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 제77장. 백련교(白蓮敎) (5)
‘강하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칠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검기나 휘황찬란한 검강의 발현 없이도, 검집째 휘두르는 데도 쫓을 수 없는 검속과 충격의 수준을 여유롭게 조절한다.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여유는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내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가진 실력을 십분 드러내도 상대는 더 큰 수준을 보여줄 것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이 두 무승이 재차 행동에 나서는 길을 주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 무승은 여전히 검집 안에 들어가 있는 진도건의 군자검을 흘깃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검이 뽑힌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공격을 재시도하는 대신 힘겹게 입을 뗐다.
“……시주들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오?”
흉심을 품은 자라면 분명 검을 뽑았을 것이고 쿠초 왕국의 공주인 딜라파 후무라트를 바로 납치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살의는 드러내지 않은 채 그들을 밀어내고만 있으니 그 의도가 궁금해진 것이다.
진도건은 천서은을 흘끔 바라보았다.
천서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도 당장 생각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진도건이 잠시 생각하다가 무승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먼저 알려주고 싶진 않고. 제대로 알아맞힌다면 순순히 인정하겠소.”
“이해할 수 없군. 그분이 누군지 알고 나선단 말이오?”
“한 여인이 쫓기듯 도망치고, 당신들은 저 여인의 뒤를 쫓았소. 여인은 당신들을 거부했고 우리는 불의는 참지 못하는 편이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선 것이오.”
“그분은 여기 고창성에 거하시는 쿠초 왕국의 국왕이신 후무라트 전하의 공주마마시오. 우리는 가출하려는 공주마마를 모시고 돌아오라는 그분의 명을 받아 데리러 온 것이외다.”
진도건이 고개를 돌려 딜라파를 바라보았다.
힘들게 도망쳐 조금 흐트러진 행색이긴 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는 그래도 깨끗했고 검은 눈동자도 맑아서 고달픔에 찌든 듯한 느낌은 거의 없었다.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귀티가 꽤 어여쁜 용모와 어우러지니 확실히 이곳에 와서 본 다른 아낙네들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공주라는 건 거짓은 아니겠군.’
진도건이 다시 무승들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어도 무승들은 감히 기습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력행사가 확실히 된 것이다.
“왕명을 받들고 있다는 증거는?”
진도건의 물음에 무승들이 멈칫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주저함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보아 증거로 내세울 만한 상징물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여겼다.
“우린 백련사의 승려들이오. 그리고 백련교는 이 나라의 국교이지요. 빈승들이 공주께 해가 되는 일을 하거나 왕실에 해를 끼칠 거로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과대망상일 것이오. 왕실에 공주마마를 돌려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오.”
그들의 말처럼 그들이 백련교의 무승들이기에 공주를 데려오라는 식의 이야기가 없었을 거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도건은 고개를 저었다.
“백련교니까 믿을 수 없소.”
“그게 무슨 말이오?”
“미륵정토를 바라는 백련교가 천마를 신봉하는 마교와 결탁하였다는 사실이 강호에 팽배한 데 그런 위선적인 집단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진도건의 반문에 두 무승이 두 눈을 부릅뜨며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곧 안색이 굳어지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들을 했던 것일까?
“그럼 직접 왕실로 모시고 오실 수 있겠소?”
진도건은 그 물음을 조금 의아하게 느꼈다.
‘백련교를 모욕했으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일을 넘긴다?’
무승들의 달라진 태도에서 무슨 의도로 얘기하는 것인지 알 필요를 느꼈다.
“공주가 원한다면?”
진도건이 가정을 담아 답했다.
그러자 그 무승이 딜라파 공주를 향해 회골족의 언어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은 공주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더니 천서은을 붙잡고 안절부절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공주님의 안위가 중요하니 일단 우리는 물러나겠소. 내일 해가 뜨면 곧바로 공주님을 모시고 왕궁으로 오시오. 제때 온다면 전하께서 금전적인 보상을 내릴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하지만, 늦거나 나타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공주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 고창성에 있는 이상 백련교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시길 바라오.”
