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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12화 (412/432)

412화 - 제78장. 일망타진(一網打盡) (2)

* * * *

고창성 내 왕궁 앞엔 광장과 연단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군사들의 사열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백성들에게 왕명을 공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연단과 광장의 중심지는 조금 더 떨어진 시장의 중앙마당과 길이 일자로 직접 연결되어있다.

그곳에서도 광장의 연단을 볼 수 있게 한 것이고 반대로 연단에서도 시장 마당에 찬 군중들을 살필 수 있도록 구조한 것이었다.

아스마 쿠마루는 그 광장의 높은 연단 위에 의자를 하나 두고 앉아 있었다.

“소승에게 놈들을 확실히 끌어낼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 새벽녘 바깥을 순찰해보고 돌아왔다는 위소규가 그를 찾아와 들려준 계획이었다.

무승들이 아침까지 공주를 데려오라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지 의구심이 있었던 아스마는 위소규의 의견을 바로 채택하고 지금 이 자리에 이른 새벽부터 앉아 있었다.

광장은 물론 시장 거리도 한산했다.

그 뻥 뚫린 중앙거리 너머로 보이는 마당엔 여섯 명의 병사가 보석이 박힌 보검, 금화가 든 주머니 다섯 덩이를 실은 준마 다섯 필의 고삐를 붙잡고 선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놈들이 가장 경계하는 건 일반들도, 백련사 무승도 아닌 교주님뿐입니다. 광장 연단에 계시어 모습을 비추시고 그곳과 떨어진 시장 마당에 보상과 준마를 배치해두십시오. 그 정도 거리라면 그들은 말을 타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위소규의 조언에 따른 배치였다. 그는 매복 계획도 조언을 해주었다.

“북문만 열고 그곳 병사들을 절반으로 줄이십시오. 아침이 되면 무승들은 백련사로 복귀시키는 대신에 일반 평민으로 변장하여 중간 지점에 숨도록 하십시오. 놈들이 어물쩍거린다면 즉각 포위할 수 있고, 곧장 도주를 시도해도 충분히 지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교주께선 즉각 달려오셔서 놈들을 처리하시면 되실 것입니다.”

아스마는 두 조언이 듣기에 분명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들이 정말 두 명뿐인지, 일행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주쳤던 무승들을 꺾었다면 어느 정도 얕잡아볼 마음이 생겼을 법했다.

물론 교주인 자신을 직접 노릴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으나 아스마 스스로 실력에 자신감도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 가까이 배치된 기물들 뒤로 그가 신임하는 백련교 최고수 네 명을 배치해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딜라파 공주의 마음을 계속해서 흔들 필요도 있다고 여겼다.

“딜라파…….”

카디르 무후라트.

일국의 국왕이 아스마가 앉은 자리 옆에 두 발로 선 채 근심에 찬 얼굴로 딸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고 있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카디르 무후라트를 재상쯤으로 보고 아스마 쿠마루를 왕으로 여겼을지도 몰랐다.

주종이 역전된 관계.

그것이 작금의 쿠초 왕국과 백련교의 모습이자 현실이었다.

“정말 나왔군.”

아스마가 미소 지었다.

옆에 있던 무후라트 국왕이 몸을 움찔 떨었다.

시장에 딜라파 공주와 남녀 둘이 모습을 드러내어 병사들과 접촉하는 광경이 아스마의 눈에 들어왔다.

과연 그를 경계하는지 광장 연단쪽을 흘끔거리는 몸짓이 그의 두 눈에 똑바로 보이고 있었다.

“딜라파는…… 나왔는가?”

“그렇습니다, 전하. 무사히 나온…… 응?”

아스마가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마터면 벌떡 일어섬으로써 계획을 흔들 뻔했다.

“하하, 저런 대단한 미녀가. 이 한심한 것들이 제일 중요한 걸 보고하지 않았구나. 일이 끝나면 교육 좀 시켜야겠어. 후후후! 두 미녀와 하룻밤이라, 즐거운 밤이 되겠구나.”

아스마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음에도 천서은의 외모를 똑똑히 보았다.

여색을 밝히는 그의 눈이 놓칠 리 없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무후라트 국왕의 귀에 그 말들은 아스마를 더 두렵게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딜라파, 나의 딸아. 이 아비가 못나 이런 짐승을 궁에 들였구나. 죽고 싶구나. 죽고 싶어.’

일국의 공주가 받게 될 취급을 아스마의 말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으니 오히려 그가 딜라파의 가출을 중용한 것이었다.

