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15화 (415/432)

415화 - 제78장. 일망타진(一網打盡) (5)

* * * *

“닥쳐!”

쿵!

양자성이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세우면서 주먹으로 침상 옆 벽을 때렸다.

토벽으로 이뤄진 방이 울릴 정도였지만, 주먹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옷자락이라곤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낸 피부는 얼굴의 일부밖에 없었다. 발바닥으로부터 시작해서 머리까지 일부 탈혼갑이 감싸면서 그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체는 거울이나 깨끗한 물이 고여있는 자리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릴 적부터 키워진 사부와 사문에 등을 돌리고 천마신교에 입교한 것도,

주백자를 공격하며 단원진의 제자가 되길 완전히 결심한 것도,

경각심을 일으킬 지표들을 무시하고 마령검에 이어 탈혼갑까지 취한 것도.

“혼란스러워하는군요.”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양자성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토방 한쪽 벽면은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이뤄진 철창이 전면에 걸쳐 있었고 그 너머엔 작은 방이 하나 있어서 양자성의 자리에선 감옥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감옥 벽면엔 성혈교의 대라마, 천마신교의 성녀 아유타가 두 손을 족쇄에 결박당한 채 벽에 묶여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토방과 감옥 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이곳은 단원진이 부린 술법으로 세워진 마귀성의 일부로서 성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이 흙은 요상하게도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발광하는 것은 아님에도 성 자체가 뿜어내는 마기와 요기(妖氣)에 몸과 영혼이 적응을 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구석구석을 볼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가만히 스스로 처한 상황에서의 기분을 돌이켜보고 있으면 마치 이곳에 들어와 지내는 자들을 향하여 ‘너도 나와 한 몸이야.’라고 얘기하는 듯했다.

물끄러미 아유타를 쏘아보던 양자성이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침상에서 몸을 벽쪽으로 아예 돌린 채 옆으로 누웠다.

“신경 꺼.”

짧은 한 마디.

양자성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몹시 차가웠다.

아유타에게 나름의 정을 담아 대하던 태도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안쓰럽네요. 하지만, 어쩌겠나요. 경고를 무시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인 것을. 다만 슬픈 건 그 오만한 선택의 대가조차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닥치라고!”

양자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에 일어난 푸른 불꽃 같은 안광이 어둠을 밝혔다. 어둠이 가져오는 서늘함을 더 얼어붙게 만드는 눈빛이건만, 아유타의 평온한 얼굴 속에 감춰진 조소를 지우기엔 아무런 두려움을 줄 수 없는 듯 보였다.

“그 분노만큼은 확실히 당신의 것이로군요. 당신 안의 그것은 저를 비웃으려 할 테니까요.”

“큭큭큭! ……씨팔. 네년도 오만한 선택으로 인해 그 꼬락서니가 되어놓고서 누가 누굴 비웃는단 말이냐? 나는 이미 내 정신력으로 이놈을 물리쳤고 이렇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야. 그 이상한 족쇄에 붙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년 신세나 한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양자성이 목소리를 으르렁거리며 아유타에 대한 비난과 조소를 쏟아내었다.

아유타가 그를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은 어조.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속박당한 여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여유가 그녀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에 모두 녹아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곤 하나 코앞의 지엽적인 결과일 뿐. 큰 흐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날 대적하려는 자도, 날 여기에 가둔 자도, 오만에 굴복한 당신도, 진정 역천의 꿈을 꾸는 자도 막을 수 없지요.”

아유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혼돈이 오고 있습니다.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오만에 휩싸인 모든 마악(魔惡)은 종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무의(無意)의 강에서 허우적거리다 무의의 꿈 앞에 허무하게 죽게 될 것입니다.”

까득!

어금니가 부딪치고 긁히면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낸다.

척척척!

양자성이 성큼성큼 다가가 두 손으로 철장을 붙잡았다.

쓰라린 고통이 손바닥을 엄습하고 불결한 파장이 두 팔을 휘감았지만, 탈혼갑은 그것을 적당히 차단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완력에 의해 철창이 입을 벌리자 양자성이 그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위협적인 모습이건만 아유타의 은은한 비웃음 어린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감옥 안으로 들어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양자성을 향해 아유타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 몸을 안고 싶나요? 이 늙은 여자의 몸을 안고 싶어요? 안아주세요. 당장 그 갑옷을 벗고 당신의 뜨거운 몸으로 절 안아줘요.”

한순간 고혹적인 눈빛과 표정으로 유혹해오는 듯한 아유타의 말에 양자성이 괴성을 내지르며 그녀를 덮쳤다.

“크아아악!”

철컹철컹!

찌익찌익찌익!