“통보라.”
진도건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무승이 경계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당신들의 모습. 여기선 눈에 띌 수밖에 없지. 특히 당신의 그 머리카락과 눈동자. 명심하시오. 백련교가 지켜보고 있소이다. 무생노모.”
무승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게되자 진도건이 몸을 돌려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냥 떠날 수는 없게 됐네.”
“그러게요.”
천서은이 수긍하다가 딜라파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뭔가 말하면서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천서은도 조금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백련교 땡중들이 뭐라 한 이후부터 더 불안해하는 거 같아요.”
“내일 해 뜨면 왕궁으로 데리고 오라는 말을 전했으니 그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게 아닐까?”
“그럴 거 같긴 한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봐야겠어요.”
진도건과 천서은은 딜라파를 데리고 하오문 안가로 돌아갔다.
진도건은 그곳으로 가면서 성내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오문 안가까지는 외진 길이었으니 감시의 눈길이 닿지는 않았으나 고창성 내부 전체적으로는 백련교도들이 감시망을 펴는 게 느껴진 것이었다.
끼익.
세 사람이 여는 문소리가 야심한 시각이라 더 시끄럽게 들렸다.
안효철과 빌게포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건과 백련교 무승끼리 충돌이 일어났던 잠깐 사이의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쉬이 눈치챌 수 있었지만, 또 충돌이 금방 끝나서 굳이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역시 자네들이 다투었구먼. 그런데 그 여인네는 누군가?”
중히 여길만한 충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딜라파와 함께 들어오자 경위를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방달은 어디 있습니까?”
“소인, 여기 있습니다.”
방달이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진도건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천서은을 돌아보는데 그녀 곁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어? 딜라파 공주가 왜?”
“이쪽 말을 할 줄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혹시 공주가 왜 왕궁에서 도망 나온 것인지, 아까 백련교도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한 번 물어 봐주세요. 아, 우리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도 같이요.”
“예?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천서은의 요청에 방달이 당황해하면서 딜라파를 보았다.
‘대체 여긴 어디지? 이 사람들은 또 누구고……. 나쁜 사람들이면……, 도망칠 수는 있을까?’
딜라파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얼떨결에 두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백련교 무승들도 순순히 돌아가게 만든 무공을 갖추고 있었으니 자기도 모르게 의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덩치가 큰 한족 노인은 둘째치고 노승을 보고선 내심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을 느꼈다.
백련교 승려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골족과도 생김새가 조금 다른 토번족의 용모를 하고 있었고 입고 있는 승복의 양식도 백련교와는 달랐다.
“빈승도 할 줄 안다오.”
방달이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빌게포첸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럼 물어봐 주세요.”
곧 빌게포첸과 방달은 같이 딜라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진도건과 천서은, 안효철에게도 중간중간 통역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다섯 사람은 곧 쿠초 왕국과 백련교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딜라파는 쿠초 왕국 후무라트 왕가의 공주였다.
국왕은 카디르 후무라트.
딜라파는 후무라트 국왕 슬하의 일남일녀 중 차녀였고 올해 18세의 꽃다운 나이였으니 일찍 혼처가 어디가 좋을지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였다.
그런데 오늘 백련교주이자 백련사 주지인 아스마 쿠마루가 후무라트 국왕에게 직접 혼담 얘기를 꺼낸 걸 그녀도 듣게 된 것이었다.
딜라파는 아스마 쿠마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 승려에게 시집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스마 쿠마루는 백련교주로서 막강한 권력을 음지에서 휘두르는 자였고 그가 강력하게 원하는 이상 후무라트 국왕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의 냉혹함이었다.
그녀로서는 야심한 시각을 틈타 왕궁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자 반항의 표현이었는데 나오자마자 들킨 셈이었으니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진도건과 백련교 무승들이 대치했을 때, 무승들이 그녀에게 남겼던 말은 지금 그녀를 지켜준 이 남녀가 내일 아침이 되면 당신을 왕궁으로 데려오게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빌게포첸과 방달을 통해 진도건과 천서은을 향해 자기를 바깥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중이었다.
