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 제76장. 두 개의 모임(會) (4)
더구나 직접 두 발로 걷고 두 눈으로 보았던 곳.
사람의 발길이 드문 지역이니 어릴 적 기억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이상하다. 그리고 눈앞엔 그가 아는 마귀성은 없었다.
성(城)으로서 진정한 마귀성의 성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냐?”
“그렇습니다.”
단지운의 뒤에서 권영서가 대답했다.
“무영들이 모두…… 몇 명이었나?”
“양성하고 있던 인원들까지 포함하여 약 삼백여 명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무영각은 천마신교의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다룬다.
실력 있는 무영들은 구주신마나 주요 인사의 감시 목적으로 두 명씩 배정하여 파견해 있었고 나머지는 새외 각지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의 연결고리를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고아들을 추려 선발한 전체 이상의 과반 규모의 후진(後進)들이 무영각 전각 내부에서 취합된 정보들을 정리 및 가공한다.
그 운영의 전권은 무영각주 권영서에게 있었고 교주는 거기에 간섭하지 않는다.
충성 맹세에 따른 신임의 대가인 것이다.
“그들 전원의 목숨 대가가 이 성이란 말이냐?”
“‘창조’라는 과업엔 그만한 생명력이 대가로 필요하다는 것이 태상교주님의 설명이셨습니다. 그 외에도 700여 명 규모의 사막부족들이 함께 지불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지불? 크큭! 무림에 속한 자로서 살인과 죽음은 항상 곁에 둔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매우 참신하면서도 우습구나.”
단지운이 시야에 들어오는 성곽 전체를 스윽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입구는 어디에 있느냐?”
“저희가 왔음을 아셨을 테니 곧…….”
권영서는 말하길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지축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성곽이 흙먼지를 뿌리면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
아무것도 없었던 그저 토성 성벽 사이가 갈라지더니 문이 되어 그들 앞에 입구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막의 바람을 타고 면전으로 날아오자 단지운이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몸에 닿지 않도록 했다.
단지운은 굳은 표정으로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 아래를 지날 때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사람이나 어떤 기관으로 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꺾이는 부분까지 한 몸처럼 이어져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표면을 타고 뭔가가 흐르는 듯 물결치는 파장들이 그의 눈과 감각 안에 느껴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역시 성벽 너머에 있었다.
그가 기억하던 아단지모의 기암괴석들.
그 형상을 따라 전각들이 기괴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문이나 창의 형태도 기이한 곳에 있었고 구조도 비틀려 있었다. 세부적으로 볼만한 지점들은 뭉개진 채 성벽과 성문의 그것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건축 양식도 중원의 것이나 쿠쵸 왕국의 것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본 양식도 있었다.
단지운은 이 마귀성이 엄청난 규모로 세워졌음을 깨달았다.
그의 공간 인지가 그가 두 발로 선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전방을 깊숙이 탐색하는데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로처럼 얽혀있었으며 전각들도 희안한 각도나 방향으로 비틀려 있어서 시야를 혼란케 한다.
단지운이 손을 앞으로 살짝 뻗었다.
칠흑의 마기가 손아귀 안에서 일어나 구의 형태로 꿈틀대다가 이내 기다란 장검의 형상을 띤 검강이 발현되었다.
단지운이 그 검강을 사선으로 뿌렸다.
콰콰콰콰!
쿠구구궁……!
그 일격에 수많은 전각이 파괴되고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무너진 전각의 잔해들이 꿈틀댔다가 다시 제멋대로 뭉쳐지면서 전과는 다른 위치와 형태 그로 인해 또 다른 풍경이 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 순간 단지운의 두 눈에 검은 안광이 번뜩였다.
본질을 파악하는 눈.
‘환도술이 섞여 있군.’
하지만, 환도신마 선우도의 솜씨가 아님을 알았다. 이만한 규모는 그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천마성을 가진 자.
구주신마의 마정을 수집해온 자.
만마본원의 가치를 품은 자.
역천마제 단원진.
자신의 아버지의 솜씨임이 틀림없었다.
천지를 개벽할 힘이 단지운에게도 있었으나 이러한 현상을 만들고 유지시킬 능력은 없었으니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차이였다.
‘그 하나의 차이가 이런 능력을 갖게 만든다고?’
직접 체험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창조라고 했던가?
쿠구구구…….
다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축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틀린 지형지물에서 변화가 감지되었다.
무너지듯 움직여서는 다시 제멋대로 합쳐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하면서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단지운도, 권영서도 눈치챘다.
길을 열어주는 것.
거기에 단원진은 안내자까지 보낸 듯하다.
“야마.”
단지운이 움직이는 지형지물 뒤로 조금 떨어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승을 보며 이름을 불렀다.
야마가 미소를 짓고는 합장과 함께 허리를 비스듬히 숙였다.
“교주님께서 손이 너무 거치니 직접 안내하라 지시를 내리셔서 이리 왔습니다.”