두 팔을 채운 사슬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그 사이로 옷이 찢기는 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흑옥 같은 피부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건장한 사내의 하반신이 줄 압력을 온전히 받아낼 크고 깊은 골짜기.

흔들리는 유방과 가느다란 어깨를 부여잡고 사타구니를 밀어붙이는 양자성의 두 눈이 푸른 불길에 더 깊이 덮여가고 있었다.

“끅끅끅!”

신음과 같은 조소가 아유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양자성의 눈빛이 불꽃을 뚫고 빛났다.

“헉!”

꽈당!

양자성이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지 허우적대면서 물러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고간도 찌르는 듯한 통증에 휩싸였다. 그 유연한 탈혼갑조차 그곳만큼은 큰 변형을 허용치 않고 안에서 밀어내는 압력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유타가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음에서 태어나 죽음만을 부르며 파멸을 찾아 싸우는 기사. 그 사명의 껍데기 신세를 악착같이 거부하며 자기를 지키려는 인간의 하찮은 욕망을 조롱하고 있군요.”

양자성이 거칠게 차오르는 숨을 조용히 몰아쉬면서 말했다.

“후우, ……닥치라고.”

양자성은 갑자기 치솟은 흥분을 다스리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나 아유타는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전 이렇게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는데. 이대로 버려두실 건가요?”

도발을 하면서 양자성의 앞에서 두 다리를 벌렸다.

양자성은 시선을 내리지 않고 아유타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선 다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우악스럽게 아유타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탈혼갑은 그의 욕망을 다시 자극하니 왼손은 어느새 젖가슴을 쥐어짜듯 붙잡고 있었다.

“그가 알아버렸네요. 당신이 이 몸을 좋아한다는 걸.”

양자성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욕정의 끝은 내 물건으로 마칠 수밖에 없으니. 그래, 내 욕정을 자극하는 이 개새끼와는 별개로 꽤 비참한 기분이야. 그런데 네년은? 네년 신세는 나와 뭐가 다르지? 제멋대로 움직이던 껍데기에 갇혀서 말이야. 이 육신을 괴롭히면 네년은? 과연 그 껍데기 안에서 어떤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한데 말이야.”

“오, 그거 괜찮은 발상이로군요. 날 붙잡은 자가 즐길 만한 작은 사건이겠어요.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전 당신이 사랑에 빠진 여자보다 그리 숭고하지 않아서 말이지요. 이미 충분히 적응되어 있으니 기쁘게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아유타가 그렇게 말하곤 교성과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녀를 육체를 움켜쥔 앙자성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천마신교의 성녀, 아유타.

성혈교의 대라마, 아유타.

그 알 수 없는 순결함과 성스러움에 미혹되어 홀연히 마음을 빼앗아 간 검은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은 여전히 적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소름 돋는다.

내가 아는 아유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다시 그녀의 미소와 자애로운 조언을 들을 수 있긴 한 것일까?

나에게 그녀를 구원할 능력이나 있을까?

“당장 그 몸에서 꺼져, 이 씨팔년아!”

“아하하하하!”

버럭 소리를 지르는 양자성을 향하여 아유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양자성이 분노에 휩싸여 이를 꽉 물고 두 눈이 푸른 불꽃에 재차 물들어가는 순간.

[양자성, 그만하고 내게로 오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눈을 덮어가던 불꽃이 사라지고 어느새 아유타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깔깔거리며 비웃음을 던지는 아유타의 웃음소리가 아득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귓가로 맴돌았다.

아주 잠깐 거부의 의지가 불씨처럼 피어올랐지만, 곧장 마음속을 가득 메워놓은 잿더미 속에서 빛을 꺼트렸다.

생각의 파편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중심을 가로지르는 상념의 물결은 부름에 순응하여 그의 몸을 이끌었다.

감옥에서 나와, 토벽 건물에서 나와, 뚜벅뚜벅 길을 걷다 한 지점에서 멈춰 서니 새로운 파순대좌의 등받이 뒤에서 뒷짐을 진 채 뒤돌아 서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귀성에 손님이 찾아왔군. 네가 상대해주어라.”

파순대좌 근처를 지켜야 했을 야마와 스칸다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둔 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막 광장에 진입하여 도포 자락을 펄럭이는 노도사를 순순히 길을 열어 들여보낸 것이었다.

“네가 너로 살기 위해선 그것에 좀 더 적응할 필요가 있고. 나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니. 적절한 상대가 되어줄 듯하구나.”

“복명.”

자연스럽게 대답이 흘러나오고 몸은 뒤돌아서게 된다.

의식은 분명 살아있으나 거부할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노도사의 외침이 귀에 들려왔다.

