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05화 (405/432)

405화 - 제76장. 두 개의 모임(會) (5)

“염황신마와 염황종을 지원하라고 보냈으나 임무는 실패. 선우도가 탈혼갑의 전 주인을 엮어와서 마령검의 주인과 만나게 하였으니 마갑을 취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 주인의 목숨을 끊는 건 실패. 내 전장에 그놈이 사지 멀쩡히 나타났으니 말이야.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우도와 함께 마니사 마구니들도 다 죽여버렸는데 스칸다는 그것을 방관했다. 야마는 마니사가 무너진 꼴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묵인…….”

“나쁘지 않은 추측이야.”

단원진의 대꾸가 비아냥처럼 들려온다.

“아버지.”

“그래.”

“책임을 지셔야겠습니다.”

“책임?”

“천마신교의 기강을 이리도 무너뜨려 놓으셨으니 응당 책임을 지셔야지요.”

“그래서 널 이리로 불러들인 것이다. ……책임을 지기 위해.”

단원진이 몸을 돌렸다.

아들에게 등을 보인 채 연단 쪽으로 뚜벅뚜벅 몇 걸음 걷다가 비스듬히 돌아서서 다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식 녀석이 부하들 장악에 실패하고 구주마종을 비롯한 주축 세력을 모조리 잃어버렸으니 태상교주로서 책임을 지고 자식 녀석의 교주위를 박탈한 후, 다시 천마신교의 위상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않겠느냐?”

“크크크! 어찌 이리 볼품없어지셨습니까?”

“으음?”

“강자존(强者尊). 천마령만큼이나 중요한 천마신교의 최우선 가치 속에서 제게 도전하여 자리를 다시 빼앗아 보기엔 아들놈이 너무 강해 두려웠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구주마종이 모두 무너지길 기다리면서 제 세력과 힘이 약화하길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자리를 되찾으면 언제든 구주마종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신마들로부터 마정을 입수해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나이 먹고서 이 얼마나 추레한 모습입니까? 푸흐흐흐!”

“음…….”

단지운은 자신의 아버지를 마음껏 비웃었다.

천산에 은거했던 단원진이 다시 세상에 나와 마주치면서 보여왔던 모습과 내뱉었던 말들의 진짜 의도와 목적이 이렇게 드러났다고 생각하니 우스운 것이다.

투둑!

단지운이 두 발이 있던 자리가 아래로 푹 꺼졌다.

자제해왔던 투기를 드러내는 순간, 광장 안 모든 생명체는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를 꺾어 다시 천마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단지운이 가감 없이 말을 던졌다.

그것은 최소한의 선언을 요구하는 부친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 할 수 있었다.

몸 상태는 매우 좋았다.

옥문관에서의 마지막 싸움에서 선천진기를 조금 소진했을 뿐이지 심각한 내상을 입은 건 아니었기에 이미 천마신궁에서 마귀성에 도착하는 그사이, 내공은 구 할 가까이 회복되어 있었다.

누구도 두렵지 않을 만전의 상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자부하는 자의 패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끌끌! 여전히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단지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아버지도 아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는 그런 표정이 얼굴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원진의 신형이 다시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왼팔을 들어 손을 펼치자 순간 환영진이 펼쳐지며 광장 안을 감쌌다.

“애써 건설한 마귀성을 부수게 놔둘 수는 없고.”

천산 용암비동에서 주백자와 싸울 때 사용했던 시공간 왜곡의 기문진이었다.

마경경월진(魔境鏡月陣)의 술.

역천마제 단원진의 독문 환도술이다.

허공에 떠오른 단원진의 신형이 연단 위를 향하자 단지운이 노한 얼굴로 소리친다.

“싸움을 피하지 마라!”

단원진이 연단 위로 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임과 동시에 양자성과 스칸다, 야마가 동시에 마경경월진 안으로 들어오니 당연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세 사람에게 싸움을 대신 맡기는 모양새였으니까.

그런 자를 태상교주로서, 아버지로서 존중할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던 단지운의 외침엔 존대도 당연히 없었다.

단원진의 신형이 공중에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비스듬히 몸이 돌아가선 좌측 얼굴만을 보이며 단지운을 내리깔아보았다.

“이런저런 추측들을 늘어놓았으나 여전히 넌 아무것도 모른다. 싸움을 피하지 말라고? 후후! 고작 자리를 걸고 다투는 대결 따위를 생각했더냐?”

“뭐?”

단원진이 단지운에게서 반대편에 있던 오른손으로 연단을 가리켰다.

“무엇이 보이느냐? 연단? 용상? 새로운 아니면 모방한 파순대좌?”

단원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것은 제단이니라. 의식을 행하는 제단.”

“의식……이라고?”

“내게서 태어난 핏덩이여, 너로서의 쓰임은 여기까지이니…… 아버지로서 널 거두어 가겠노라.”

단원진이 마치 주문처럼 외는 그 말을 들은 단지운의 눈빛이 떨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영혼 깊이 엄습해옴을 느낀다.

