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14화 (414/432)

414화 - 제78장. 일망타진(一網打盡) (4)

“이야.”

앙검수라 곽비가 나직이 감탄했다.

“저자로군요.”

냉소평의 좌측에 삼대수라가 차례로 서 있었다면 우측엔 일월교도 정통 법의를 입은 노인이 있었다.

광명법사(光明法師) 비로파.

냉소평에겐 동년배의 지음과 같은 존재이며 삼대수라에겐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고 교주를 대신하여 모든 교도들을 통솔할 수 있는 신망을 가진 자였다.

물론 그 권위의 방향은 오직 교주를 따르는 목적하에 작동되는 것이지만, 냉소평이 기존 천마신교의 구주마종에서 독자노선으로 변경하여 천마신교를 적대하는 결정을 모두가 한목소리로 따르게 만들도록 한 것은 광명법사 비로파가 그동안 얼마나 교단을 잘 관리해왔는지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냉소평이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던진 채 비로파에게 물었다.

“어때? 느껴지는 게 있나?”

비로파의 눈빛에 깊은 현기가 맴돌았다.

“제가 궁금했던 검은 태양의 발현에 대해선 저자에게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만, ……어렵게 얽힌 두 개의 영혼이 갈라서는 순간부터 혼돈에 가득 찬 세상이 마땅한 정렬을 이루겠습니다. 특히 저자의 안에서 느껴지는 혈마성의 영혼은 이미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완성?”

“천마신교도, 우리도 제법 긴 시간 다루고 고찰했던 마성이란 것은 탐구하기엔 너무나 난해한 속성을 가졌습니다. 엄청난 영감과 차오르는 기운으로 많은 이들에게 ‘길(道)’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그 ‘길’은 어느 순간에 사라져서 우리를 공허에 버려두었지요. 더는 발전할 수도, 돌이갈 수도 없는 곳에.

하지만, 선명한 영혼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이란 무릇 그러하듯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법이 없으며 빛나는 영혼들은 스스로 ‘길’을 개척합니다. 영격을 제대로 갖춘 마성도 그런 운명을 따라가겠지요.

보입니다. 저 진도건이란 청년이 혈마라는 영혼을 떠나보내는 순간이,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혼돈을 잠재우는 길이 될 것이요. 혈마라는 영혼이 자기 존재의 길잡이가 되어준 인간의 육신에서 떠나가는 순간, 그도 그가 마주할 세상의 혼돈을 잠재우는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비로파가 일월교에서 대단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심오지경(深奧之境)까지 도달하려는 탐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뜬구름 같은 말을 쏟아낼 때가 많았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 맥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 이번엔 너무 요원(遙遠)한 이야기만 하는군.”

하지만, 냉소평은 그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로파의 그런 현묘한 시야가 가장 힘을 발휘할 때는 사람의 진가를 간파해낼 때.

천마신교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것이 가치가 있음을 두 사람은 20대 시절에 이미 공감을 이루었고 지금은 돌아서서 기꺼이 적이 되어야 함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나중엔 제대로 이해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저도 제가 그런 말을 했었구나, 되새기면서 놀랄 때가 있었으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저런 식으로 말하고 마는 비로파의 말은 어쩌면 세상 저편의 누군가가 전해주는 이야기일 지도 몰랐다.

“그래도 내가 곧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 죽기 전에 알아챌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는 비로파 앞에서만 자신을 ‘본좌’라 칭하지 않는다.

“저희 나이가 충분히 차긴 했지요.”

냉소평이 팔짱을 끼면서 실소를 흘렸다.

“그렇긴 하지. 클클클!”

냉소평의 웃음소리에 비로파도 하얗게 센 수염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운명이 마치 곧 다가올 미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 여기면서.

* * * *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정말 오랫동안 평범한 마음들을 짓눌러 온 거악의 압력이 사라지는 순간에 누릴 것은 한없는 해방감뿐이기 때문이었다.

위소규는 주지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그 자리는 장경각을 관리하던 소이첸이 되기로 했다.

위소규는 자신이 무공을 익힌 몸이어서 여죄가 남은 무승들의 편의를 봐줄 수 있었고 자신 또한 아스마 쿠마루의 조언자로서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반드시 속죄의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공을 모르는 소이첸이 백련사의 주지에 오르면 백련교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위소규의 강한 추천이 있었다.