성공한다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나락이요, 실패해도 나락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후라트 국왕은 두 손을 꼭 모으고 숨죽인 채 기도를 외웠다.

‘무생노모시여, 부디 이 지옥에서 나와 내 딸을, 이 나라를 구원하소서!’

한편 아스마는 그들을 반드시 붙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탑겝.”

“예, 교주님.”

“포위를 좁혀라. 그리고 놈들 중에 계집은 반드시 생포해라. 공주가 상품(上品)이라면 저것은 특품(特品)이로구나.”

“무생노모.”

연단 뒤에서 호법을 수행하는 승려 하탑겝이 움직였다. 은밀히 수신호들이 전파될 것이고 그가 지시를 내린 후 다섯 세기 전에 포위망은 시장 마당을 중심으로 좁혀질 것이었다.

아스마는 속으로 열을 세면서 시장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응? ……하! 건방진 놈들이로군.’

아스마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가 걸렸다.

사내와 여자는 말에 실린 물품들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딜라파와 함께 건물 뒤로 모습이 사라지면서 물러간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에겐 여전히 여유가 있는지 보검을 검집에서 뽑아 보기까지 했다.

이곳을 흘끔거리는 게 분명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거리가 떨어진 상황이 그들을 안심케 하는 모양이었다.

‘이 몸이 발을 떼면 열 걸음이면 도착할 수 있거늘, 감히 날 우습게 보다니.’

아스마는 손발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여섯 ……여덟 ………열!’

아홉쯤에 두 사람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열을 세는 순간에 아스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아스마도 바로 연단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기물 뒤에 숨었던 부하들도 즉각 아스마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두 명만이 국왕을 붙잡고 연단에서 내려와 아스마의 뒤를 조금 천천히 뒤쫓았다.

아스마의 감각에 곧 시장에 매복했던 무승들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놓치지 않는……, 음?’

절반가량 거리를 좁혔을 때, 도망치던 두 남녀가 말머리를 거꾸로 돌리더니 다시 마당 쪽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아스마의 두 발이 마당에 진입하여 착지했을 때, 그의 얼굴엔 이미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도망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마당 반대편에 이르러 아예 말에서 내린 것도 모자라 안쪽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건물 뒤로 사라졌기에 병사들이 딜라파 공주를 데리고 계획된 위치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는데 병사들은 온데간데없고 딜라파 공주만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돌아가면서 자신을 쏘아보는 게 아닌가?

‘뭐지?’

속으로 물었다.

예상한 상황이 아니었고, 당장 그의 물음에 대답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련교 무승들이 시장 사이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아예 딜라파 공주와 함께 제법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으니 이내 완전한 포위망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왜지?”

아스마가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무엇을 묻는지 알 것 같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마가 다시 물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

진도건은 주위를 둘러싼 포위망을 쓱 둘러보았다.

백 명이 넘는 숫자의 포위망.

그 속에서 마기의 기척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완연히 마공을 갖게 된 자들은…… 서른 명 정도인가? 나머지는 조금 내재한 수준. 천마신교와 거리를 유지한 덕분에 전체로 퍼지진 않은 모양이로군.’

단순히 마기의 기척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세도 느낄 수가 있었다.

흥분과 살기도 있었지만, 걱정과 두려움도 엿보인다.

백련사를 과거로 되돌릴 거라는 위소규의 전망이 허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쓸어버리면 되나?”

“솎아내야지.”

진도건이 혼자 중얼거리자 천서은이 힐끔 보고는 피식거렸다. 혈마와 얘기한 것임을 눈치챘음이다.

“하하하, 이젠 무시까지 당하는군.”

아스마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자 진도건이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게 전부인가?”

“뭐?”

“충성심이든 공포든 간에 널 따르는 무승들이 이게 전부냐고.”

“그렇다면?”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네가 꺾여야 백련교도 제 자리를 되찾지 않을까 싶어서.”

진도건의 말에 아스마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주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고 말이야. 저들은 내 명령이면 마라의 불 속으로도 기꺼이 뛰어들 대 백련신교의 무승들이다. 너희 둘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진도건은 아스마의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시장 거리에서 느껴지는 소요에 있었다.

‘시작됐군.’

진도건과 천서은이 딜라파 공주와 함께 백련교의 포위망 안에 갇혀주면 발생할 다음의 일.

“전하! 국왕 전하!”

“국왕 전하!”

“저희 비천한 것들의 청원을 들어주십시오, 전하!”

