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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16화 (416/432)

416화 - 제79장. 결전의 전야제 (1)

진도건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파오를 걸어 나왔다.

적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오로목제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마기가 잠재된 누군가 느껴지긴 해도 무시해도 좋을 만큼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편안하게 쉬어도 될 상황이었지만, 진도건은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잠들기 어려운 곳이죠?”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서은도 잠에 깊이 들지 않고 있다가 진도건의 인기척을 느끼고 따라 나온 것이다.

“그러네. 충분히 쉴 만한 조건인데도 편치는 않아.”

“저도 그래요.”

천서은이 진도건의 왼팔을 끌어안으며 몸을 기댔다. 겨울 공기가 몹시 찼지만, 서로의 체온이 마치 화톳불을 쐬는 듯 온기를 전달했다.

“가볼까?”

진도건의 물음에 천서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향하고 있음을 보고 따라 시선을 돌리니 서남쪽으로 어스름한 어둠 속에 산봉우리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산속에 각진 구조물의 그림자도 얼핏 보이는 듯했다.

“그럴까요?”

천서은도 호기심이 동했다.

진도건이 보고 있던 곳은 바로 오로목제 서남쪽 천산산맥을 등지고 있는 요마산, 천마신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가자.”

두 사람은 곧장 경공을 펼쳤다.

정강이 정도는 충분히 덮을 정도로 눈이 쌓였는데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면서 이따금 남기는 발자국은 딱 발 정도 들어갈 정도로 얕았다. 그마저도 진도건이 선풍과 염력으로 둘의 몸을 가볍게 띄우자 발자국이 아예 남지 않게 되었다.

수백 명의 부족민들이 잠든 오로목제를 가로질러 요마산 초입에 당도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천마신궁의 눈처럼 하얀 성벽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성문은 열려 있었고 사람의 발자국이라 할 만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아 사람이 발길이 끊어진 지 제법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감을 펼쳐 내부를 먼저 들여다보았지만, 역시나 두 사람의 기감에선 감지되는 기척은 없었다. 그런데도 안으로 들어서는 둘의 태세는 비교적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어쨌든 천마신교의 본궁이라는 상징성 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산 아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더 들어가길 멈추고 그 기척이 접근하는 걸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효철과 빌게포첸이 두 사람을 좇아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효철이 머쓱한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괜히 따라온 건 아니겠지? 여기가 좋은 시간을 보낼만한 곳은 아니니까 말이야.”

진도건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빌게포첸도 한마디 거들었다.

“빈승도 오늘 밤을 기다리기 어려웠소이다.”

“들어가시죠.”

천서은의 말에 따라 네 사람은 함께 천마신궁 안을 걷기 시작했다.

사거리 갈림길에 이르자 빌게포첸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왼쪽은 마니사, 오른쪽은 성혈궁 그리고 저 관문을 넘어 들어가면 저기 보이는 것처럼 성벽이 검게 탄 궁궐, 단 교주가 머물렀던 흑궁이 있다네.”

달빛 아래서도 검게 그을린 성벽이 관문 너머로 눈에 쉽게 들어왔다.

“미적 감각이 안 느껴지는 색깔이에요. 숯칠한 듯한 성벽이라니……. 삭막하다랄까요?”

천서은의 평가는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반대로 마궁(魔宮)이라고 생각하면 썩 어울리기도 했다. 천마신궁의 하얀 외벽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아름답고 조화롭다는 감상과 대비됨으로써 그 존재가 더 부각되는 것이었다.

“따로 움직이세. 각자 보고 싶은 게 다를 테니. 적들은 없고 밤은 깊으니 너무 꼼꼼하게 보려는 건 미련한 일이고 말이야.”

“빈승은 성혈궁을 가보겠습니다.”

빌게포첸의 당연한 얘기를 들은 천서은이 진도건을 보며 물었다.

“어딜 먼저 볼 거예요?”

“흑궁.”

“그럼 난 마니사를 둘러보지.”

네 사람이 세 갈래로 찢어져 이동했다.

빌게포첸은 대라마 아유타와 성혈교 동료 승려들의 안위가 걱정되었으므로 우선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면 안효철은 검림과 강정학을 구출했을 때 마주쳤던 스칸다와 마니사 마구니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천마신교가 어떤 식으로 마교도들을 관리하고 육성하는지 알아둔다면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진도건은 당연히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 단지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제 아버지와 반목하는 듯한 정황이 보이는 작금의 상황을 선뜻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빌게포첸이나 냉소평에게 듣기로 흑궁은 천마신교의 여러 일들을 주관하는 회의가 소집되는 제육천마라대전과 단지운의 거처가 있다고 하였다.

단지운이 남긴 어떤 작은 기록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좀 더 면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진도건은 그런 기대를 접었다.

“무너져 있네요.”

“이런.”

흑궁의 상부는 완전히 주저앉듯이 무너져 있었다. 뭔가 거대한 폭약이 안에서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정상적인 형태는 하단만 남은 채 여기저기 흑궁 상부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단지운이 사라졌을 때, 그때 엄청난 기의 폭발이 있었잖아요? 그것과 함께 여기로 떨어진 게 아닐까요?”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듯해.”

흑궁의 철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기에 두 사람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진정 감탄을 놓았다.

“우와…….”

“압도적이군.”

제육천마라대전에 대한 총평이었다.

무너진 천장,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과 별빛.

그렇게 어둠을 어스름 밝힌 끝에 드러나는 것은 용상처럼 거대한 파순대좌와 그 뒤를 지키고 있는 어떠한 신상(神像).

