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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17화 (417/432)

417화 - 제79장. 결전의 전야제 (2)

* * * *

빌게포첸은 성혈궁을 한 바퀴 쭈욱 돌았다. 정문 부근에서 보았던 썩기 시작한 시체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심장이 쿵쿵 뛰긴 했으나 안은 비교적 깨끗하여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안에서 특별히 발견한 건 없었다.

다만 최상층의 대라마 아유타의 방에 이르는 순간, 그는 영적 신호를 느꼈다.

금방 끊어져 사라졌지만, 일전에 서하 흥경 부근의 야산에서 진도건과 만나고 혈마와 접촉하였을 때 느꼈던 그 잊지 못할 감각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이었다.

‘잠깐뿐이지만, ……분명히 그때 느꼈던 것과 같다…….’

빌게포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워낙 금방 지나치고 말았으니 그때와 같이 아유타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 따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진도건이라면 이 감각을 좇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성혈궁을 나와 흑궁으로 이동했다.

상부가 무너진 흑궁의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진도건의 도움을 구하는 생각이 가득했기에 개의치 않고 제육천마라대전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

“멍하니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나무라는 천서은과 그녀를 달래는 진도건의 모습이 빌게포첸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시오?”

천서은은 대답하지 않고 진도건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진도건이 멋쩍게 웃으면서 턱을 긁적였다.

“저 신상을 보고 있으니 혈마가 말을 걸어와서 말이오. 잠깐 의식 속에서 말을 주고받느라.”

진도건이 다시 천서은을 보면서 미소지었다.

“정말이야. 혈마가 감상이 많아지더라고. 그래서 얘기 좀 나누고 왔어. 금방 돌아왔잖아.”

“본인이 금방 돌아왔는지도 몰랐으면서. 혈마도 나와서 얘기할 수 있으면서 뭘 그리 뒤에서 구시렁대는 거예요?”

천서은의 타박에 진도건에게서 붉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얼굴 위에 혈마의 얼굴이 덧씌워지듯 나타나선 씩 웃음을 보였다.

“클클! 지아비가 큰일을 하는데 시시콜콜 다 알려고 하지 말라고.”

“제가 어디 밥이나 차려주고 집이나 지키는 평범한 여자로 보여요?”

“아아, 물론 그러시겠지. 그래도 모르는 게 약이니 그러려니 지나가. 그 정도 눈치는 있잖아?”

“당신 정말 마음에 안 드네요.”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때까진 참으라고. 하하하!”

혈마가 웃음과 함께 다시 진도건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빌게포첸으로선 처음 보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과거 무의식의 영역에서 진도건의 모습을 한 혈마와 대면한 적이 있었으니 소스라치게 놀랄 일까진 아니었다. 다만 현세에 어떤 기작을 기반에 두지 않고 자기 모습을 현현한 게 놀라울 뿐이었다.

진도건이 다시 천서은을 달랬다.

“혈마가 놀리려고 과장되게 얘기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저 단지운이나 단원진에게도 뒤에 천신같은 존재가 있지 않나 가능성을 얘기한 정도거든.”

“언젠가 한 번 혈마의 머리통을 쥐어박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천서은의 말에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편 빌게포첸은 진도건의 말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았다.

“그럼 단 교주나 태상교주에게…… 마라 파피야스가 붙어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까?”

빌게포첸의 물음에 천서은도 아차 싶었는지 조금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불가사의한 일을 이미 목도한 바가 있었기에 그 말이 헛소리로 치부될 수 없었다.

부처의 수행을 방해하는 존재로 보통 묘사되는 마라 파피야스였지만, 색계육도의 구조하에 마라 파피야스는 엄연히 천상의 최상층 하늘을 지배하는 마왕이기 때문이었다. 그 같은 존재가 인간에게 힘을 빌려준다면 그 영향력이나 파괴력은 그간 보고 들었던 구마진이나 광혈신마 혁무술 등의 경우와는 완전히 수준이 다른 얘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겠지요.”

진도건이 미소를 지으며 빌게포첸의 물음에 대답했다.

빌게포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도건이 심각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너무 편하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은 누구보다 가장 그런 세상과 깊이 접촉한 사람이었다.

