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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18화 (418/432)

418화 - 제79장. 결전의 전야제 (3)

혈마가 갑자기 나타나 영문 모를 반응과 함께 웃음을 흘리며 사라지자 천서은과 빌게포첸이 진도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혈마가 웃었는지 물어도 되겠소?”

빌게포첸으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유타와 성혈교 승려들의 안위가 궁금하고 걱정되는 상황에서 혈마의 웃음은 마치 조롱조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설명을 듣고 싶었다.

진도건도 그 점을 잘 이해했다.

“제가 대라마 아유타를 직접 만나서 대화해본 적도 없으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나시드의 ……일종의 전언자? 같습니다. 나시드의 뜻을 대신해서 세상에 전파하는 그런…….”

“계시 같은 것들도 나시드의 목소리였다는 거로군요.”

“그렇지.”

빌게포첸이 궁금하여 물었다.

“그럼 무엇에 동감하고 또 웃은 것이오?”

“나시드를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아유타가 받아 이야기한 계시는 사실 나시드의 목소리였고 그가 보여준 환상이라면 나시드가 무엇을 통해 그런 풍경을 앞서 내다볼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 나시드란 존재가 신이니…….”

“신이죠. 생각하고 말하고 붙잡혀 갇히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는. 그녀가 아유타를 통해 보여준 계시의 장면이 앞으로 실제 벌어질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까지 예상했을까요?”

빌게포첸이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다. 진 시주는 그녀를 마치 사람을 보듯 바라보는군요.”

“신. 맞겠지요. 영적 영역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신이란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녀를 비롯해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모습, 생각,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람 같지 않습니까?”

“흐음…….”

진도건이 던지는 질문은 빌게포첸과 천서은에게 매우 어렵게 들려왔다.

천마신교와 싸우면서 보아온 기괴한 광경과 상황들에 대해 결국 사람으로서 갖는 평범한 상식선에서 이해하거나 그저 받아들인 채 여기까지 왔다면 마치 이 땅의 신들을 대신해 거악에 맞서 싸우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진도건과 혈마는 계속해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접근하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어내고 있었다.

안효철이 성혈궁 아유타의 불당으로 들어왔다.

“뭘 그리 심각하게 얘기들 하는가?”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천서은이 곧장 질문을 던졌다.

“의심하고 있는 거군요?”

“의도. 결국 그들의 모든 행동엔 저마다 다른 의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거고, 지금도 그런 과정일 수도 있겠지. 그들의 의도가 우리에게 과연 순수한 목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또 자신들의 의도된 그림에 다른 개입을 허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흐음, 아마 어려울 거야.”

“알리 라 다바스와 나시드가 대척점에 있다고 설명했었죠. ……우리가 마귀성으로 향하는 건 상수죠. 아유타가…… 아니, 나시드가 갇혀있다고 해도 굳이 도움을 요청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치를 싸움이 의도한 예정된 그림이라면 자연스럽게 해방될 테니까요.”

“어쩌면 구속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 인간 같이 군다고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녀는 신이니까.”

“그런데 만약 그녀가 정말 구속된 상태고 그것아 알리 라 다바스의 의도로 이뤄진 일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최종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겠군요.”

“나시드도, 알리 라 다바스도 혈마에게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 알리 라 다바스가 그녀의 어떤 의사 선택을 방해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거라면 나시드로선 알리 라 다바스가 그녀의 목적을 어떻게 어그러뜨릴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그린 그림의 방향이 더 굳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었겠지.”

“그게 도건과 접촉한 이유고요?”

“아미타불. ……들어보면 인지상정인 이야기들인데, 진 시주가 신경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의도의 순수성, 정의의 기준, 질서의 목적……. 나시드와 알리 라 다바스, 둘 모두 이 땅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들은 모두 의심하고 판단해봐야 합니다. 그들의 목적이 저희의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한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지,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들을 존중하여 기여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빌게포첸이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라마의 삶이 부디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밑거름이었길 바랍니다, 아미타불.”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효철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도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간부터 들으니 따라가기 참 어려운 건 둘째치고 말이야……. 자네, 마치 노회한… 아니, 득도한 도사, 고승처럼 이야기하는군.”

