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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409화 (409/432)

409화 - 제77장. 백련교(白蓮敎) (4)

“그런데…….”

“응?”

천서은이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이런 얘기들, 혈마도 다 듣고 있겠죠?”

“……조용히 해준다고는 했는데. 아마 듣고 있겠지.”

“확실히 우리가 얘기할 때 당신 말이 끊어지는 법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괜히 생각이라도 나면 좀 민망해서 말이죠.”

“하하하…….”

진도건도 괜히 민망해져서 웃어버렸다.

사실 천서은과 대화를 나누고 입을 맞추고 꼭 끌어안을 때도 지나고 나면 혈마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었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또 괜시리 민망한 기분이 조금 들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혈마가 그렇게 훼방을 놓는 일이 없다는 것 자체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가 이상한 말이라도 떠들고 또 설쳐댔다면 천서은과의 관계를 계속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통의 인간 영혼이 아니니까 그래도 별 감정 없이 잠자코 있었던 건데. 네 여자가 날 깨운 거야.”

이런 자리에서 혈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 것도 처음이라 진도건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떨림을 느낀 천서은이 놀라서 진도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 혈마가 얘기했어요?”

“응. ……당신이 깨웠데.”

“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직접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그때였다.

붉은 운무가 진도건과 천서은을 중심으로 일어나 맴돌기 시작했다.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으나 마기가 가져다주는 꺼림칙한 기분엔 조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운무가 한데 모이면서 구름처럼 뭉게뭉게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붕의 경사를 따라 그들 발아래로 새빨갛게 물든 진도건의 모습을 한 혈마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혈마?”

혈마가 눈 위에 누운 채로 두 다리는 꼬고 두 손은 뒤통수를 받친 채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인간 여자에게 별 느낌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내가 저놈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꽤 뜨겁게 놀더라고? 무슨 자신감인지. ……아니, 그게 오히려 짜릿함을 주는 뭔가가 있었나? 큭큭큭!”

혈마가 내뱉은 말에 천서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말 그랬어?’

진도건은 하마터면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무심코 떠오른 질문이었으나 해서는 큰일 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 생각을 바로 지울 수 있도록 혈마가 그에게 말을 던졌다.

“넌 쟤가 이쁘냐?”

“당연한 소릴.”

“크크! 저런 여자 얼굴이 이쁜 얼굴인가 보지?”

혈마가 실소를 흘리면서 묻는데 천서은은 그게 비아냥 같은 도발처럼 들렸다.

“그러고 보고 있으면 사람이 거꾸로 보이는데 뭐든 제대로 보이겠어요?”

천서은이 심통 난 얼굴로 말했다.

짝!

그녀의 논리적인 지적에 혈마가 뒤통수에 대고 깎지 꼈던 손을 풀어 손뼉을 쳤다.

“아하! 그렇겠군.”

혈마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비스듬히 엎드린 듯한 자세로 두 사람을, 천서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진도건의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혈마의 시선에 천서은인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눈을 어설프게 뜨면 섬뜩한 붉은 귀신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가도 진도건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뭔가 정감이 가는 감정까지 굴곡진 내리막을 눈썰매 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 혈마의 얼굴에 기묘한 웃음이 다시 걸렸다.

“역시 모르겠는걸?”

천서은이 옆으로 팔을 뻗어 손을 펼치자 아래 쌓여 있던 눈들이 그녀의 손안에 동그랗게 뭉쳐졌다.

그걸 냅다 혈마의 얼굴에다 던졌다.

퍽!

기운으로 형상화했으니 물리적 저항력도 가졌다. 날아간 눈뭉치가 혈마의 얼굴을 때리며 터졌다.

“푸흐흐!”

“후후후!”

같은 얼굴을 한 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천서은이 진도건의 품 안에서 그와 혈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곤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은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걱정하지 말라고. 나도 느낄 수 있으니까. 여기서의 내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말이야.”

“영역의 경계도 아니고 환도마종의 환진 안도 아닌데 어떻게 바깥에 머물 수 있게 된 거지? ……구마진 안의 혈마를 삼켰기 때문인가?”

“그것보다는 마하발리가 뭔가 했기 때문으로 생각해. 구마진에게서 풀로만의 팔이 형체로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이치일 거 같은데. 뭐, 알 바냐? 나야 더 자유롭고 좋아.”

“그러고 보니 묻질 않았네. 구마진의 마성을 삼킨 건 어때?”

