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 제79장. 결전의 전야제 (4)
그런 웃음소리를 흘려보내면서 진도건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끝날 겁니다. 저희가 앞둘 결전은요. ……하지만, 전쟁은 다시 시작될 거예요. 수십 년 후에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다고 했으니까 어디든 평화가 지켜지는 땅은 없을 겁니다. 조용히 숨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해질 정도로요.”
“……신들이 그러던가?”
“신? 뭐 어디 무당말이라도 들으셨습니까? 하하하! 다툼이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나기 마련인데, 큰일 하신다고 걱정만 느신 것 같습니다. 그런 말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금과 송 두 황제도 친교를 맺으면서 꽤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까지 소문이 자자한데, 끽해야 지역 분쟁 정도나 일어나겠지요.”
안효철이 진지하게 반문하는데 깊은 내용을 알 길이 없는 엄환은 우스갯소리처럼 되물으며 안효철의 말을 덮었다.
진도건은 엄환의 말에 굳이 반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가질 수 있는 기대치까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 퍼진 근원적 혼돈이 작금의 천마신교에 관한 사태가 해결되면서 사라지더라도 그것이 남긴 여파까지 걷어지지 않음을 진도건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안효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일단 오늘은 마음 편히 즐기게나. 충분히 먹고 마시면서 쉬게. 남은 걱정은 결전을 치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나도 자리를 비켜주겠네.”
안효철이 그 큰 몸집을 끌고 걸음을 옮기면서 엄환에게도 손짓했다.
눈치 좀 챙기라는 신호였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엄환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자 진도건과 천서은이 시선을 교환했다.
축제의 구석에서 어쩌다 보니 둘만 남게 된 것이었다.
천서은이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 좀 걸을까요?”
“그러자.”
진도건과 천서은이 일어나 잔치의 현장을 걷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다가 그 중심에 들어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하오절을 포함한 절대고수들 그리고 강호무림의 손꼽힐 정도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정파와 사파를 가르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환담을 나누거나 논검을 펴기도 하는 등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정사 간의 은원, 문파 간의 은원이 언제 있었나 싶은 정도로 제법 어우러져 있었다.
천서은이 한쪽을 가리켰다.
“스님과 도사들이 저래도 돼요?”
“……의외로 입맛에 맞나 본데?”
그녀가 가린 곳은 사대금강 중 료심과 료학, 무당파 도사 세 명이 천무방 적멸당 무인 세 사람과 어울리며 포도주를 즐기고 있었다.
한 번 마실 때마다 아미타불과 원시천존을 외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번뇌를 씻어내고 싶어하는 의지가 느껴졌지만, 웃음이 그려진 얼굴 표정과는 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적멸당의 면면은 두 사람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장학과 하소정이 있었고 백두기의 제자 소적문도 있었다. 과거에 진도건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고 조용히 지내던 곽유소도 있었다. 나름대로 실력을 키우고 또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결사대까지 포함되어 온 것이었다.
그들도 진도건과 천서은을 발견하고는 서로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았다.
“이젠 둘만 남았네요.”
천서은이 작게 중얼거리는데 진도건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문관 전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장학과 하소정을 따로 만나서 장우태와 관무영의 죽음을 애도했다. 천혼당으로 있던 시절 가장 실력과 단합이 좋았던 장학이 이끌던 조가 이제는 둘만 남아 추억을 그리게 되었다.
“예전에 일월신마에게 죽은 나지룡 형의 시신을 보았을 땐,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는데. ……전쟁 수준의 싸움을 계속 치르다 보니까 이젠 그때만큼의 분노는 올라오지 않는 것 같아.”
“책임의 무게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죠. 그때는 돌아가신 노 장로님과 장학 조장님의 조원들과 함께 싸우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여기 있는 사람들의 미래를 걸고 싸우고 있으니까요. 죽음은 당연히 슬프지만, 빨리 받아들여야만 하죠.”
두 사람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강정학을 중심으로 일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공통적으로 가까이 패검하고 있었는데 강정학의 이야기에 경청하면 또 한 사람씩 나서서 강도혁을 상대로 막대기를 들고 공작을 시연하기도 했다. 그러면 강정학이 훈수를 두곤 했는데 그때마다 시연자들 모두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얼핏 들었는데 검림을 해체한대요.”
“왜?”
“본래도 문파의 형식을 취한 조직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제자들이 많이 죽거나 다쳐서 팔공산에 있는 그 가족들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고 계신 듯해요. 그래서 그 가솔들을 거둬서 다른 곳으로 이주한 다음 조용히 칩거할 계획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분은?”
