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 제77장. 백련교(白蓮敎) (1)
“대사께선 오늘도 경전에서 손을 떼지 않으시군요.”
“그러려고 온 것이니 게을리해선 안 되지요.”
“……그러고 보면 일라파 선사께서 입적하시기 전엔 요새 젊은 제자들이 불경 공부엔 게을리하고 무공에만 심취해있는 거 같다는 걱정을 참 많이 하셨었는데 말이죠.”
“흐음…….”
위소규(韋小規)는 소이첸의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경각의 책장이나 탁자, 마루바닥 등은 몇백여 년의 시간 동안 여러 승려의 손때가 묻어서 반질반질했었지만, 최근엔 일이십 년 동안은 발길이 뜸해지면서 먼지가 많이 쌓였다. 그래도 위소규나 소이첸을 비롯한 소수의 승려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리들은 먼지 쌓일 일이 없었으니 고목가구가 주는 고풍이 느껴졌다.
“시키신 일에 대한 확인이 끝났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짐작하신 바가 맞는 듯합니다. 무영각의 대대적인 호출들이 있었는지 은무영(隱無影), 양무영(陽無影) 가릴 것 없이 모두 종적을 감춘 지 벌써 보름이 가까워졌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보니 그들과 통했던 반첩(反諜)들이 무척 혼란해하는 상황입니다.”
“신교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무림과의 전쟁이 잘 안 풀리는 모양입니다. 사천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듯하고 기련산맥 북단으로 전선이 펼쳐졌었는데 그마저도 계속해서 밀렸던 모양입니다. 마교주가 직접 옥문관에 진을 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결과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력이라는 게 기세가 한 번 크게 꺾였던 광혈마종과 신규 조직으로 편입된 혈마종이라고 하니 정사가 연합한 무림 측에 비해선 약세라…… 곧 거기에 대한 소문이 여기에도 날아오겠지만, ……논객들 사이에선 부정적인 예측이 많습니다.”
“마교주의 무력이 절대적인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요?”
“태상교주가 자기 아들을 돕지 않고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련사가 있는 고창성은 지리적으로 천마신교의 궁궐이 있는 오로목제와 매우 가까운 데 반해 옥문관, 더 나아가서 중원과의 거리감은 무척 멀다고 할 수 있었다. 지역적인 인접성도 없을뿐더러 비단길을 다니는 상인들 외엔 사실상 교류가 드문 편이었으니 소식의 질이나 속도 면에서 오로목제 쪽에서 들려오는 것보다 많이 느리고 부족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소이첸의 이야기는 천마신교 기준으로는 부정적인 전망을 많이 내비치고 있었다.
어떤 사안이든지 함부로 단정 짓는 걸 상시 경계하는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본다면 분명 무림의 정세는 특정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좋지 않군요.”
위소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자 소이첸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그 몸짓이 작고 조심스러웠다.
위소규가 읽고 있던 경전을 덮고 탁자 모서리 쪽으로 가지런히 밀어두었다.
“주지께 보고하시려고요? 단 이틀이라도 늦추는 것이…….”
“다른 쪽으로도 보고를 들으실 겁니다. 시간을 끈다는 인상을 주면…… 아시지요?”
“후우, 알겠습니다.”
“허허허…….”
위소규가 조용히 한숨을 쉬는 소이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격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장경각을 나서는 위소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이첸의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 백련사(白蓮寺)에서 가장 격려받아야 할 사람은 위소규, 당신이 아닙니까? 무생노모……!’
위소규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소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한 편이었다.
경건한 태도를 갖춰야 하는 사찰 내 생활이 익숙해진 탓이기도 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 고창성의 백련사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아니, 지금의 처신을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서역의 백련교가 중원의 백련교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겠거니 하여 서역의 문물을 경험하고 그들 관점에서 기술한 경전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전 공부보다 서역과 중원의 무림 정세를 파악하고 조언하는 위치에서 일하고 있었다.
위소규가 소이첸과 헤어진 후, 곧장 주지가 거하는 방장실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발길이 방장실 앞에 이르자 두 명의 호법대사가 합장하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백련사의 규율을 수호해야 할 호법들이 방장실 앞에 꼭 붙어있는 모습은 마치 개인 호위무사 같은 인상이라 보기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소규는 그 점을 지적할 수 없었다.
“주지께 일러주시구려.”
