 따라온 데에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을 지속해서 느끼고 있으셨다 하더군. 그게 뭘까? 무엇이 자신을 이곳에 이끌게 한 것인가?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조금 풀린 모양이시네.”
“그게 뭔데요?”
황사열이 씩 웃었다.
“다 얘기해줄 수는 없지. 하지만, 나도 알 수 있는 게 있다네. 만약 사부님께서 성공적인 길을 찾으셨다면 나도 그 뒤를 따를 것이고. 천마신교에게 그랬듯이 자네들은 나와 사부님께 가장 강력한 도전자가 될 것 같다는 것을 말이야.”
“호오. 그럼 지금 당신을 꺾어두는 게 좋겠는데요?”
“하하하!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놈으로 보이던가? 자네가 아까 얘기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을 방심하게 할 요량이냐고. 덤벼볼 생각이라면 방심하지 말게. 싸움의 성패는 절대 단순하게 흘러가는 법이 없으니까.”
천서은은 황사열이 오만한 만큼 대담하고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
호적수로서의 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문파 존폐가 위태로운 지경에서 오직 사부의 등을 쫓아 이곳까지 이르렀다. 그것이 막연한 행보임은 틀림없지만, 이곳에 이르도록 발걸음을 놓는 동력은 금태하와 닮은 강자존의 가치 추종일 것이다.
“됐어요. 전 당신을 경시하지 않기에 일대일로 당신을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하진 않지만, 우리 둘을 이길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전 딱히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죠. 그만한 가치도 없거요. 당신이 당신의 사부만큼 강해지면 그때 한번 다시 고려해볼게요.”
천서은의 답에 황사열이 진도건을 보았다.
“자네도 생각 없나? 난 자네랑 겨루는 것 자체로 항상 흥미가 있는데 말이야. 자네라면 좋은 기준이 될 것 같아서.”
“호위무사는 공녀의 뜻을 따를 뿐이오.”
진도건의 대답에 천서은의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황사열은 둘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디 결전의 때에 둘 모두 무사히 살아남아 혼인까지 하길 바라는 건 내 진심이네만. 호위무사 시절 못 버리면 평생 잡혀 살 거야. 보라고. 그 천가의 피를 이은 딸이라네.”
“하하하!”
진도건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천서은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그쪽이 더 걱정이에요. 그렇게 야심만 쫓다가 혼처도 찾지 못하고 홀아비가 될 거 같아서 말이죠.”
“혈혈단신은 야심 넘치는 무인의 낭만이라네.”
“낭만은 무슨.”
“그리고 걱정하지 말게나. 내 여기서 괜찮은 처자를 발견해서 말이야. 오늘 밤은 그 처자를 좀 꼬셔볼 참이거든.”
황사열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좋은 밤 보내게나. 아,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변변찮은 객잔도 없는 유목민들의 부락지에서 아늑하고 은밀한 잠자리 찾는 게 쉽지 않으니까. 보라고, 다들 저렇게 움직이고 있잖나.”
황사열은 주위를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키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의 말에 진도건과 천서은은 자기들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골족과 몽골족, 거란에 색목인들도 모여있는 마을이었고 젊은 아낙들의 용모는 이국적인 매력이 흘러넘쳐서 혈기 넘치는 사내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관심은 통한다고 벌써 짝을 이루어 파오에 들어가거나 은밀한 자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행위들이 취기에 힘을 받아 몹시 과감한 느낌이었다.
“하하…….”
천서은이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도건의 눈길을 느끼고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도 갈까?”
진도건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내려 다가온 손등을 보다가 그의 손 아래로 자기 손을 집어넣었다.
“달빛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아름답군.”
“훗. 왜 이래요? 낯간지럽게. 취했어요?”
“취기가 당신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거 같아?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져도 수위는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고.”
진도건과 천서은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마신 포도주가 꽤 되었다.
도수도 은근히 있었고 일부러 내공으로 술기운을 밀어내지도 않았으니 기분이 제법 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볼도 발그레 홍조를 띠고 있는 건 괜스레 부끄러워진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계세요.”
“절대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도 혹시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성. 결전을 앞두고 편히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 우리가 사랑을 불태울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데?”
“뭐래.”
천서은이 핀잔을 놓듯 말했지만, 진도건이 일어나며 손을 살짝 잡아끌자 그녀도 따라 일어났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천무경과 백두기가 파오 안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서로 눈을 맞추고 그 순간 둘의 모습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오로목제 동쪽 박격달봉이 솟아오른 천산의 지맥 끝자락과 인접한 숲속에서 두 사람은 이동을 멈추었다. 달려오는 길목에서 이미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남녀를 스치듯 목격하기도 했다. 그것이 자극으로 다가왔는지 두 사람의 입술이 거칠게 포개지고 서로의 옷을 벗겼다.
동장군 불어 재끼는 입김 따위 우습다.
진도건과 천서은의 몸은 그 어느 남녀의 몸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라 서로를 향하여 깊이 얽혀 들어갔다.
다시는 나누지 못할 것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뜨겁게 서로를 탐닉해갔다.
* * * *
“후후후……후후……!”
마라 파피야스가 몸을 떨면서 웃음을 흘리자 알리 라 다바스가 흘끔 시선을 던지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리 라 다바스의 눈에도 보였다.
오로목제 위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열락의 강력한 에너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래라면 없었던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 자연 속에 사라졌어야 할 에너지의 파장이 거대한 조류를 이루어서는 하늘 위 마라 파피야스의 하늘에 닿아 그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대좌에 드러누운 채 제 몸을 만지작거리고 또 꼬면서 희열의 기쁨을 토해내는 데 그 모습이 마치 자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신들을 보았지만, 당신 같은 존재는 또 없습니다.”
“후후후후……!”
마라 파피야스가 그의 말에 동감한다는 의미인지 또는 희열에 젖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신의 용상에서 상체를 세워 앉은 마라 파피야스가 여전히 자기 몸을 만지작거리고 또 한 손으론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그렇게 젖은 손가락을 핥고 또 빨아대자 알리 라 다바스는 더 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제 인간들의 시간으로 그리고 너와 나시드가 찍은 날까지 이제 이틀 남았구나. 준비는 됐어?”
알리 라 다바스는 마라 파피야스에게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준비는 됐습니다. 절 이해 해주셔서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야. 나의 하늘에 머물면서 느낀 게 있을 텐데. 인간으로 태어나 신격을 얻었거늘 그 모든 걸 아까워하지 않고 내던질 준비하는 그런 배포라면 자네는 이 차원의 나를 대신할 수도, 자네 차원의 마라 파피야스가 될 수도 있다네.”
“당신 같은 존재가 있듯이 저와 같은 존재도 있어야 우주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아하하하하! 아쉬워. 아까워. 자네와 함께 한 시간이 참 재밌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놓아줘야지. 그래야 자네 복수가 어떻게 끝나는지 멀리서나마 관람할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되니 말이야.”
알리 라 다바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도건과 천서은의 뜨거운 정사를 내려다보면서 거기에 반응할 인간적 욕망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의식 속에 새겨놓은 복수를 위한 상흔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복수의 열망보다 더 뜨겁게 그의 영혼을 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