단지운과 권영서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야마와의 거리가 얼마간 가까워졌을 때, 야마와 눈이 마주친 단지운이 입을 열었다.
“……뭔가 달라졌군.”
“후후! 그렇습니까?”
단지운이 별안간 내뱉은 의문에도 야마는 여유롭게 웃으며 반문했다.
토번인인 야마의 눈동자는 검었다.
동공부터 홍채, 각막 부분까지 모두 검어서 가까이서 봐도 그 경계가 그리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지운의 시선에 지금 야마의 눈은 적색과 황색의 희미한 색채가 감돌면서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것이 단지 표면에서 드러난 색채에 따른 느낌보다 더 깊이가 있는 안광 혹은 마치 영혼의 불길과 같은 인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너스레였으나 단지운은 분명 위화감 같은 걸 느꼈다.
‘아버지에게 뭔가 영향을 받은 것인가?’
단지운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앞서 가는 야마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지운은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광경을 연이어 마주하고 있었다.
천마신궁의 마니사에선 보이지 않던 야마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의문스러운 일이었지만, 천마신교 사람이 아닌 다른 인간들이 어쩐지 넋 나간 얼굴로 지형지물 사이사이에 서 있는 것이었다.
“저들은 누구지?”
“태상교주의 마귀성에 무단으로 침입한 중원이 무림인들입니다.”
야마의 대답에 권영서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윽고 무영각에서 얼굴 등 외견을 그려놓은 종이에서 보았었던 면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마신궁에 침입했던 천무방의 황검당이로군요.”
“뭐?”
단지운이 조금 놀라 권영서를 흘끔 보았다.
“종적을 감추었던 황검당이 이곳을 침입했을 줄이야……. 그렇다면 혹시 황검당주나 성혈교, 대라마 아유타도 이곳에 있습니까?”
야마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습니다. 모두 태상교주님의 손에 사로잡히셨지요.”
“……아유타와 성혈교는 정말 배신한 것인가?”
“글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뭐가 틀린 것이지?”
“그건 태상교주님을 뵈면 자연히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야마의 뒤에서 단지운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천마신교의 교주 앞에서 바른 데로 고하는 자들이 더는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좋다. 도대체 아버지께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모든 걸 주겠다는 듯 말하며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단원진이었다.
하지만, 단지운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저 그를 둘러싼 모든 지표가 이곳에 오게끔 가리키고 있었으니 기꺼이 와준 것이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취한 후, 천마신교를 토대부터 다시 세우리라…….’
세 사람이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으니 곧 끝이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꺾인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 그의 눈앞에 거대한 광장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광장의 반대편 구석에 연단처럼 높은 괴이한 암석 위에 제육천마라대전의 파순대좌보다 더 크
고 기괴한 형태의 의자가 있었고 거기에 단원진이 백발을 휘날리며 앉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염황신마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던 양자성과 스칸다가 연단 좌우로 서 있었고 스칸다 옆엔 삼십 대쯤의 나이로 보이는 처음 보는 검객이 충혈된 눈과 핏발이 선 피부 등 병색이 느껴지는 상태로 있었는데 뒤에 있던 권영서가 그를 가리켜 황검당주 이혁성이라고 알렸다.
양자성은 검은 장포로 몸을 가린 모습이었다. 그의 옆으로는 아유타가 검은 밧줄에 묶인 채 고통에 겨운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선 뒤편으로 보이는 구조물엔 다르파를 포함한 성혈교 승려들이 주술적인 힘에 묶인 채로 구속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단지운은 다시 단원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단원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비틀린 듯한 괴석연단에 계단은 없었으나 단원진의 두 발은 계단을 밟듯이 공중을 걸어 내려왔다.
“아들아.”
단원진이 웃음 띤 얼굴로 단지운을 불렀다.
“아버지.”
단지운도 단원진을 부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둘 사이 다섯 장 정도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스스로 그런 존재라 하였었지. 하지만, 넌 증명하지 못하고 마침내 나의 품으로 돌아왔구나.”
단지운이 양자성과 스칸다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교주를 마주하였다면 응당 무릎을 꿇어야 하거늘 그들의 두 다리는 꼿꼿이 편 채로 몸을 세웠다.
“양자성, 선우도는 어디 있지?”
“제가, 죽였습니다.”
양자성이 두려워하는 기색 한 점 없이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람이 불면서 그의 흑장포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그의 전신을 감싼 탈혼갑과 마령검이 그림자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탈혼갑?”
단지운은 사천에서 안효철을 대면하고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외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체형이 다르니 안효철에게서 보았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긴 했어도 탈혼갑이 분명했다.
탈혼갑과 선우도의 죽음.
단지운은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마니사 마구니들의 시체들과 함께 천도환위술로 천마신궁에 나타났다지?”
단지운이 양자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곳에 이르는 동안 권영서가 설명해준 당시의 상황들과 함께 눈앞에 비치는 당사자들의 모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지운에게 많은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