“지금 성법(聖法)을 행하시는 중이셔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 계시면 저희가 알려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도 위소규의 표정은 변화 한 점 없었으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기다리란 말보다 ‘성법’이 주는 불쾌감 때문이었다.
“기다리시던 신교의 소식이니 늦게 보고했다고 꾸짖으실까 두렵습니다. 말씀이라도 전해주시오. 주지께서 직접 돌아가 기다리라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소이다.”
“흐음, 알겠습니다.”
왼쪽의 호법이 수긍하면서 방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 위소규의 눈동자에 비쳤다.
방장실의 전각은 백련사 대웅전만큼이나 컸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주지가 방장실을 차지한 이후로 증축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이 보였지만, 그 뒤로도 세 개의 문이 더 있었다.
효율적인 면도 없었고 종교적 예법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정도 관문은 넘어야만 백련사 주지와 면담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의 번거로움을 방문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도 있었는데 안쪽의 소리를 바깥쪽이 듣지 못하게 함이었다.
호법에게 다행인 것은 주지의 성법이 행해지는 날엔 두 개의 문만 열어 바깥에서 고하면 된다는 규율이 있다는 점이었다.
“위소규 대사께서 천마신교의 소식을 정리하여 가져왔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까지 열리고 호법이 목소리 높여 고했다.
잠깐 침묵이 이어진 듯했으나 위소규의 귀는 아주 작게 흘러나오는 소음을 감지했다.
“들어오시라 하거라!”
내공을 실은 주지의 외침이 방음이 뛰어난 사중문을 뚫고 들려왔다.
호법이 제자리로 물러나면서 안쪽을 향해 손짓했고 위소규는 계단을 올라가서 신을 벗고 방장실 마루에 발을 올렸다.
한겨울 사찰의 경내는 무척 추웠다.
마루에 닿은 발바닥으로 날카로운 냉기가 스몄고 벗어놓은 신발에 눈발이 묻어 금방 묻혀가는 모습이 두 발 사이로 보였다.
방장실 입구의 문틀을 넘자마자 느껴지는 온기가 반가울 법도 했지만, 위소규는 불쾌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세 번째 문 앞에 설 때부터 선명하게 들려오는 교성 때문이었다.
드르륵…….
두 번째 문을 닫고 세 번째 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몇 명일까?’
공기는 후끈했고 교성도 짙어졌다.
드르륵…….
세 번째 문을 닫고 네 번째 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저 안에 있는 여인들 가운데 자기 의지로, 자기 발로 온 여인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후텁지근한 공기가 서서히 숨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에도 열감으로 인해 홍조가 맴돌기 시작했다.
네 번째 문을 닫은 후, 문고리 앞에서 잠깐 멈춘 위소규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한 호흡 잠시 쉬고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무거운 문을 천천히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드르르륵……!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공간.
천장의 서까래 사이와 위로 띄워놓은 구조의 지붕을 통해 소리가 맴돌고 바깥과 공기가 통하도록 만들어 놓은 불전.
문이 열리면서 생긴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흔들거리는 촛불의 붉은 광휘가 내부를 비춘다.
무생노모상이 얼굴 주름 사이로 드러낸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위소규를 쏘아본다.
대웅전과 같은 무생노모상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무생노모상은 어쩐지 더 분노에 가득 찬 모습처럼 느껴진다.
위소규는 그것이 그녀의 발아래 펼쳐진 광란의 색정향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백련교.
정확히는 서역 백련사 주지 대라마 아스마 쿠마루는 구척에 가까운 키와 그에 어울리는 큰 체격을 가진 40대 나이의 젊은 스님이었다. 그런 거구가 땀에 흠뻑 젖은 나신의 두 여인을 깔아뭉개듯 덮친 채 허리를 흔드는 모습은 그 자체로 위압감이 있었다.
‘……여섯이나…….’
성욕을 풀어내는 대상은 아스마에게 깔린 두 명만 있지 않았다.
둘은 완전히 기절한 듯한 모습으로 방석들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한 여인은 위소규의 등장에 부끄러워하면서 가까이 있던 승포로 중요 부위를 가리며 움츠렸다. 한 여인은 아스마의 거구에 몸을 가까이 붙이면서 등을 혀로 핥고 있는데 그녀의 허리에 감긴 아스마의 팔과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볼 때 그 행위가 자의적인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연령대도 제각각이었는데 십 대의 어린 소녀도 있었고 사십 대의 아낙네도 있었다. 공통점은 다들 얼굴의 용모나 몸매가 겉보기에 무척 괜찮다는 점이었다.