‘이유가 있겠지.’

빌게포첸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가 서둘러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성혈궁으로 같이 가지요. 빈승이 뭔가를 감지했지만, 너무 짧아서…… 진 시주라면 좀 더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러지요.”

진도건이 천서은의 허리를 손으로 감으며 말했다.

“가자.”

“그래요, 지아비의 명이시니.”

“지아비라. 좋은데?”

“피-.”

천서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도건이 웃으면서 빌게포첸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천서은은 그래도 내심 안심했다.

‘다 말해준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심각해 보이진 않으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그때처럼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습은 없으니까.’

천서은이 떠올리던 건 사천 하가장을 떠나기 직전에 보였던 진도건의 모습이었다.

혼자 책임지고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모습.

그래서 천무경이 천서은을 호출했을 때, 순순히 받아들이던 그때의 모습들은 그녀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염려해서일까.

빌게포첸을 따라가던 중에 천서은이 전음을 보냈다.

[안 물을게요. 혼자 사라지지 마요.]

진도건이 천서은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면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날 믿어.]

세 사람은 성혈궁 앞 불쾌한 현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천서은이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천마신궁이나 흑궁도 그렇지만, 성혈궁은 더 전형적인 불교사원 같은 느낌이네요.”

“아미타불, 마도 위에 서긴 했어도 본질을 바꾼 적은 없습니다.”

“계시 때문이라고 했지요?”

옥문관에서부터 빌게포첸과 동행하게 되면서 천서은도 천마신교와 성혈교에 대한 빌게포첸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라마이자 천마신교의 성녀로서 지금까지 백여 년간 살아온 아유타가 내뱉은 ‘검은 태양’을 상징하는 계시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종말로부터 구원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와 같았고 천마조사 단용후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얘기했었지요. 대라마께선 확실히 그때의 단용후는 매우 신비로운 사람이었다고 얘기했었습니다.”

“지난번 고창성의 일이 정리되었을 때, 위소규 스님이 천문에도 지식이 있으셔서 일식의 날짜를 물은 적이 있는데 완전한 일식이 일어나기엔 멀었다고 하더라고요. 옥문관 전투 때의 경험과 도건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검은 태양은 완전히 다른 상징처럼 느껴져요.”

“그런 인상이 강했으니까 대라마께서도 천마조사를 따른 것이겠지요. 지금은 그 계시의 주인공이 다른 자라고 여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입니다.”

“그게 누굴까요?”

천서은이 물음에 빌게포첸이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진도건에게 닿아있었다.

“정황상으론 혈마까지 품을 정도로 사연이 깊은 진 시주처럼 여겨지나…….”

천서은의 시선도 진도건에게 닿았다.

진도건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빌게포첸이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며 말을 보충해 마쳤다.

“계시 속 인물은 백발이라고 했으니 빈승은 그게 주백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흐음, 과연 합당한 추정이네요.”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1층의 회랑을 지나선 2층부턴 제를 올리는 불전, 장경각과 같은 경전 공부를 할 수 있는 곳, 개별 방이 있는 곳 등을 보았다.

“일월신마는요? 중요한 역할이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그도 백발을 가졌긴 했지만, 수염이 없어서…….”

빌게포첸이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진도건과 천서은 쪽으로 몸을 돌리진 않아서 두 사람의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빌게포첸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라마께선 계시 속 인물의 뒷모습만 보아서 수염을 묘사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냉소평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군요.”

빌게포첸이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서은이 그 얘기를 듣고는 진도건을 흘끔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아무리 목적을 공유하여 협력하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당했던 걸 떠올리면…… 일월신마가 종말을 구하는 영웅이라니. 그럴 리 없다고 믿어요. 으으!”

천서은이 마지막엔 두 팔을 감싼 채 어깨를 짐짓 떨어 보이자 진도건이 피식 웃었다.

‘계시의 주인공이라…….’

진도건은 알고 있었다.

사천에서 한중으로 향하던 길에 한 차례 꿈을 꾸었기도 했고, 영역의 경계에서 알리 라 다바스가 만든 영역의 관문 등을 지나면서 도리천에 이르고 다시 마라 파피야스가 만든 공간에서 알리 라 다바스까지 기어코 대면했다.

