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 제78장. 일망타진(一網打盡) (1)
“논의?”
냉담하게 반문하는 진도건의 목소리에 위소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무공을 수련하긴 했으나 경지가 높은 편은 아니었고 중원 백련사에 있었을 때도 강호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몸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단신으로 찾아온 데에는 그런 무공의 자신감보다는 돌아가는 정황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혹 딜라파 공주를 데리고 있지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귀하께선 여기 고창성에서 딜라파 공주를 온전히 지킬 자신이 있으십니까?”
진도건은 그의 태도나 어조를 음미하면서 물음을 곱씹어보았다.
“물론이다.”
“혹 사적으로 인연이 있진 않으신지요?”
“궁 안에만 있을 일국의 공주와 강호의 낭인이 그런 인연이 있을 턱이.”
“그럼 어째서 공주를 데리고 계십니까? 나쁜 마음은…….”
진도건이 그의 물음을 잘랐다.
“질문이 많군. 용건만 간단히.”
“역시 귀하께선 소승과 이해관계가 일치할 것으로 생각돼서 말입니다.”
“이해관계?”
“백련교주 아스마 쿠마루를 쓰러뜨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도건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위소규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위소규는 진도건의 검이 검집에 들어가 있는 채 자신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진도건과 백련사 무승들의 잠깐뿐이었던 마찰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성벽 위에서 바람을 쐬던 중에 운이 좋았는지 딜라파 공주와 그녀를 쫓는 무승들의 움직임이 그의 시야를 지나쳤고 진도건과의 마찰도 건물 사이로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다.
무승들이 빈손으로 돌아간 것을 본 위소규는 마침 혼자 있었던 상황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다툼이 벌어졌던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면서 백련사 무승들과 병사들이 고창성 전체로 경계를 확대해가는 상황을 엿보았다.
현장에 도착해선 골목길 눈밭 위로 약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고 방향만 어림잡은 채 움직였다. 흔적은 끊어졌지만, 일부러 근처를 숨어다니며 어슬렁거리면 눈에 뜨일 거로 생각했다.
딜라파 공주를 데려간 사람들이 백련교와 어느 정도 대척점에 있고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의 행동의 의도를 의심할 것으로 생각했다.
추적자 제거 목적이었다가 자칫 마찰이 일어나면 위치를 들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대적 의도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
위소규의 판단은 주효했고 그 결과 진도건과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백련사 승려가 자신들의 교주를 쓰러뜨려 달라. 의미심장하군. 당신은 누구지?”
“소승의 이름은 위소규. 아스마 교주의 자문을 맡고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교주의 오른팔이라고 생각할 만한 위치의 인물.
진도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병사들과 무승들의 경계망이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동초(動哨)를 가동하고 있었다.
“의심스러운데.”
일부러 말을 던졌다.
“공주를 뵙게 해주신다면 절 믿을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가지.”
진도건은 검집 채 겨누던 팔을 내리면서 몸을 돌렸다.
과감하게 등을 보이는데 위소규는 그 뒷모습으로부터 자기 실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느끼고 기대감을 가졌다.
두 사람은 은밀히 움직이면서 하오문 안가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위소규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면 눈밭이 헤쳐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지나간 자리로 바람이 얕게 부는가 싶더니 밀려났던 눈들이 다시 쓸려가면서 패였던 자리를 메우는 게 아닌가?
손이나 도구로 메우는 게 아니라 바람으로 메웠으니 자연적인 무늬만 남는 셈이었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추적하기 어려웠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고수인 것 같다. 이건 정말 기회일지도…….’
끼이익.
진도건이 안가의 문을 열고 위소규와 함께 들어갔다.
안효철이나 빌게포첸 등은 전혀 경계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과 안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들도 기척을 읽었고 함께 온 위소규의 실력이 대단한 수준이 아님을 파악한 것이다.
딜라파 공주가 위소규를 반기며 다가갔다.
위소규가 합장하면서 고개를 숙이자 딜라파가 그의 손을 잡으려다가 아차 하며 합장으로 마주 인사했다.
“위소규 대사.”
방달도 알아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저분도 백련교니까 좀 거시기하지만, 개인으로 본다면…… 백성들이 드물게 믿고 따르는 분이긴 합니다. 이분이 오시고 나서 아스마 교주나 백련교가 꽤 성장할 수 있어서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도 많지만, 교주에 질려하는 사람들도 이분의 덕망은 인정하거든요. 백련교 때문에 도망친 공주가 반기는 것만 봐도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흐음.”
확실히 딜라파 공주의 눈빛이나 태도를 보면 위소규를 의지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백련사 무승들에게 질겁하며 도망치던 걸 떠올리면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안효철이 위소규와 딜라파 공주를 슬쩍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방달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가?”
“대사가 공주께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로선 교주가 국왕 전하를 협박하는 걸 막을 힘이 없었다고요.”
“왕가에 호의적이라는 건가?”
“얘길 더 들어봐야겠지요.”
안효철의 반문에 천서은이 말했다. 방달도 동의하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규가 딜라파 공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딜라파 공주를 진정시킨 후, 진도건과 다른 이들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합장했다.
“백련사 승려 위소규입니다.”
진도건이 어조에 경계를 조금 풀면서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시오.”
“으음, 일단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혹시 저분은 성혈교분이 아니신지요?”
“맞소. 성혈신마 빌게포첸.”
위소규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백련사를 찾았던 걸 먼발치서나마 한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천마신교의 핵심고수 중 하나였기에 인상착의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진도건은 위소규의 혼란을 정확히 읽었다.