“원래 하나였던 게 둘로 나뉘었던 게 아니었으니. 뭐 기분이나 의식의 흐름이 달라지거나 하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내 영적인……. 음, 뭐랄까? 너희가 얘기하는 어떤 자존심? 자존감? 그런 측면에서 엄청난 고양감을 느끼는 중이다. 힘이 강해진 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신격에 가까워져 가는 것인가?”

“신격?”

“응. 나바스도, 알리 라 다바스도 혈마를 원하고 있어. 목적은 조금 다른 거 같지만. 두 신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진도건이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천서은이 고개를 돌려 혈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 편이 되고 싶어 하는 표정은 아닌데요?”

“후후후후!”

혈마가 웃음을 흘렸다.

더 말을 잇진 않았으나 진도건도 이젠 어느 정도 혈마의 의중을 읽고 있었다.

그들이 탄 배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물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 물길은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하나의 물길은 진도건에게 있어서 모든 예속된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인간으로서 가질 일반의 자유로 여겨질 바다로 내려갈 것이고.

다른 하나의 물길은 혈마에게 있어서 어디로 물꼬를 틀 것인지 선택권을 묻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도건과 혈마가 서로에게 공감하고 있는 운명의 끝자락이었다.

“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흐음. 그래도 당신이 도건의 모습을 하는 이상, 좋은 일이 있길 바라고 있어요.”

“내가 저놈을 죽일 뻔했는데도? 화산에서 널 찌른 건 따지고 보면 난데.”

“이제 와 따지기엔 우리가 겪은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고작 1년 사이에 말이에요. 그리고 도건을 살린 적도 있었고. 마음씨 넓은 내가 이해해 줘야죠.”

“……큭큭큭! 시원스럽군. 멋진 여자야.”

“어머, 그거 칭찬이에요?”

“난 이만 사라져줘야겠군. 정말 신격이 생기는지 앞날이 조금 보이는 거 같아. 도움이 필요한 여자 때문에 네놈은 또 한 번 네 여자에게 혼나게 될 거야. 이제 곧 말이야.”

혈마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꺼지듯 모습을 감추자 진도건과 천서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혈마가 남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되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전각의 지붕 아래 조금 떨어진 골목 사이로 검은 장막으로 자신을 가린 한 사람이 대단히 불안정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보았으면 그냥 관찰로 그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백련사 승려 몇 명이 그 사람을 추적하는 듯한 움직임을 발견하게 된 순간, 두 사람은 관찰만 하고 있을 순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백련교가 천마신교나 다를 바 없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는 마당이었으니.

“도와야겠어요.”

“그래.”

천서은의 말에 진도건이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일어나서는 옆에 설 수 있도록 품에서 내려주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당장 혈마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도울지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진도건과 혈마만큼이나 일심동체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깊이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팟!

작은 소음이 전각 지붕에 머물렀고 두 사람의 신형이 이내 어둠 속에 사라졌다.

미처 치우지 않은 지붕 위 짚단에 다시금 눈발이 묻어 쌓이기 시작했다.

딜라파는 두 다리가 눈에 젖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지자 얼굴에 낭패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폭설은 멈춘 지 하루 정도 되었다.

왕궁 앞이나 저잣거리 중심로, 대로변 등은 눈을 꾸준히 쓸었기 때문에 조금씩 흩날리는 눈발로 쌓인 높이는 고작 발등을 덮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가 숨어든 외진 골목 사이로는 눈을 치우지 않아서 그 높이가 무릎을 넘을 정도였다.

그런 자리를 계속해서 걸었으니 당연히 두 다리는 젖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걸어온 길을 따라 흔적이 뚜렷하게 남게 된 것이었다.

백련사 무승들의 추적은 그래서 여유로웠다.

이만한 흔적을 뒤쫓는 건 특별한 추적 능력이 없어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유가 있을수록 딜라파는 점점 두려움에 휩싸였다.

“공주마마, 후무라트 전하께서 걱정하시니 이만 돌아오십시오.”

‘푸흐흐흐……!’

백련사 무승의 목소리는 꽤 조심스러웠고 어투는 정중했으나 딜라파의 귀엔 불쾌한 웃음 소리가 환청으로써 들려왔다.

오싹!

딜라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밭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옷가지가 많이 젖어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목 그림자 아래로 무승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공포가 극대화된 것이다.

“주지께서 안전하게 모셔 오라…….”

“싫어요!”

딜라파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전하께서도 당부를…….”

파파파파…….