예측할 수 없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

단지운이 본능적으로 천마신공을 일으키면서 사방에 칠흑의 마기를 발산했다.

강대한 힘이 떨쳐내는 위세에 격리된 공간 자체가 격렬하게 떨어댔다. 그의 힘은 절대적인 면모가 있었고 대단히 파괴적이었지만, 주백자의 태극혜검 상청검과 같은 우주적 영험함을 갖추진 못하였다.

그 차이는 마경경월진의 파훼를 끌어내지 못했다.

“오늘의 그들은 네가 아는 양자성과 스칸다, 야마가 아니다. 또 네 힘을 적당히 빠지기만 해도 내겐 충분하니. 아들아, 별수 없음을 인정하고 순순히 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단지운에게 맞서서 자기들의 기운을 방출하며 다가오는 양자성과 스칸다, 야마는 과연 단원진의 말처럼 분명 뭔가 크게 달라진 듯한 특별한 기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나서는 그들을 향한 단지운의 분노는 매우 격렬하게 타올랐다.

“……좋아. 모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 * * *

정파의 2차 집결 움직임 자체는 늦어졌어도 개방과 하오문은 협력을 멈추지 않고 정보력을 새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진행되면서 그 실적을 누적해오고 있었다.

청해에선 중천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왔고 주태소가 이끄는 녹림단이 사천에서 서장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를 탐색하는 역할을 돕기도 했다.

2차 집결이 늦어지기에 제갈무문이 선제적으로 단행한 결단이었기에 거둘 수 있는 성과였다.

특히 좋았던 건 개방 장로를 보내 포달랍궁의 역할을 끌어낸 것이었다.

천마신교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그들을 일깨워 서장에서의 불교 교세를 다시 확장시키도록 주문한 것이었다. 이는 시운이 따르기도 했는데 천마신교 무영각이 각지에 퍼진 무영들을 불러들이는 바람에 각지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교단원들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애초에 서장의 토번인들의 마음속엔 성지 포달랍궁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고립되어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교단원들로선 사냥하기 좋은 표적으로써 알아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그런 노력과 성과들이 회의 중에 부각되면서 앞으로 어떻게 전력을 운용할지에 대한 향방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갈무문은 큰 틀에서 두 개 조로 전력을 나누기로 하였다.

천마신교 본거지를 타격할 최정예 결사대 백 명과 새외무림의 이른바 마도 분자의 색출과 숙청을 담당할 잔여 인원이었다.

새로 합류한 천오백 명의 정파무림인들과 달리 전쟁을 치른 천무방과 창천단 무림인들의 절대다수는 크고 작은 부상에 시름하고 있었다. 천마신교 본거지로 빠르게 내달려야 하는 시점에서 그런 부상들은 분명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과 새롭게 합류한 정파 무림인들을 모아서 지역의 평정 과제를 내리고자 한 것이었다.

마도를 뿌리째 뽑는 일.

천마신교가 저들 본거지 중심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새외무림 내 잔존하는 영향력을 지우는 절호의 기회였다.

천마신교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도 있었지만, 유의미한 규모의 잔당이 남게 되면 그들이 가진 힘을 통해 제2, 제3의 천마신교가 부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청해와 서장에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만큼 그 범위를 확대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천마신교의 멸망이었다.

거기에 모두는 승리를 꽤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를 전제했기에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었다.

첫째는 남은 적들의 마두(魔頭)들이 싸움을 피하지 않을 것.

둘째는 전력상 우위에 있다는 판단. 즉, 단지운이나 장막에 싸인 단원진의 무력이 단지운과 같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

마지막 셋째론 일부가 목도했던, 정확히는 진도건이 대면했던 천상의 천신들이 그들을 가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대감이 되어 은연중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신의 가호라니.

‘방심은 아니야. 잠깐 들떴던 거지. 어쩔 수 없기도 하고.’

경공을 펼치며 달리던 진도건은 쓴 생각을 삼켜서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승리의 확신이 있었으니 인원 선별은 일주일 동안 시간을 두고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강 오로목제에 잠복하고 있던 하오문으로부터 받아낸 동향보고는 계획한 편성을 이틀 만에 끝내도록 독촉해버렸다.

[……오로목제 북부사막 아단지모에 정체불명의 토성이 출현.

태상교주 동선과 겹침. 탐색 및 침투 불가. 접근 시 실종으로 이어짐.

이혁성 이하 황검당 오로목제에 도착.

오로목제 서쪽 요마산 천마신궁 습격

성혈교 추정 이십여 명과 함께 천마신궁으로부터 이탈 및 북쪽으로 이동.

해당 인원들 전원 사막 토성 침투 단행.

나흘째 무소식.

……실종 판단.]

회의가 시작된 이후 닷새 만에 결성된 백 명의 결사대.

진도건이 언덕에 이르러 뒤쪽을 힐끔 돌아보니 멀리서부터 말을 달리며 이동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주 작게 시야에 들어왔다.

“늦지 않게 올 거예요.”