남은 무승들은 면벽수련을 징벌로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기간은 9개월.

달마의 면벽구년(面壁九年)을 본받아 9개월이라도 수행하면서 자신 안에 싹을 틔운 마성을 쫓아내 보자는 의미였다.

소이첸과 위소규는 백련사에 기록된 천마신교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찾아 일월교와 혈마종에게 내어주었다.

일월교가 백련교의 교정에 간섭하지 않는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무력으로 진압해도 됐었으나 그래도 쿠초 왕국과 고창성 백성들이 백련교에 믿음이 있었고, 일월교도 현재 일월교주 냉소평이 제시하는 ‘역할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생각들이 없었다.

혈마종은 그렇게 얻어낸 자료들을 토대로 신강 전역에서 천마신교의 잔여 세력을 지우기 위한 실질적인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에 있었으나 꽤 오랫동안 새외에 떨어져 살고 있었기도 했고 대통현에 살면서 서역의 이민족과도 종종 교역을 치른 바 있었기에 적임자로 여겨졌다.

쿠초 왕국도 왕가가 안정을 찾으면서 행정 권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천마신교와 백련교에 휘둘려 권위가 크게 실추된 면이 있었으니 완전히 복구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어쩌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당장 눈앞에 찾아온 평화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큰 연회는 특별히 없었다.

동장군은 매우 추웠고 고창성은 그리 풍족한 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하여 하룻밤 만에 수십 년 고착된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제법 편안하게 쉴 수 있을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편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정도 푹 쉰 진도건 일행은 일월교보다 먼저 고창성을 떠났다.

떠나던 날 손을 흔드는 딜라파 공주의 정성에 진도건이 답례로써 손을 흔들다가 천서은에게 옆구리를 꼬집혔음은…….

* * * *

진도건 일행이 오로목제에 도착한 것은 고창성을 떠난 날로부터 사흘 뒤 저녁이었다.

천산산맥의 지맥으로 인한 첩첩산중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이틀이면 도착했을 거리.

그만큼 지맥의 끝자락이어도 산세는 험하고 길은 난해해서 빌게포첸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2, 3일은 더 걸렸을지도 몰랐다.

천산산맥 끝자락 북쪽에 위치한 오로목제는 명확하게 정립된 행정구역은 아니었다.

먼 과거엔 당나라의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가 설치되어 천산북로의 비단길을 관할하는 정주(庭州)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의 멸망 이후에 풍부한 초지와 강이 흐르는 이 땅을 많은 유목민족이 쟁탈지로 여겼고 이후로 점점 사람이 모여 사는 군락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로목제, 현지인들의 말로 ‘우루무치’는 몽골족에겐 ‘광대한 목초지’, 회골족에겐 ‘투쟁’으로 뜻풀이되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 그들이 당도하자 개방과 하오문 인사들이 먼저 접근해왔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우리와 같은 한족 나그네들인 모양인데. 아니, 낭인들인가? 아무튼 물건이나 한 번 보시구려. 천축 너머에서 들여온 곡도인데 몽골족들 것보다 훨씬 날이 잘 서 있다오. 야, 이거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으음, 지들끼리도 부르는 말이 달라서. 시미타? …샴셔? ……뭐 대충 우리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월도(新月刀)라 보시면 되니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흥미로운 형태로군요.”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면서 곡도를 들어 구경하는 척,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았다.

안효철이 다른 좌판을 보면서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한족들이요?”

“상판대기 보면 그렇게 쓰여있지요?”

“후후, 그럼 이름들이 어떻게 되시오.

“엄환(嚴還)입니다.”

“소인은 이표(李漂)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개방의 소개 최현걸과 매우 가깝고 또 천무방으로서 종종 하오문도들을 보아왔기에 진도건과 천서은은 두 사람이 어디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엄환은 개방 정의개였다.

평범한 복색을 하고 있었지만, 복대의 허리 뒤편 부위에 세 개의 매듭이 묶여있다. 늘어진 상의에 얼핏 가려져 있었고 행색도 평범한 행상인처럼 보였으니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다. 애초에 구걸을 하지 않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는 편인 정의개들은 매듭을 자루에 두지 않고 저마다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표는 하오문도였다.