벽이나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얼핏 보이는 어떠한 그림들.

기둥에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는 횃대에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불을 밝히자 드러나는 벽화들.

천서은이 파순대좌로 달려가 그 형상을 자리를 옮겨가면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불교신장같은 모습이지만, 뿔에…… 비늘달린 피부, 이건 불꽃을 형상화한 거로군요. ……뒤에서 보니까 불길이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이거 꼭 사천에서 환도마종을 상대할 때 찾았던 그 조각상을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응.”

진도건이 천서은의 감상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기에 익숙할 뿐이지, 기라는 것이나 마교의 환술이나 사실상 초자연적인 현상. 하지만, 기는 좀 더 범 자연적인 포괄적인 인자라면 환술은 뭔가 강한 매개체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그 조각상을 봐도 그렇고, 저 신상의 모습도 그렇고…….’

“검에 저건 뭘까요? 뱀? 용? ……흐음, 아무튼 무척 난해한 형상이긴 한데. ……이렇게 멀리서 떨어져서 보면 확실히 압도하는 느낌이 강해요. ……그때 조각상도 그렇지만, 저 신상도 폭발에서 무사한 걸 보면…… 뭔가 있어요. 저기서 느껴지는 건 없나요?”

“응, 딱히.”

“흠.”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벽화를 따라 걸으면서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불교 벽화 같긴 한데, 이건…… 오직 마라 파피야스에 대한 내용만 담은 것 같아요. 제육천의 풍경을 묘사한 듯한…….”

진도건의 귀엔 천서은의 감상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파순대좌의 신상에 머물러 있었다.

별빛에 비친 그의 붉은 눈동자엔 어느새 초점이 사라졌었다.

* * * *

“여긴……!”

진도건은 입을 다물었다.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밤의 어둠 속에 가라앉은 제육천마라대전과 달빛과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무너진 천장, 여섯 개의 기둥과 그 잔해들, 불타는 횃대, 제육천을 묘사한 벽화 그리고 천서은의 모습까지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두 발이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아닌 새하얀 구름.

구름이 펼쳐진 바닥에서 똑같은 위치에 파순대좌와 신상이 그와 함께 남아있는 유일한 것.

사방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들은 마치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흐르고 있으니 마치 도리천 상공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느낌이다.

“진도건.”

혈마의 부름.

진도건이 그 소리를 좇아 뒤를 돌아보자 그의 모습을 붉게 물든 모습으로 구체화하여 나타난 혈마가 그에게 등지고 서 있었다.

“혈마.”

“무의식의 공간이다. 봐라. 아무래도 저놈이 내가 찾던 놈인 것 같구나.”

혈마의 이야기에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색깔은 적갈색 정도로 진도건의 것보다 어두워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두 넘겼다. 피부는 희고 입술은 붉었으며 눈자위가 깊고 콧대가 높았다. 눈동자는 금색처럼 보였는데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진도건은 그의 눈동자가 두 개의 고리가 안의 동공을 감싸고 있는 듯한 형상임을 깨달았다. 눈길에 확 박히듯 그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옷차림도 한족이나 몽골, 신강 어느 지역의 것과 닮지 않았다. 대체로 짙은 적의(赤衣)에 좀 더 각져 있는 옷의 형식, 금색 실로 수 놓인 기이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고 하의는 정강이 부근에서 정리되어 신발의 목이 그만큼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도건이 놀랄 수밖에 없는 건 존재 자체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였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화원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로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편안한 감상을 주면서도 무미건조한 느낌마저 가져다주는,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잠재된 혼돈의 불쾌감.

“반갑습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손을 허리춤으로 살포시 가리듯 가져가서는 허리를 숙인다.

“제 이름은 알리 라 다바스. 그날이 오기 전, 당신들을 한 번쯤 만나고 싶었습니다. 무척 반갑습니다.”

“하하하하!”

혈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리 라 다바스의 미소도 짙어졌다.

진도건도 알 수 있었다.

둘이 무척이나 닮았음을.

분명히 둘은 다른 존재였다.

그러나 알리 라 다바스가 자신과 닮으면서도 또한 완전히 다른 존재를 만들고자 했음을 확실하게 느꼈다.

어안이 벙벙해지는데,

“여긴 네 무의식의 공간이냐?”

혈마의 물음에 알리 라 다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혈마와 진도건을 가리켰다.

“이참에 인사하시지요. 여러분을 만날 수 있도록 힘써주신 분입니다.”

진도건과 혈마는 알리 라 다바스의 손짓이 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둘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고 진도건의 눈빛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파순대좌.

신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염소의 뿔, 비늘 덮인 팔, 천축의 승려와 같은 옷차림이었으나 마하발리와 비슷한 인상에 더 아름답고 유려한 용모를 가진 미남자인지, 미녀인지 모를 인물이 옆으로 드러누운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있는 흑사가 똬리를 틀 듯 휘감고 있는 검은 파순대좌 옆에 기대어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뒤에서 알리 라 다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개드리겠습니다. 열반의 마지막 시험자이며 육도 색계의 지배자이자 타화자재천의 마왕. 여러분의 언어로 천마라고 부르는, 제육천마왕 마라 파피야스이십니다.”

마라 파피야스가 한 손을 들어 흔들며 싱긋 미소지었다.

“안녕, 얘들아. 반가워.”

진도건의 입이 떡 벌어지고 혈마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허…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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