천서은도 공감한다는 듯 끄덕이자 진도건이 픽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저도 판단이 선 것뿐이고…… 그런 득도한 도사에게 들은 얘기를 비슷하게 읊은 것이니 그렇게 들릴 수밖에요.”

진도건은 태상노군을 떠올리고 동시에 알리 라 다바스 그리고 마라 파피야스와 대면했던 상황을 다시금 되새기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는 무엇을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흘러갔는가.

같은 현장을 두고 두 이세계의 신과 진정한 천마, 제육천의 마왕은 무엇을 바라보고 움직였는가.

진도건과 혈마는 거기에 대한 판단이 9할 가까이 선 상황이었다.

이제 마지막 결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그 결정의 순간에서 확신을 위한 단서만 얻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 * * *

이틀 후, 천무경이 이끄는 무림의 100인 결사대가 오로목제에 당도했다.

때맞춰 쿠초 왕국의 고창성으로부터 결전의 준비가 필요한 무림인들에게 제공할 물자가 도착했다. 도검을 정련할 대장장이와 상당량의 강철들, 사나흘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식량 물자들과 전문숙수들까지.

일월교가 무후라트 국왕과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결과였다.

오로목제에는 결사대 외에도 신강 지역의 마도 잔제를 지우기 위한 전력들 일부가 차례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창천맹의 공무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천마신궁에 대한 실질적 조사에 착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효철은 마니사를 사전 조사하면서 알아낸 것들을 공유해주었는데 그곳엔 두 가지 종류의 서적들이 존재했다.

마라경(魔羅經)과 마공비급들.

오로목제의 부족민들에게 수당을 주고 고용하여 해당 서적들을 입수 및 정리하였고 몇몇 인물들이 사전 분석에 착수했다.

마라경은 천마신교에서 제작한 불경과 같은 것으로 천마를 우상화하는 내용이 그럴듯하게 담겨 있었다. 특히 열반에 들어 부처가 되는 것 또한 천마가 허용해야 가능한 일처럼 묘사하면서 범굉대사를 포함한 사대금강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마공비급들은 그 종류나 수준, 난해함 등의 면에서 천차만별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무학적 깊이를 담은 비급이 있는가 하면 그 이론과 방식이 매우 어설프고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할 수밖에 없어 한계를 예측하는 것도 무의미한 수준의 것도 있었다. 목적성도 매우 다양하여 대강 셈을 해보아도 백여 가지에 가까운 마도를 구상하고 있어 보였으니 구주마종으로 대표되었던 그 숫자가 결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의 구성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성혈궁에 남은 불경들은 서장불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존대상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들의 무공도 포달랍궁과 맥을 같이 했다. 오히려 그들이 가졌던 마성이란 것은 태상교주 단원진이 마정을 통해 강제 주입하여 새로운 특성을 끌어내 보려 했던 것으로 파악되었고 빌게포첸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무영각도 뒤늦게 그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산지에 파묻히듯 지어진 전각이었고 천마신궁의 벽에 가려져서 일반적인 시야에선 볼 수 없었지만, 진도건도 해가 뜬 낮에 돌아다니면서 기감을 열고 돌아다니다가 공기의 흐름이 적체된 공간들을 인지하면서 찾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무영각에선 그 어떤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나면서 모든 자료를 소거한 흔적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료 수집과 조사 등이 끝난 후, 천무경은 회의를 열었고 마지막 마귀성에서의 싸움이 끝나면 천마신궁을 무너뜨리기로 결정을 내린다.

마도절멸의 상징성을 천마신교의 본궁을 무너뜨려 폐허로 남김으로써 서역의 강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사무적 용무가 정리되기까지 약 한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7일째 저녁.

천무경은 연회를 주도하여 열었다.

마귀성의 위치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하루는 달려야 했기에 단어의 의미와는 다소 다르겠지만, 사실상 결전의 전야제와 다름없는 축제가 열렸다.

오로목제는 비단길의 경로에 위치에 있기에 천산 너머에 있는 이국땅의 진귀한 물건뿐만 아니라 식재료나 술 등도 유통되곤 있었다.

전체적인 교역량이 줄은 감은 있어도 그런 문화가 교차하는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왔었다. 중원 사람들의 입맛에 유목민의 마유주가 썩 맞는 건 아니었지만, 토로번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이용해 만든 담금주들은 풍미가 매우 좋아서 인기가 있었다.

