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 제78장. 일망타진(一網打盡) (3)
고려치 않은 전개였으니 약간의 결심을 더 해야만 했다.
“네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부포팁! 국왕을 죽여라! 왕가를 몰살해라!”
천마신교의 목적은 쿠초 왕국의 조종에 있었으니 왕가를 무너뜨리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셈을 노린 것이다.
부포팁은 무후라트 국왕의 왼팔을 붙들고 있었고 아스마의 명령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예상치 못한 명령에 조금 당황했지만, 명령은 이행해야 한다.
부포팁이 손끝을 세우자 섬찟한 마기가 흘러나와 뾰족하게 예기를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는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뒤늦게 눈치챘다.
빠각!
잔혹한 일격이 정수리에 꽂혔다.
부포팁이 입으로 피를 뿜으면서 머리가 좌로 크게 꺾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가 절명한 부포팁을 밀어냄과 동시에 무후라트 국왕을 끌어당겼다.
“엇?”
무후라트 국왕의 오른팔을 붙들던 압랍이첸이 거기에 끌려가 휘청거리면서 갑자기 나타난 존재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그들처럼 승복을 입었으나 양식은 다소 다른, 그러나 적임에 틀림없는 존재를 향해 일장을 뻗는 순간 그의 눈앞에 황금빛 손바닥에 나타났다.
쩌엉!
가공할 대수인의 일격에 압랍이첸까지 피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즉사였다.
백성들이 혼비백산하는데, 무후라트 국왕을 확보한 빌게포첸의 중후한 목소리가 도로 위로 울림을 만들어낸다.
“옴 마니반메훔(唵麽抳鉢銘吽), 옴 마니반메훔……!”
서역의 불교와 불교계열의 모든 종파라면 알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웅혼한 울림과 함께 장내에 울려 퍼졌다.
백성들의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백련교 승려들의 정신을 혼란함 속에서 일깨운다.
“성혈신마……!”
아스마도 빌게포첸을 알아보고 탄식과 같이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순간, 사방에서 큰 소란이 들리기 시작했다.
싸움과 비명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더니 백련교 무승들이 시장 마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중앙까진 오지 못하고 마당 가장자리 근처에서 빙 둘러서는 진도건 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바라보는데 곧 주위의 시장 기물들이나 가옥들 사이, 지붕 위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나타난 자들은 통일된 복장이 아니라 모두 제각각이어서 그 출신성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대부분 지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자들의 모습은 명확하게 통일되어 있었다.
검은 가사를 어깨에서부터 비스듬히 두르고 있었고 안은 좌우가 대칭된 형태의 법복을 받쳐 입고 있었다. 옷깃이 날개처럼 세워져 있었는데 이런 복식을 한 교단은 한 군데밖에 없었고 아스마 쿠마루도 매우 잘 아는 곳이었다.
“일월교……!”
성혈신마의 등장보다 더 놀랐다.
마교주가 성혈신마와 백련교를 방문했던 일이 있었을 때도 일월교는 모습을 비춘 적이 없었다.
백련교에서 나왔지만, 완전히 갈라선 교단이다.
일월교는 종교사상적으로 자기들만의 완전한 울타리를 구축했는데 그들이 마도를 걸으면서 강력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스마가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백련교와 일월교가 달랐던 건,
백련교는 미륵의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가 천마신교가 야기한 말세의 세상에 스스로 미륵이 되어 통치한다는 생각을 가진 반면,
일월교는 신도 모두가 미륵이 될 자질을 이루어 집합체로서 광명으로 더 빛날 수 있다는 공동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교단이었다.
즉, 교주는 세상을 밝히는 해와 달의 흐름을 관장하는 존재로 여기고 교도들은 그 흐름 사이에 항상 떠 있는 별처럼 여김으로써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명정토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냉소평이 시장 마당 근처의 3층 객잔의 높은 지붕에서 호통을 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진도건. 감히 본좌의 행보를 재촉하다니. 혼나고 싶으냐?”
아스마 쿠마루가 냉소평의 모습을 보고 눈빛이 떨렸다.
알 수 있었다.
피부로 느껴졌다.
하단전에 들끓는 마공의 기운이 일월신마 냉소평에게서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어쩌면 그가 그리던 미륵의 경지가 그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기만 했던 진도건이 한 걸음 걸어 나와 비로소 군자검의 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다.
“판을 깔아줬으면 감사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나직한 크기로 얘기하는 듯했지만, 장내의 사람들에겐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꽂힌다.
“우린 불만 없다네. 주공(主公)이 부르면 달려와야지.”
부양호가 진도건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출신 성분을 알 수 없었던 무리들은 바로 혈마종이었다.
혁우도 부양호 옆에서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그의 표정은 훨씬 밝았다.