진도건이 강도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유롭게 결정해서 살라고 하셔서 고민이 깊으신가 봐요. 강 총수께서 툭 던지듯이 내린 결정이니……, 근데 선배님도 문파 창건에 큰 뜻은 없으신 듯해서…….”
“신검의 검학이 묻히는 건 아까운 일인데.”
“어떻게 하실 거 같은지 내기할래요?”
“좋지. 뭘 걸까?”
“그냥 나중에 때가 되면 작은 소원 하나 들어주기?”
“괜찮네.”
“전 강도혁 선배가 총수님의 길을 따라 걷지 않을까 싶어요.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제자에게 더 큰 관심을 두었을 때도 묵묵히 뒤를 받치며 따르셨던 분이니까요.”
“내가 그 말 하려고 했는데.”
“후후! 제가 좀 빨랐죠? 도건은 다른 걸 예상해 봐요.”
“으음……. 그럼 난 생각을 좀 꼬아서……, 천무방에 가입하시지 않을까 싶네.”
“천무방에요? ……흐음, 어쩐지 잘 어울리는 방향이긴 하네요.”
천무경이 이 전쟁을 통해 강호무림으로부터 받는 경외심이란 가히 대단해서 천하제일신검의 진전을 잇고 그 아들이기도 한 강도혁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서은이 옥문관에서 두 부자를 방문하여 안부를 물었을 때, 짧게나마 관전할 수 있었던 단지운과의 대결에 대해 깊이 감탄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었다.
인재 영입에 항상 열려 있는 천무방이었으니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천서은은 천무경으로부터 천무방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따로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내기에서 이기려고 일부러 그 얘기를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눈길을 끈 곳은 씨름판이었다.
언제 합류했는지 안효철이 한겨울 웃통을 모두 깐 채로 도전자를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탈혼갑을 떼어내느라 몸에 남은 흉터 자체는 끔찍했지만, 의외로 근육질의 거구와 노익장의 인상까지 맞물려 꽤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사대금강 중 하나인 료성과 사파의 이름난 외가 고수인 팔금산인(八禁山人) 오두화(吳頭和)가 동시에 덤벼들고 있는데 안효철이 두 사람의 힘을 동시에 역이용하면서 기가 막힌 솜씨로 눈 속에 내던지고 자빠뜨렸다.
“한번 도전하는 거 어때요? 원류검결로 만드는 힘의 흐름은 단순히 빠르기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묘함이 있어 당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안 대협의 무쌍류는 적수공권에서 당대 최고의 무공이야. 원류검결은 검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맨손으론 당해낼 수 없지. 백 장로님 정도는 나와줘야…….”
오오오오!
씨름판에 환호성이 가득 찼다.
“딱 맞췄네요?”
천서은이 웃으며 반응했다.
진도건이 말하자마자 한쪽에서 백두기가 웃통을 벗으며 안효철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무쌍류와 적멸신공은 특성적인 측면에서 외가와 내가 무공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안효철과 백두기가 일군 명성은 오직 맨손에 의한 것으로 매우 닮아 있었다. 또 백두기의 덩치가 안효철의 거구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크다 보니 세 사람이 붙었을 때보다 씨름판이 가득 찬 느낌마저 들었다.
진정한 거성(巨星)들의 격돌이었다.
“누가 이길 거 같아요?”
“흐음, 실제로 대결을 펼친다면 막상막하겠지만, 내공의 동원 없이 기술로 승부해야 하는 씨름판 위에서라면 안 대협이 근소우위지 않을까.”
“그럼 전 할아버지께 걸겠어요. 어떻게 천무방의 사람이 외부인의 편을 들 수 있어요?”
“하하하! 너한텐 할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근한 분이셔도 나한텐 백 장로님은 어려운 분이셨거든. 그보단 같이 부대끼면서 여행한 안 대협이 내겐 좀 더 편하지. 그래도 방금 한 평가는 냉정하고도 객관적으로 내린 평가라고?”
“그럼 이것도 걸어봐요. 뭘 걸까요?”
천서은의 물음에 진도건이 주위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
마침 가까운 탁자에 포도주 새 병들이 다섯 개나 올려져 있었다.
진도건이 그중 하나를 들어 마개를 따 안을 확인한 후, 씩 웃으며 말했다.
“벌주, 한 병.”
“한 병이나 마시자고요? 잘 취하지도 않는데 되겠어요?”
“그러니까 벌주지. 그리고 우리가 아직 덜 마셔서 그래. 보라고 벌써 취한 사람들이 보이잖아.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칠걸?”
천서은은 술을 많이 마셔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보단 배가 잔뜩 부르겠어요.”