“나, 무당파의 태극검선 소요자. 오늘 천마를 베어 파사현정의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리라.”

소요자의 전신이 은은한 빛에 휘감겼다.

검강 따위로 치부될 수 없는 고고하고 맑은 기운에 발 디딘 광장의 땅도, 주변의 토벽 건물들도 위태롭게 떨리면서 미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태극혜검 태청검.

무당파 선도검학(仙道劍學) 최강의 무공을 곧바로 드러내는 소요자와 그를 바라보는 양자성.

그의 손에 마령검이 돋아나 쥐어지고 푸른 불길과 진녹빛 사멸의 기운이 둘러쳐지며 지면을 타고 소요자를 향해 뻗어나갔다.

챠앙!

죽음의 마기와 태극의 광휘가 부딪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퍼지는 순간,

투퉁!

땅을 밀어내는 두 사람의 신형도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 * * *

“대협께선 운이 좋군요. 갓 잡아서 매우 신선하거든요. 이미 한 번 태운 것들이라 숯 상태도 괜찮고요.”

비시(費視)가 빨갛게 익은 숯을 화로에 놓으면서 말했다.

네 사람은 그의 파오 안으로 들어가 숯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비시가 운영하는 푸주와 그가 사는 파오는 오로목제의 동쪽 가장자리쯤에 위치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에 괜찮은 곳이었다.

비시가 가져온 고기는 낙타의 갈빗대와 허벅지 다리 살이었다.

동장군의 추위에 노출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고기도 덜 얼어붙었고 붉은 핏기는 선명하여 선도가 아주 좋았다.

치이익…….

숯가루들을 털어낸 숯 위에 고기를 통째로 올려놓자 기름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새어 나왔다.

후각을 자극하는 낙타고기의 냄새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바로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정말 결전의 날이 가까워져 오는군요.”

“후, 떨리네요. 중원과 서역, 강호무림의 운명이 다가올 일전에 달려있다니. 우리도 봄은 고향에서 보낼 수 있겠지요?”

엄환이 막대기로 숯 위에서 미끄러지려는 고기를 중앙으로 밀어 넣으며 하는 말에 이표가 설레는 표정으로 진도건 등을 보며 물었다.

“고생 많으셨겠군요.”

이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나 엄형은 꽤 옛날부터 장성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녔습니다. 아시다시피 개방은중원에 활동할 공간이 없었고 저희야 이곳저곳 다 기웃거리니까. 일찍 단짝이 됐습죠. 그래서 이곳에도 지역유목민들과 안면을 튼 지 오래됐지만, 마교의 발호 이후로 뒤늦게 넘어온 사람들은 의심받아 대부분 죽었습니다.”

“이미 적응이 끝난 저희나 비시 정도나 살아남은 것이지 한 달 새 넘어온 신참내기들을 제외하면 모두 시체로 발견되는 등 다 죽었으니 좀 살벌했어야지요.”

이표와 엄환의 말을 듣던 천서은도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됐습니다, 위로는 무슨. 무공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무림에 몸담은 이상, 다 그렇게 칼밥 먹고 살다 가는 게지요.”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한동안 오로목제가 조용한 건 그나마 다행인 거 같군. 황검당과 성혈교가 들어간 이후로도 마귀성에서 누군가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저들끼리 뭔가 준비하는 모양이고. 천 맹주와 다른 고수들이 당도하면 며칠 정비한 후에 결전을 치르러 떠날 테니 다들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두는 게 좋겠네.”

“……혹시 선발대는 없습니까?”

한쪽에서 고기를 굽기 좋은 크기로 손질하던 비시가 잠깐 행동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굳이 선발대를 따지면 우리가 그런데.”

비시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해지기 전에 마귀성 있는 북쪽으로 누군가 날아가는 걸 보았었지요.”

“음?”

“머리 하얗게 센 노인이었는데 옷도 희멀건한 거 입고. 근데 아주 땅에 발도 잘 안 딛고 날아가는 걸 보니 엄청난 고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져서요.”

비시의 말에 숯불의 불똥들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진도건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천서은이 묻자 진도건이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 말했다.

“……소요자… 같군.”

“아…….”

옥문관 전장에서 청명의 시신을 안고 돌아간 소요자는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필 비시가 이야기하는 인상착의가 먼발치서 보아 뭉뚱그려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로 조건에 딱 부합하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소요자. ……아니면 주백자, 그분께서도 엄연히 살아계신 분이니까. 아니, 주백자는 아니다. 결전이 코앞인데 혼자서 뭘 할 분이 아니니. ……소요자가 맞아. 이런…… 대체 혼자서 무얼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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