그들은 바라던 혈마를 보게 되었다.
세대에 걸친 기다림 때문이었는지 옥문관 전투에서도 희생은 많은 편이 아니어서 그들은 보답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통일된 그들에게 진도건이 미소를 지으며 목례로 화답했다.
아스마가 다시 진도건을 보았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바로 그가 이 모든 상황의 설계자라는 이야기였다.
‘혈마가 그런 정도의 존재였단 말인가? 일월신마를 움직일 정도로?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아스마가 혼란에 빠졌을 때, 그의 심경을 자극하는 사람이 혈마종 사이에서 나타났다.
위소규였다.
아스마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위소규! 네놈이 감히 날 배신하다니! 이 찢어죽일 새끼!”
“진공가향 무생노모. 당신의 지배에 빠진 백련사와 이 나라는 미륵정토가 아니라 나락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소이다. 이제 그 어둠을 걷어내고 다시 광명을 비추어야 합니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은 여기서 끝내야 합니다.”
“크하하하! 건방진 놈이 몇 마디 들어주겠다고 감히 내게 설교를 늘어놔? 놈들을 쳐라! 백련교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아스마가 힘주어 소리쳤다.
하지만, 장내는 조용했다.
약간의 웅성거리는 소요만 조금씩 들릴 뿐이지 백련교 무승들 누구도 쉽사리 행동하려는 자 없었다.
“이, 이것들이……!”
아스마가 당황하는 순간,
위소규가 앞으로 나서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진공가향 무생노모. ……나모 아랴 매다레야 모지사다바야 다냐타 매다리 매다리 매다라마나세 사바하. 나모 아랴 매다레야 모지사다바야…….”
무생노모의 정토를 기리는 팔자진언을 시작으로 위소규가 외는 것은 미륵보살다라니의 진언이었다.
살기와 두려움, 혼란과 걱정이 혼재한 이곳에서 위소규가 미약한 내공이나마 목소리에 실어 진언을 외기 시작하자 백련교 무승들 사이에서도 하나둘 선 자리에서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언을 함께 외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같이들 외워라.”
그 모습을 지켜본 냉소평이 지시를 내리자 일월교도들 또한 미륵보살다라니를 외기 시작한다.
나모 아랴 매다레야 모지사다바야 다냐타 매다리 매다리 매다라마나세 사바하.
다라니(陀羅尼).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어 외는 것으로 악한 법을 물리치고 올바른 법을 갖게 하는 범어로 이뤄진 진언.
그것이 위소규를 포함한 수십 명의 백련교 무승들과 일월교도들까지 한목소리로 외기 시작하자 병사들도, 백성들도 따라 외기 시작한다. 그들이 받았던 공포정치와 탄압, 억압에서 해방되길 염원하는 의지가 다라니의 범어를 타고 웅장하고도 신성한 울림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딜라파 공주도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물을 흘리고 어깨를 떨면서 진언을 외고 있으니 천서은이 곁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내심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미륵의 노래.
그것에 고통스러워하는 자는 누구인가.
“크윽.”
“윽, 그만!”
“으으으……!”
위소규를 따라 가부좌를 틀지 않은 자들 무승들 사이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악!”
퍽!
갑자기 한 무승이 시뻘겋게 눈이 충혈된 채로 괴성을 내지르더니 옆에서 진언을 외던 동기 무승의 머리를 걷어찼다.
힘이 어찌나 거셌는지 피를 토하면서 쓰러져서는 게거품을 물며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 무승들이 앉은 무승들을 공격하려 하기 시작했다.
꽈앙!
혈마종 사이에서 튀어나온 안효철의 주먹이 선 무승 하나의 안면에 꽂혔다.
“승려들을 지켜라!”
안효철이 외치기가 무섭게 일월교도나 혈마종 가운데서도 실력 있는 자들이 선제적으로 움직이면서 동료들을 공격하려는 백련교도들을 덮쳤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냉소평이 중얼거렸다.
“미륵진언이 집단적 주화입마를 야기했군.”
일월수라 주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공이 어설픈 탓입니다.”
이런 범어로 된 다라니, 진언들은 분명 신성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외는 것만으로 실제로 마를 쫓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또 오히려 진정한 ‘마’란 불성과 함께 가는 것으로써 목소리로만 물리칠 수 있는 허술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진언을 외고 또 사방에서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일월교도들과 천마신교에 복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 길을 모색하던, 특히 아스마 쿠마루를 깊이 따르던 일부 무승들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였다.
냉소평이 한심한 눈초리로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성 전체에 상주하는 수천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니 이는 곧 불성(佛聖)의 사자후요. 어설프게 마경에 든 자들, 주화입마에 이르리라.”