계시 속 인물은 진도건 바로 자신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주인공이라고 말은 어울리지 않아. 그저 모든 것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앞으로 남은 며칠.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흘러온 시간들.

그 속을 걸어온 인간들이 모이고 조건들이 갖춰짐으로써 떠오르게 될, 그도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검은 태양’의 현상.

계시 속 인물인 자신도 그 상황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방심하지 말고 모든 걸 걸어라. 널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의 모습이 허접하다면 나로선 화가 치밀어 오를 테니까.”

진도건이 혈마의 속삭임에 속으로 대답했다.

‘물론이다.’

속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혈마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변화가 일으키는 파장 자체는 정확하게 동감할 수 있었으니.

“여깁니다.”

빌게포첸이 앞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전히 넓긴 하지만, 지나온 곳들에 비해선 조금 좁아진 듯한 불당.

조금 어지럽혀져서 정돈된 모습은 사라졌으나 관세음보살좌상은 멀쩡히 불당의 중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작아진 것 같은데요?”

천서은의 물음을 빌게포첸이 알아듣고 건너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동안엔 별도의 방을 구축한 시설이 아닌 이상 찾을 수 없었던 문이 좁아지도록 다가온 벽에 붙어있었다.

“저 너머는 하늘이 트인 아래층의 옥상 마루가 있습니다. 대라마께선 그곳에서 햇볕을 쬐며 명상하곤 하셨습니다. 제가 뭔갈 느낀 곳은 여기, 관세음보살좌상 앞입니다.”

빌게포첸의 말을 들은 진도건은 관세음보살좌상 앞의 방석 위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시각적으로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돌려 관세음보살좌상을 찬찬히 살폈다. 먼지가 조금 쌓여서 금빛 광채가 죽어 있었지만, 그 형상은 손상된 곳 없이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만약 이곳이 이대로 폐허로 남게 되어 다른 불교사원에서 온 승려가 본다면 귀중히 다루어 수거해갈 듯했고, 상인이 발견한다면 돈 있는 사찰이나 사원에 팔아넘길 수 있는 수준처럼 보였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만.”

“기감 같은 건 아니었소이다. 영적인 자극이…….”

빌게포첸이 말을 잇다 말고 다물었다.

진도건이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

머릿속으로 울려오는 목소리에 진도건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시드.”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천서은과 빌게포첸이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진도건이 다른 이들에게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면 그것은 나시드와 알리 라 다바스에 관한 이야기들.

그저 두 사람이 아는 거라곤 진도건이 그 이름을 거론할 땐 신중하고 조심스러워한다는 점뿐이었다.

당연히 진도건에게 두 존재는 그들이 가진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이 어려운 존재들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조금 전 마라 파피야스와 알리 라 다바스를 대면하고 나온 상황에서 나시드가 접촉해온 것이었다.

진도건은 나시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기에 육성 대신 생각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목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소.’

“아유타가 이 자리에 머무름으로써 저의 영적 흔적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아유타? 당신이 아유타를 후견해온 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알리 라 다바스가 마라 파피야스와 한통속이 되어 절 마귀성에 가두었어요. 그들의 숙주를 물리쳐 구해주세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당신에게 올………….”

나시드의 목소리는 그것이 끝이었다.

진도건이 정신을 집중하면서 더 기다려보았지만, 더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진도건이 중얼거리면서 눈을 뜨자 빌게포첸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뭐였습니까? 혹시 대라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요?”

진도건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듯하다 이내 끄덕거렸다.

“그런 것 같군요. 역시 마귀성에 갇혀있다고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아아! 이런…… 역시 대라마께선……. 그래도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빌게포첸이 안타까움과 안도하는 기색을 함께 드러냈다.

하지만, 천서은은 진도건의 표정에 큰 동요가 없음을 궁금히 여겨 물었다.

“왜 그래요?”

진도건이 입을 열었으나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난 맞는 것 같은데.”

“예?”

천서은이 대답이 이상하여 반문하는데 다시 진도건에게서 붉은 기운이 일어나 혈마의 모습이 맺혔다.

그의 귀곡성이 성혈교 불당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래, 나도 동감이다. 큭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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