시장 거리에 일어났던 소요가 물밀듯이 거리로 튀어나왔다.

그 위치는 아스마 쿠마루의 뒤, 그가 달려왔던 거리의 한 가운데였는데 정확히는 뒤쫓아오던 무후라트 국왕과 아스마 백련교주 사이로 나온 것이었다.

“저것들은 뭔가?”

아스마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묻는 사이, 무후라트 국왕과 그를 붙들고 달려오던 무승들은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갑자기 길목 좌우에서 튀어나온 서른 명 넘는 백성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울분을 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길목에 보초 서던 일부 병사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무후라트 국왕 주변으로 붙었지만, 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다.

성난 백성들이 덮치면 큰일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백성들은 납작 엎드리면서 공격 의사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성토들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전하! 저 부덕한 백련사 지주를 벌하여 주십시오. 저놈이 중놈들을 시켜 소인들의 부인과 딸, 여동생들을 강제로 데려가서는 겁간하였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몇 년만 지나면 이 성내에 젊은 여자들이 저 무도한 중놈의 가랑이에 기게 생겼습니다요! 부디 병사들을 시켜 저놈을 붙잡고 목을 쳐 주십시오, 전하!”

몇몇 백성들이 목청 높여 소리쳤는데, 내용은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백성들이 백련사 지주 아스마를 색마로 규정하며 피해를 호소하고 중벌을 내려달라는 이야기였다.

무후라트 국왕은 크게 당황했다.

당연히 그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련사가 이런 피해자들을 상대로 입막음을 지속적으로 시도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련교주의 무공과 흉포함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 당사자가 가까이 있음에도 이렇게 달려와 성토한다는 건 사안의 심각성이 얼마나 중한지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무후라트 국왕의 눈빛이 백성 무리들을 너머 아스마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너머 딜라파에게도 닿았다.

백성들의 분노를 수렴하여 해결해주는 것이 국왕으로서 마땅한 도리이겠으나.

공의 안위가 대단히 위태롭고, 아스마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극에 달한 상황.

그의 두 팔을 백련교의 무서운 무승들이 붙들고 있는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선 없었다.

“나, 나는……, 짐은…….”

무후라트 국왕이 말을 더듬으면서 어쩔 줄 몰라 덜덜 떨고 있을 때.

아스마 쿠마루는 작금의 상황이 철저히 연출된 것임을 깨달았다.

“위소규!”

그의 성난 목소리가 석자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바들바들 떨던 무후라트 국왕도, 성토하던 백성도, 긴장하며 포위를 유지하던 무승들도 움찔 떨었다.

아스마 쿠마루는 위소규가 백성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달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오던 걸 기억했다.

그의 색정행각에 대해 염치불구 용서를 구했다는 말도 들었다.

당연히 용서가 될 리 없는 일이었지만, 공포심은 입을 다물게 하고 몸을 위축시키기 마련.

거기에 위소규의 위로와 용서를 더하면 더더욱 숨죽이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공포정치의 화룡점정이기에 아스마는 위소규의 그런 행동들을 줄곧 내버려 뒀던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뒤통수로 날아드는 비수가 될 줄이야.

“위소규는 지금 바빠.”

아스마의 고개가 진도건에게 휙 돌아갔다.

“뭣이?”

“일월교와 혈마종이 성문을 원활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거든.”

혈마종은 모르지만, 일월교는 잘 알고 있다.

아스마 쿠마루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천마신교를 끌어 들인다는 발상이 매우 의아했지만, 일월교의 태생이 백련교라는 걸 떠올려본다면 이는 구호탄랑(驅虎呑狼), 호랑이를 몰아와 늑대를 삼키려는 계책처럼 느껴졌다.

늑대는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 자신, 호랑이는 필경 일월교주 냉소평일 터.

위소규라는 한 사람이 그런 대마두를 움직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그때, 아스마의 시선이 진도건의 붉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무승들에게 처음 보고받았을 때는 무심코 지나갔던 그 외모의 특징들이 작금의 상황 속에서 불현듯 자기 일이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어떤 존재, 어떤 인물로 귀결되는 순간.

‘혈마…….’

그 두 글자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방금 적 사내가 거론한 혈마종을 연속해서 떠올랐다.

아스마 쿠마루는 진도건과 천서은을 천마신교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진도건을 혈마종의 혈마로, 천서은을 그의 여자로.

작금 강호무림의 정세에 무지하니 겉보기에 의존한 추측인 셈.

아스마가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천마신교가 감히 우릴 삼키려 들다니. 날 우습게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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