딜라파는 무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

두 팔을 열심히 앞뒤로 흔들고 두 무릎을 높이 들면서 눈밭을 헤쳐 나아갔다.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필사적이었다.

“어쩔 수 없군.”

“소승들을 용서하십시오.”

그 목소리를 딜라파도 들었다.

파팟!

뒤에서 들려온 주변 눈발이 흩어지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 무승의 기척이 엄습해옴을 느끼면서 승복이 펄럭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꺄악!”

딜라파가 비명을 지르며 웅크렸다. 그리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떠는데 그녀를 붙잡는 손길 대신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너, 너흰 누구냐?”

“고용된 낭인.”

“뭣?”

그 소리에 딜라파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와는 달리 눈처럼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모두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그 아름다운 여인이 속삭였다.

딜라파는 여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어인 건 알았지만, 그녀의 지식이 짧아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여인의 눈빛에선 수상한 의도보단 호의가 먼저 느껴졌음만 인지한 상황이었다.

딜라파는 잠깐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군!”

그 모습을 보았는지 한 무승이 소리쳤다.

그들은 한어를 할 줄 알았다.

딜라파와 같은 회골족이었지만, 어째선지 한어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발음이나 억양도 꽤 적확했다.

천서은이 딜라파를 부축하듯 안아서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딜라파의 몸을 돌려 무승쪽으로 바라보게 하니 그녀도 볼 수 있었다.

딜라파와 무승들 사이에 한 남자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있었는데 잠깐 고개를 돌려서 그녀들 쪽을 힐끔 바라보다가 딜라파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딜라파는 아주 잠깐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봤잖아요. 이분이 끄덕거리면서 방금 우릴 고용하신걸. 그러니 거짓말이 아니죠.”

천서은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헛소리! 당장 물러나라! 빈승의 자비를 원한다면…….”

무승이 위협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들 앞을 가로막은 남자가 품에서 긴 막대를 꺼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검이었다.

검집에서 뽑지 않았을 뿐.

“지금 너흴 벨 생각은 없다. 조용히 물러가면 얻어맞을 일도 없을 거다.”

진도건이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무승들은 백련사 내에서도 꽤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공주를 안전하게 보위하여 데려와야 하니 말단 제자를 보내지 않은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진도건의 무공 수준을 가늠할 눈은 없었다.

천서은도 용모가 눈길을 끌었을 뿐,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혹은 무공이 어떤 수준인지 가늠할 생각조차 못 했다.

“건방진 것!”

“벌을 내려주마!”

무승들이 일제히 진도건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달려들 듯하다가도 좁은 골목임을 감안하여 한 사람이 담벼락을 박차고 뛰어오르면서 위아래를 동시에 덮쳐왔다.

‘흐음.’

그들은 진도건의 실력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진도건은 상대의 수준을 처음 보자마자 간파했다.

마공의 측면에선 마기가 설익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색은 오히려 정파무림의 그것과 비슷했다. 무공 수준도 화산 사과에 은둔했을 때 첫만남을 가졌던 영은성의 당시 수준에 비하면 근소 아래였다.

일반적인 시각에선 나쁘지 않은 수준이나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다.

타탁!

진도건이 한발 물러서면서 군자검을 검집째 휘두르자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아래에선 일권을 뻗던 팔의 손목을, 위로는 돌려차는 다리의 오금을 정확하게 때렸다.

뼈를 부러뜨릴 정도는 아닌 대신 충분히 시큰함을 느낄 만한 충격을 가했다.

“큿!”

무승들이 잠깐 움찔했다.

연속된 공격을 펼치기도 전에 첫수에서 반응하지 못할 틈을 노려 반격을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견딜 수 있는 충격이라면 일단은 계속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두 무승이 일제히 진도건에게 신속히 몸을 붙이면서 두 주먹을 뻗었다.

파팟! 팟! 파파팟!

세 사람의 두 팔이 빠르게 얽혔다.

무승들은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실력을 알아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세 합도 넘지 못한 채 진도건이 군자검을 가로로 하여 둘을 동시에 밀어내고 있었다.

터엉!

“엇?”

검자루와 검집 끝에서 동시에 묵직한 기운이 터지며 두 무승의 몸을 뒤로 밀었다.

진도건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밀려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둘 사이로 따라붙으면서 검자루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박! 빡! 빵!

“으윽!”

“큭!”

반응할 새도 없었다.

단단한 검집이 두 사람의 팔다리와 머리를 두들기니 얻어맞고 난 후의 그들은 쉽게 두 발로 서기 힘들 정도로 고통에 신음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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