“현재 천마신교와 성혈교는 돌아선 상황이고 의심을 풀어도 될 것이오.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
진도건이 직접 보증을 서는 말에 위소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혹시 옥문관 전투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혹시 전쟁의 결과는…….”
“우리, …창천맹이 일단 승리했소.”
“아아! 그럼 천마신교는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까?”
“마교주는 놓쳤지만, 그렇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마교 본산까지 나아가는 중이오.”
“그거…… 역시 다행이군요.”
위소규는 어제 아스마에게 보고하던 걸 떠올렸다.
‘아스마가 정확한 판단을 한 셈이구나.’
진도건 등은 위소규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는 걸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길을 느낀 위소규가 사과를 표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소승은 교주를 제거하여 백련사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아스마는 천마신교의 교세가 전쟁으로 크게 위축된 틈을 타 백련교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어 합니다. 천마신교 자리를 대체하는 백련신교가 되길 바라지요. 그러기 위해서 천마신교가 백련교를 통해 그러했던 것처럼 쿠초 왕국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이 왕국의 국왕이신 카디르 무후라트의 따님인 여기 딜라파 후무라트 공주님과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합니다.”
안효철이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승려가 혼인?”
“이곳의 풍습은 중원과는 좀 다릅니다. 불가 승려들의 혼인을 강제로 금지하지 않지요. 색욕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은 으레 있지만, 혼인 자체는 그 범주에서 제외하고 보는 편입니다.”
“그렇군.”
안효철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위소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하지만, 아스마 쿠마루는…… 끔찍한 색마입니다. 자기가 신임하는 부하들을 시켜 성내를 순찰시킨 후에 용모가 괜찮은 아녀자라면 어린 소녀부터 이미 남편이 있는 부인들까지 강제로 잡아다가…….”
위소규가 이야기 말미에는 참아 입에 담기 어려웠던 나머지 입을 다물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딜라파는 말을 모두 알아듣지 못했으니 여전히 다소 긴장한 상태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천서은은 위소규가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곤 얼굴에 불쾌감을 가득 드러냈다.
“공주도 그걸 알고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 저희 승려들이 돈을 주거나 폭력을 쓰는 등으로 입막음하고 다녔지만, 어찌 사람들이 모를 것이며 왕실이라고 보는 눈, 듣는 귀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백련교주 아스마의 무공은 이곳 사람들이 감당하기엔 막강한 수준이고 백련교 자체도 이곳에선 역사가 꽤 있다 보니 권력만 계속해서 고인 채 신망을 잃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방달이 입을 열었다.
“백련사에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위 대사도 그렇고 일부러 무공 수련을 포기한 일부 노승들도 그렇고요.”
방달도 위소규를 의심하긴 했지만,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그의 덕망이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위소규는 방달의 이야기에 합장하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무생노모. 방 시주의 말씀이 너무 과분하군요.”
“무생노모.”
위소규가 다시 진도건과 빌게포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스마 쿠마루와 그를 따르는 일부 무승을 제거하면 백련사는 다시 예전의 백련교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소승이 여러분이 실력을 알지 못하지만, 노스님께서 정말 성혈교의 성혈신마시라면 아스마를 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위소규는 사실 진도건을 보았을 땐 그의 기대는 막연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빌게포첸은 달랐다.
서역 백련사에서 지내면서 천마신교의 무서움을 알았고 구주마종의 신마들에 대한 위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더구나 백련교와 성혈교는 중간 단계에 차이가 있더라도 뿌리는 불교에 두고 있었으니 그의 처지나 생각을 이해해 줄 거로 생각했다.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며 빌게포첸을 보았다.
“재밌네요. 역시 이곳은 빌게포첸 스님의 안방이나 다름없어 보여요. 위 대사께 확신을 주는 걸 보니까 말이에요.”
“아미타불. 소승은 그저 도울 뿐, 역할은 진 시주와 천 시주, 안 대협이 하셔야겠지요.”
빌게포첸의 말에 위소규가 적잖이 놀란 눈으로 진도건과 천서은, 안효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안효철이 노익장 같은 느낌에 머리 하나는 큰 덩치가 주는 위압감으로 대단한 고수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진도건과 천서은은 그들의 아랫줄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빌게포첸이 상당한 존중을 보이는 모습인 놀라움을 넘어 더 큰 기대를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성혈신마와 비슷한 급의 고수들이라면 백련교주 제거는 무조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안효철이 생각을 정리하면서 위소규에게 물었다.
“그럼 위 대사는 아스마 쿠마루와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의 제거를 원하는 것이고. 우리는 직접 쳐들어가든 암살이든 목적만 달성해주면 위 대사가 나머지를 정상화한 후, 우리 측을 돕겠다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은데. 맞소?”
“맞습니다.”
안효철이 진도건을 보았다.
“흐음,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됐군요. 그럼…….”
“지금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마침 저희 상황도 알맞게 돌아가고 있으니. 그쵸?”
천서은의 물음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규가 새삼 신기한 눈빛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부하를 시켜 나를 불러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이 청년이 이 일행의 수장이로구나.’
진도건은 턱을 다듬으면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민이 끝나자 진도건이 손짓하여 탁자를 중심으로 주목을 이끌었다.
“목표는 분명하고 주어진 조건도 충분히 유리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암살 같은 건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백련교주와 그를 따르는 적들을 계책을 써서 모두 끌어내고 이후에 역포위 전술로 일망타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