“그것도 벌주의 의미가 있는 거지. 자, 시작한다. 한번 지켜보자고.”
안효철과 백두기의 치열한 씨름 승부가 펼쳐졌다.
절묘한 체중 이동과 보폭의 변화, 기술의 교환이 중간중간 탐색전을 거치면서 절묘하게 펼쳐졌다.
쓰러질 듯 말듯 승부의 추가 좌우로 번갈아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기술을 걸었다.
안효철의 몸이 크게 기울면서 어깨가 땅에 닿으려는 찰나 강력한 각력과 허리힘을 동원한 되치기가 먹히면서 아슬아슬하게 백두기의 어깨가 먼저 눈 치운 바닥을 찍었다.
“내가 이겼어.”
“치!”
천서은은 진도건의 손에서 포도주병을 뺏다시피 당겨오곤 진도건의 눈을 한 번 흘겨보았다. 그저 웃음을 흘리고 마는 진도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서은은 병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절반쯤 마시고 나서.
“후우! ……한꺼번에 마시니까 단맛보다 쓴맛이 더 쎄게 느껴져요.”
천서은이 포도주 향이 가득한 깊은숨을 토해내며 투덜거리자 진도건이 그녀의 포도주병을 잡았다.
“나머진 대신 마셔줄게. 그래도 같이 취하는 쪽이 기분이 더 좋겠지.”
천서은이 피식 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처럼 벌컥벌컥 포도주를 들이키는 진도건의 모습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진도건이 포도주를 남김없이 다 마시곤 빈 병을 머리 위로 거꾸로 들어 털었다.
두어 방울이 떨어져 정수리 부근을 적시자 천서은이 손을 뻗어 쓱쓱 닦아줬다.
“지지, 지지. 취했어요?”
“지지, 지지? 아가들한테나 쓰는 말을 다 쓰고. 서은이도 취한 거 같은데?”
“안 취했거든요~.”
천서은이 콧노래 부르듯 대답하면서 진도건의 팔을 잡아끌었다.
걸으면서 말린 과일을 쥐어 서로의 입속에 넣어주곤 했다.
다른 곳에선 천무경과 금태하, 당혁수가 모여 논검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니 사파제일이자 천하제일, 파천무봉 천무경과 정파 최고수로 각광 받게 된 천수기륭 당혁수 그리고 사파의 절대고수에서 주화입마를 넘어 마도를 일군 흑사왕 금태하의 삼각구도를 보는 건 매우 진귀한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금태하의 기세가 워낙 거침없고 욕지거리도 시원스럽게 박으면서 천무경을 비롯해 점잖은 당혁수의 성질까지 돋우니 사람들은 절대고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가 자칫 경을 치르는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저래도 설마 싸우진 않겠죠?”
“성미에 못 이겨 싸움을 벌일 정도라면 한 문파를 이끌지는 못하겠지.”
진도건의 말에 천서은이 그가 살짝 몸을 숙이도록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진도건의 귀에 대고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가까이 가져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구룡문이 터졌잖아요.”
“거기 시끄럽다!”
천서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태하가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면서 호통을 쳤다.
진도건과 천서은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을 정도였다.
천무경이 벌떡 일어나 금태하에게 따졌다.
“이 작자가 감히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것이야?”
“네놈 딸년이 이몸을 모욕했으니 화를 낸 것이다. 천가야, 네놈도 들었을 텐데 맹주답게 잘못을 시인해야지!”
금태하가 따져 묻자 천무경이 당혁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 가주는 들은 게 있소?”
당혁수가 모르는 체 눈을 감고 수염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취기 때문에 귀가 어두워진 모양인데. 천 낭자가 무슨 얘기라도 했습니까?”
“당 가주께서 못 들으시고 나도 들은 게 없으니, 금 문주께서 주화입마에 들더니 환청에 시달리시나 보오. 당 가주께 진료 좀 보시구려. 천수기륭의 침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니 환청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소?”
“귓밥 정도는 파드릴 수 있소이다.”
“푸하! 이것들이…… 아주 다 엎어버릴까?”
“해볼 테냐?”
“내가 네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반말은 좀 자제하지 그래?”
“내가 창천맹주이니 곧 무림의 최고 어른이거늘. 못할 건 또 뭔가?”
“뭐야?”
쿠쿠쿠쿠쿠!
두 사람이 기력을 드러내자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무인들이 기겁하면서 자리를 달아났다.
“그만 하세요, 아버지!”
“사부님, 그만!”
천서은과 황사열이 각각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전야제가 전쟁터가 됐을지도 모를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