위소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혈마종과 일월교 고수들이 난입해 행동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에게 힘을 보태주었던 무승들 일부가 희생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간절함을 담아 한 사람에게 머물고 있었다.
“진 공. 부디 이 업보를 끊어주시오.”
입 안에만 머물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마치 그걸 듣기라도 한 듯 진도건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검집에서 흑검을 뽑고 있었다.
군자검의 묵빛 검신을 타고 피처럼 붉은 마기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끝내자.”
아스마 쿠마루도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결판의 장에 선 사람은 성혈신마 빌게포첸도, 일월신마 냉소평도 아닌 눈앞의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한 남자일 것이라고.
다라니에 영향을 받은 건 그를 따르던 백련교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조차 영향을 받은 것인지, 혹은 그 불성의 사자후에 호응하여 반작용을 자신에게 허(許)한 것인지.
아스마 쿠마루의 두 눈은 동공부터 흰자위였던 자리까지 새까맣게 변하여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트트특!
원래도 근육질의 장한과 같았던 아스마의 몸집이 더 크게 부풀면서 피부가 푸르죽죽하게 변하고 몰골은 흉측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광대가 불거지고 턱도 두드러졌으며 이마도 양쪽으로 뿔 같은 혹이 튀어나와 몹시 흉했다. 발톱이 신을 뚫고 나왔고 손톱도 날카롭게 길어져 섬뜩함을 품는다.
이젠 저런 광경이 익숙하기까지 하지만, 처음 본 백련교 무승들이나 병사들, 백성들 사이에선 두려움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괴마(怪魔)로 부릴 만한 모습이 된 아스마가 진도건을 보며 소리쳤다.
“혈마여! 너도 악마의 손을 잡아놓고 감히 신성한 사자인 척을 하려 드느냐!”
진도건에게서도 그만큼 섬뜩한 마기가 느껴지기에 던진 호통이었다.
그 순간 진도건의 전신을 붉은 기운이 감싸더니 혈마의 모습이 진도건과 겹치듯 바깥으로 드러났다.
“잡귀(雜鬼)면 주제에 맞게 아귀도(餓鬼道)로 사라지거라.”
수라의 귀곡성.
혈마의 목소리가 아스마의 귀에 꽂힌 순간, 그의 얼굴이 콱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얼굴이 더 커지고 앞뒤로 불거지는 듯하더니 양쪽 관자놀이 부근에서 검은 눈이 뜨였다.
네 개가 되어버린 눈은 마치 얼굴을 좌우로 나눠버린 듯했지만, 코와 입은 제 자리에 있었으니 보기에 매우 끔찍하기 그지없다.
“나찰귀(羅刹鬼)를 두려워하라! 크와아아앙!”
아스마가 괴성을 지르면서 진도건을 향해 튀어나갔다.
섬뜩한 마기를 끌고 두 손톱에 날을 세워 집어삼킬 듯 덮치려는 몸짓.
그 순간, 진도건이 혈마의 환상을 뚫고 그보다 더 빠르게 튀어나갔다. 군자검의 묵빛 검신이 그물과 같은 검광을 그리며 아스마를 지나쳤다.
혈마기가 불꽃처럼 검광의 그물을 따라 일어나 아스마의 거체를 휘감았다.
촤촤촤촤촥!
“크아아악!”
아스마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새 그의 뒤에 있었던 진도건이 뒤로 보법을 밟으면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동시에 흑검이 움찔거린다 싶더니 핏빛 참격이 지상에서 하늘로, 아스마의 육신을 뚫고 솟구쳤다.
파천혈마공 혈광참.
핏빛 마기는 공중 속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로 아스마의 육신에서 솟구친 핏물이 치솟았다가 떨어져 내렸다.
대신 진도건에게서 혈마가 자신을 일으키면서 마기로만 이뤄진 검을 아스마의 갈라진 등에 꽂아 심장을 관통했다.
키아아아악!
끔찍한 귀곡성.
그것은 아스마 안의 나찰귀의 것.
타락한 나찰의 마성 따위 아수라의 신성을 갖게 된 혈마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 순식간에 그에게 집어삼켜졌고 혈마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스마의 육신은 제 모습으로 돌아가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늘로 드러난 그의 등은 회음부부터 정수리까지 입을 벌린 채 피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화르륵!
절명한 아스마 쿠마루의 육신에 불이 붙었다.
붉은 불꽃 속에 이따금씩 푸른 불꽃이 튀었다.
“맛없는 녀석이다. 아귀도에 어울리는 놈이야.”
혈마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진도건이 군자검을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주화입마에 빠졌던 무승들도 모두 죽었다.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와 그를 따라 마도의 길에 빠져있었던 무승들까지 일망타진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