“이거 공교롭게 됐군.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안효철이 진도건과 천서은을 보며 물었다.
“성 밖으로 빼내 줘도 한 나라의 공주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빼내 줄 거면 그 이후까지 책임지는 게 마땅한데 그런 걸 살펴줄 여유도 저희에겐 없고요. 그렇죠?”
천서은이 대답하면서 진도건을 보았다.
빌게포첸과 달리 방달은 고창성에서 사는 백성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옆에서 실시간으로 딜라파에게 조용히 통역해주고 있었다.
천서은의 물음에 딜라파의 시선도 진도건에게 향했다.
뭔가 간절한 듯한 그녀의 눈빛에 진도건도 잠시 그녀를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천서은에게 눈길을 돌리는데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사나워졌음이 느껴졌다.
‘이크…….’
진도건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딜라파를 너무 오래 바라본 것이었다.
천서은은 딜라파와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 감정 변화를 살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도건을 향해 보내는 시선의 따스함이나 감정이 담긴 기대감이 마음에 있음을 쉽게 눈치채고 있었다.
“당연하지. 우린 더 중요한 일이 있는걸.”
진도건이 서둘러 대답했다.
방달이 통역해주니 딜라파의 눈빛에 실망감이 스쳤다.
천서은은 당연히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의 처지가 안쓰러운 것과 그녀의 마음이 내 남자에게 닿는 건 별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도건이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아무래도 여기 위치를 들킨 거 같습니다.”
안효철의 물음에 진도건이 대답했다. 그러나 안효철은 진도건의 말을 듣고 나서도 크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백련교도들 움직임이 있는 건 느껴지긴 하는데 그들이 이곳을 주시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네만.”
“한 사람만이 이쪽을 주시하면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는 눈치긴 한데 행동이 조금 의심스럽군요.”
“그래?”
안효철은 옥문관 전투 이후로 진도건의 감각이 무섭도록 날카로워졌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구마진이 가졌던 혈마로서의 힘을 삼켰기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
이젠 마기에 대한 기척뿐만 아니라 일반 내공으로 발산되는 기척에 대해서도 진도건은 기감만으로 훨씬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금방 오겠습니다.”
진도건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 서은이의 눈빛이 너무 매서웠어.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야.’
그것이 진도건의 진짜 속내였다.
당연히 그가 딜라파에게 마음을 가질 리는 없었다. 그러나 천서은과 몇 달 떨어졌다가 다시 함께 다니게 되어서 그런지 그녀에게 작은 강박 같은 게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진도건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원인 자체는 순전히 그에게 있었다.
진도건은 음지에 몸을 숨기면서 그의 감각에 걸려든 한 사람을 찾아내었다.
중년의 승려.
삭발하지 않았으나 매우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승려였고 이전에 만난 무승들보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쌓은 것이 느껴졌으나 그렇다고 역시 경계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기준에선 그냥 오십소백(五十笑百)이었다.
‘잠깐 싸웠던 걸 멀리서 보았던 모양이군. 백련교도인 건 분명한데 혼자 오다니…….’
승려가 관심을 기우는 방향은 분명 안가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혼자인 것은 의아한 부분.
안가의 대략적인 지점을 눈치챘고 딜라파 공주를 되찾으려 한다면 응당 집단을 동원해서 주변을 포위 수색하면 찾는 건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기웃거리고 있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
진도건이 그 승려의 뒤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검집에 꽂힌 군자검으로 승려의 등 한가운데를 꾹 툴렀다.
“나를 찾고 있군.”
승려는 등에서 느껴진 감촉과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순식간에 등 뒤를 점유 당할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는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소승은…… 백련사의 위소규라고 합니다. 긴히 논의드릴 게 있습니다. 소승에게 잠시 시간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침착하게 용건을 이야기하는 위소규의 뒤통수를 보면서 진도건의 눈이 달빛에 붉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