흘겨본 것만으로도 고간에 피가 쏠리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아앙……, 아앙……!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교성에 위소규는 두 볼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촛불의 붉은 광망이 그의 얼굴색을 가려주는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 후우……! 신교의 소식을 가져왔다고? 학……! 어서 말해보게.”
“예. 아무래도 기대하신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 확정적인 소식은 도착하지 않았으나 천마신교 내에선 태상교주를 중심으로 이반된 움직임이 존재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옥문관 전투는 그런 영향으로 인해 교주의 강력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창천맹 측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전망하는 이야기들이 많은 듯합니다. 무영각의 전원 호출로 그들이 부리는 그림자들이 대거 사라진 점도 주목할 만한…….”
위소규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아스마의 엉덩이가 깊이 들어가면서 동시에 격하게 움직이던 한쪽 손도 함께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흐흑……!
꺄흑……!
“크으윽!”
아스마와 두 여인이 동시에 신음을 토해냈다.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 결과로 두 여인이 사지에 힘이 풀린 채 엎어졌다. 아스마 쿠마루는 엉덩방아를 찧듯 고간을 벌린 채 앉으면서 옆에 달라붙은 채 등을 핥던 여인을 손으로 밀었다.
꽈당!
“아윽!”
넘어진 여인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과 함께 둔부와 허리를 손으로 문질렀지만, 감히 아스마에게 화를 내는 등의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구석으로 기어가면서 방석을 끌어안고 몸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크크크……. 드디어 말세(末世)가 끝나려는가 보오, 위 대사!”
“옥문관 전투에서 정말 단 교주가 패배한다면 구주마종이 모두 무너졌다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생사를 알 수 없었던 환도신마 선우도도 지금으로선 전사했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니까요.”
“난 말세가 끝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기다리시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아스마 쿠마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위 대사, 고맙소. 대사의 신중함이 내 불같은 성미를 잘 눌러주었으니 이렇게 시운이 오는가 보오! 아니, 대사의 조언을 듣기로 결정한 내 선택이 탁월했던 것인가?”
“오늘이 있을 것이라 보았던 주지의 선견지명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크흐흐흐!”
위소규가 그를 띄워주자 아스마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아스마는 무생노모상 아래 금쟁반에 담긴 물에 수건을 적셔서 짜낸 후에 땀에 젖은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그들은 삭발하는 규율이 없었으나 짧게 잘라서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곱슬머리의 짧은 머리카락이 모두 땀에 젖어 있었는데 다시 물수건으로 닦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위소규도 새삼 자기 머리카락 사이에 땀이 한가득 차 있는 걸 다시 느꼈다.
아스마가 물수건으로 고간 사이까지 닦아내고는 아무렇게나 휙 던지자 기절해있던 여인에게 날아가 머리를 덮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스마가 실소를 흘렸고 위소규는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는 땀을 승포 소매로 닦았다가 팔을 올린 김에 머리 전체를 한 번 쓸어넘겼다.
그도 원래 민머리를 유지했었으나 십여 년 전부터는 삭발을 그만두고 짧게 관리하는 것으로 규율을 맞춰주고 있었다.
“자! 그럼…….”
아스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승포를 주섬주섬 입고 시작했다.
“어디 후무라트 왕을 알현하러 가보실까?”
“왕에겐 무슨 연유로……?”
위소규가 물으면서도 그의 발아래 나신의 여인네들을 보면서 걱정이 스쳤다.
“일전에 대사가 내게 얘기했었지. 백련교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된다면 교세가 번성할 기회를 잡게 된다고 말이야. 대사의 말씀을 따른 덕분에 우리 교세가 제법 커지긴 했지. 한때 천마신교조차 구주마종 중 하나로 편입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을 만큼.”
“……그랬었지요. 그들도 이 왕국의 행정력을 지원받을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편입되는 대신에 개별 교세를 지키면서 조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긴 했지만.”
“아아, 만족스러운 결과였지. 이 아스마가 그 새파랗게 어린놈의 밑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거든. 그래서 내 고민해봤소. 백련교가 백련신교(白蓮神敎)가 될 기회를 잡는다면…… 아예 후무라트 왕가와 핏줄로 맺어지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아하하하!”
위소규의 눈동자에 야심에 가득 차 웃음을 터뜨리는 아스마 쿠마루의 얼굴이 비쳤다.
그 위험천만한 의지를 느낀 위소규의 동공이 잠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