천서은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겉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으나 진도건의 눈엔 눈빛이나 눈꼬리, 입꼬리 등에서 은근한 기쁨이 엿보이고 있었다.

다시 함께 움직일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을 반기고 있는 것이었다.

더 크게 내색할 수 없었던 건 두 사람 외에 다른 동행자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언덕 위에서 잠시 호흡을 돌리는 틈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토번어의 불호를 외는 빌게포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숨 돌렸으면 다시 갈까?”

마지막 한 사람은 철권왕 안효철이었다.

진도건 등과 호흡을 맞춰 움직인 적도 있었고 탈혼갑으로부터 해방 이후로 일신의 무공에 대한 평가가 상승하면서 천무경이 직접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조직된 네 사람은 다시 경공을 펼치면서 언덕 아래 경사로를 따라 달렸다.

십여 개의 사암 언덕 등마루를 넘으면 그 앞은 신강의 사막 평야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그들 네 사람은 이혁성과 황검당, 성혈교와 관련된 상황을 정밀 조사 및 대응하기 위해 백 명의 결사대 결성 이틀 전에 먼저 출발한 구성이었다.

백 명의 결사대에서 제외된 사람은 그들 외에도 일월신마 냉소평과 삼대수라 그리고 혈마종이었다. 그들은 또 다른 한 조가 되어서 진도건 일행보다 이틀 먼저 북쪽에 좀 더 치우친 북서쪽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먼저 따로 움직인 건 냉소평은 결전에 일월교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신강 지역의 평정을 위해선 쿠초 왕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던졌다.

혈마종 동행도 그 일환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진도건과 냉소평이 개인적 은원이 있었지만, 혈마종은 그 은원과는 무관했으니 일월교와 동행에 부담을 갖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은원을 고려하여 대신 일월교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겠다는 말을 진도건에게 남기기도 했다.

“날씨가 흐리군.”

달리던 중간에 안효철이 꿉꿉한 기분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드넓은 하늘을 구름이 모두 가리고 있어서 햇빛이 들지 않던 날이었는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먹구름이 돼가는 걸 보면서 더 거세지는 맞바람을 맞아가고 있었다.

얼마간 더 달리면서 작은 눈발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등마루의 정상에 올랐을 때, 그들은 다시 호흡을 고르면서 세찬 함박눈에 젖은 머리카락들을 털었다. 빌게포첸만 승포의 팔소매로 민머리를 문질러 닦았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군.”

정말 대단한 폭설이었다.

그들이 선 언덕에도 듬성듬성 제법 쌓인 상황이었지만, 언덕 아래 평야는 지나온 언덕 지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새하얀 설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언제부터 눈이 왔길래 저 정도로…….”

안효철이 불쾌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비나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탈혼갑을 걸치던 초기엔 피부와 완벽하게 밀착되지 않아서 그 사이로 수분이 스며들면 꿉꿉한 냄새와 불쾌한 감각들로 인해서 뜨거운 물이나 흐르는 강물 등에 반 시진은 씻어야 조금 개운해질 수 있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강은 눈이 갑자기 오기 시작하면 기세가 대단해서 한두 시진 만에 무릎 높이까지 쌓이곤 합니다.”

빌게포첸이 익숙하다는 듯 이야기하는데 안효철과는 달리 천서은은 두 손으로 추위에 발개진 볼을 감싸면서 감탄했다.

“아름다워요. 저 아래가 황량한 사막지대라는 생각은 전혀 안들 정도예요.”

“몽골초원 너머 북해(北海)라는 지역은 사시사철 눈 덮인 세상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의 풍경도 저렇지 않을까 싶네.”

진도건의 말을 들은 천서은이 볼을 감쌌던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후후! 생각이 거기까지 닿아요?”

“으음. 우리가 다시 만났던 몽골초원의 전장도 지금처럼 눈이 많이 쌓였으니까.”

“초지가 드러난 곳들이 제법 됐지만, 확실히 그랬죠.”

천서은도 그때의 전장을 상기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다 당시의 장면들이 연달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율재와의 격렬했던 대결 따위가 아니라 어느 설산의 숲속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때가 떠오른 것이었다.

진도건이 미소를 지으면서 잠깐 천서은을 바라보는데 문득 추위에 열꽃이 피었던 두 볼이 더 발그레 달아오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비쳤다. 그러자 진도건의 머릿속에도 그녀와 함께 나체로 눈밭을 뒹굴던 때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하! 이런…….’

진도건과 천서은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고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뭔 생각들을 하나?”

“아, 아닙니다.”

안효철의 물음이 들려오자 진도건이 바로 답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말이 조금 더듬어져 나온다.

안효철이 수염 밑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곤 어깨에 쌓인 눈을 손으로 탁탁 털면서 입을 열었다.

“계속 움직이세. 그래야 우리도 늦지 않게 고창성에 닿을 수 있을 것이야.”

“예.”

이혁성과 황검당의 행적이 오로목제에서 발견되기에 앞서 먼저 개방과 하오문의 시야에 들어왔던 곳.

바로 쿠초 왕국의 하도 토로번의 고창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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