낙타나 말고기 등도 비린내가 나는 편이었지만, 솜씨 좋은 숙수들이 붙어 타국의 향신료를 이용해 잡내를 잡고 요리를 해주니 모두 만족감 높은 포식을 즐길 수 있었다.

연회의 일손을 돕는 사내가 회골족 언어로 뭐라고 떠들자 진도건이 그 말뜻이 궁금하여 마침 가까이 있던 엄환에게 물었다.

그는 쿠초 왕국의 물자 운반 담당관의 통역을 맡아 고창성에서 오로목제까지 온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오로목제에 이 정도의 잔치가 벌어진 건 자기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하네요. 부족들 간에 끼리끼리 삼삼오오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밖에 못 봤는데 이건 무후라트 왕가에서 지원한 물자로 벌이는 잔치니까요.”

천서은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창성 살림도 빠듯할 텐데, 제가 거기에 있었으면 말렸을 거예요.”

“백성들 사는 게 빠듯하다고 해도 왕가까지 그러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가 백련교의 차후 세력 확장을 위해 세금을 높이고 물자 비축을 중용해왔던 터라 나라 곳간에 쌓인 게 좀 있었나 봅니다. 이번에 이것들을 지원해주면서 성민들에게도 곳간을 열었습니다. 덕분에 올겨울은 오랜만에 좀 따뜻하게 나겠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효철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위기를 지나고 나면 사람은 각성하는 법이니 자연스레 선정을 베풀게 되는 게야. 하지만, 본래 권력이란 사람을 타락시키기 마련이지. 쿠초 왕국의 국력이 금이나 송, 심지어 서하에 비할 바도 아니라서 왕국이 오래 존속하긴 힘들 것일세.”

엄환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기 얘길 털어놓았다.

“저도 실은 고향으로 돌아갈 고민을 좀 하고 있습니다. 천마신교가 사라지고 나면 이곳에서의 역할도 끝나게 되는 셈이니, 이참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살림을 차려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오문을 떠날 생각인가?”

“아예 그러진 못하겠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도움을 좀 빌려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여기서 사는 건 많이 어렵소?”

진도건이 묻자 엄환이 안효철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려운 건 둘째치고, 재미가 별로 없어요. 심심하게 사는 게 좋다면 괜찮을 지도 모르지만요. 땅덩이는 큰데 사람은 적고, 북쪽은 사막에 돌아보면 만년설에 덮인 천산이 보이는…… 신선놀음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시죠? 저기 천산도 천산이지만, 남쪽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으면 곤륜산맥이 있습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그곳 말이죠. 여긴 그런 땅입니다.”

엄환의 대답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서은이 그걸 옆에서 보고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 건 왜 물었어요?”

“이 싸움이 끝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문득 떠올라서.”

“음…….”

천서은이 따라 고민을 하는데 그걸 본 안효철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허, 그게 고민할 거리가 되는가? 강호와 세상을 구원할 대사건이 지나면 자네도 지금 짊어지고 있는 책임에서 해방되는 것일세. 그 젊고 어린 나이에 엄청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오늘이 몹시 유감이지만, 그것을 벗어던지게 되는 날부터는 자네들의 인생을 즐겨야지. 세상은 넓고 경험해보지 못한 재밌는 일들은 많다네. 젊음을 즐기게나.”

안효철이 얘기하면서 술병을 들었다. 안에는 검붉은 포도주가 절반가량 남아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푹 쉬게. 장대한 각오로 결전을 치르고 창창하게 펼쳐져 있을 미래들을 기대하라고.”

인생 선배로서 건네는 조언이 반갑지만, 진도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안효철이 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툴툴거렸다.

“젊은 놈이 인생 다 산 얼굴하고, 그게 뭔가? 자네 부인될 사람 섭섭해하지 않겠나?”

“전 그런 거 없어요. 어디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걸요.”

천서은이 손사레를 치며 바로 반박했다.

예전엔 진도건에게 기대하던 것들이 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별을 걱정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것도 한때일 수 있다네, 끌끌끌!”

안효철은 그런 그녀에게 한 마디 던지며 웃음과 함께 포도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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