오로목제에선 엄환의 시종으로 일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 잦았다. 이표가 정보를 수집하면, 엄환이 정리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그런 식이었다.

“저희 파오 안에 더 괜찮은 물건들이 있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엄환이 슬쩍 자신들 뒤쪽에 있는 파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도건이 대답했다.

“좋지요. 더 질 좋은 물건이 있다면 비싸게 사겠습니다.”

엄환이 빌게포첸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가사복도 있는데 같이 보시지요. 많이 헤지셨습니다, 스님.”

빌게포첸은 대답하지 않고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네 사람이 엄환을 따라 파오로 들어갔다. 이표는 엄환이 앉았던 쪽의자에 앉아 좌판을 지켰다.

엄환이 파오 입구의 천을 내리고는 중앙의 불피운 아궁이를 두고 둘러 앉도록 권했다.

아궁이에 굴뚝까지 진흙으로 빚어 쌓아 올려선 파오의 중앙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연기가 나가도록 하고 있었다.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천마신교의 본진치고는 경계심이 생각보다 낮군.”

“저희도 습관적으로 조금 조심할 뿐이지 조금 평범하게 변해간 지 시간이 좀 됐습니다.”

“어째서요?”

“천마신궁이 비었기 때문이죠.”

빌게포첸이 염환에게 물었다.

“성혈교와 아유타 대라마에 대해 새롭게 알려줄 만한 게 있습니까?”

염환이 한숨과 함께 손을 휙 저으며 대답했다.

“어휴. 빈 천마신궁도 혹시 접근했다가 안 보이는 칼에 맞아죽을까봐 접근은 생각지도 못하는데, 마귀성이라고 가능하겠습니까? 안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으니 잘 살고 있거나, 구금되어 있거나, 살해당했거나. 셋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진도건이 석자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귀성.”

“이름의 유래는 듣긴 했지만, 지금 말하는 마귀성은 그게 아니니까 더 섬뜩하게 들리네요.”

천마신교의 본산이었던 요마산의 천마신궁이 이젠 정말 코앞인 상황이다 보니 천서은의 그런 감상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한편 빌게포첸은 더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파오의 장막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너머의 요마산과 천마신궁 그리고 성혈궁을 그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혁성 당주님과 황검당도 같이 들어간 것이지요?”

천서은이 묻자 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이 걱정 어린 투로 중얼거렸다.

“이 당주님의 실력이 절대 만만하지도 않고 천마신교도 궁지에 몰린 신세라고는 하지만, 마귀성에 들어가서 나온 적이 없다고 하니 잘못되셨을까 봐 너무 불안하네요.”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아니라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뱀이겠지.”

“……그렇지요.”

안효철의 지적에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혈교와 황검당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상당한 고수 집단인 둘을 동시에 집어삼켰다면 보통 함정도 아니요, 그냥 뱀이 아니라 이무기, 타락한 마룡이 똬리를 틀고 독니를 드러내고 있다 봐야할 것이다.

진도건이 염환에게 물었다.

“맹주님께선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사나흘 뒤면 도착하리라 예상하는 중입니다.”

“그럼 먼저 천마신궁을 볼 시간은 충분하겠군.”

진도건이 중얼거리듯 한 말을 들은 천서은이 그를 보면서 물었다.

“지금 가려고요?”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염환이 먼저 말을 붙이면서 말렸다.

“천마신궁의 불이 꺼져 어둠에 잠긴 지 오래입니다. 오늘은 저희가 쉴 자리를 마련해드릴 테니 여독을 좀 푸시고 내일 오전 오시 전쯤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햇볕이 안을 비추고 있어야 놓치는 거 없이 잘 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진도건이 고민하는데 빌게포첸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게 좋겠소. 빈승도 가기 전에 마음을 한 차례 다스리고 가고 싶으니.”

짝!

안효철이 손뼉을 치며 정리했다.

“그렇게 하지. 오래 달려오기도 했고,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떻겠나?”

염환이 두 무릎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마침 오늘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푸주에서 다리가 부러진 낙타를 잡았더랬죠. 고기가 좀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맛 좀 보시고 쉬시지요. 잘 자리도 찾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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