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 제76장. 두 개의 모임(會) (3)
진도건의 말에 금태하가 말을 툭 던졌다.
“결정났군.”
하지만, 진도건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위협이란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이 마도의 길을 지속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말장난은 싫은데.”
“금태하 선배, 마공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뭐?”
“당신에게선 저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마공의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그렇다고 호북 구룡문에서 성장하여 문주가 되고 사패련주까지 지낸 당신이 마교도와 무조건 같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공이란 정파의 것이든 사파의 것이든 결국 노력과 시간을 들이고 깊은 탐구를 통해 발전시켜나가 경지를 이뤄야 하는 것임에도 마공이란 건 입마에 들고 마성의 속삭임을 들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힘과 방향성을 부여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태하는 아주 잠깐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찾아온 제자 황사열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 주화입마 이후로 정체기에 빠졌던 암연소혼신공이라는 무공은 두 번째 주화입마에서 청명의 도움으로 이성을 되찾음과 동시에 마성을 수용함으로써 암흑구백마공으로 발전시키고 그 자신도 마침내 벽을 깨고 더 강해졌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단번에 자신의 무공을 뚜렷한 색채와 방향성을 가진 마공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인가?
금태하가 고개를 돌려 냉소평을 보았다.
실소를 머금은 냉소평의 입꼬리가 더욱 높이 올라가며 허연 치아를 드러냈다.
금태하의 의문은 냉소평의 의문과 같았다.
“호흡을 다듬고 자세를 익히며 이치를 배운다. 도식화된 이론과 상식 위에 쌓아 올리는 상상력은 긴 시간 동안 쌓여온 내공을 바탕으로 바깥으로 발현된다. 그게 무공이 경지를 이루게 되는 순서지. 학문을 배우기 위해선 글자부터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지금 날 가르치려는 것이냐?”
냉소평의 이야기를 듣고 금태하가 눈을 부릅뜨며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냉소평은 웃음 띤 얼굴에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천하오절 흑사왕의 위상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마도와 마공에 있어선 내가 한참 선배이니 잠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지금의 난 무림의 적이 아닌 무림이 쓸 수 있는 양날의 칼로 서 있으니까.”
금태하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다시 입을 열진 않았다.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또한 백제성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이기도 했다.
마교 본산을 직접 보고 판단하기 위하여.
“탑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고 또한 발원(發源)을 고려하면 반드시 아래에 고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마성은 그 모든 법칙을 거스르게 만드는 진원이며 원천이다. 순서를 뒤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단 한 방울로도 기의 호수를, 바다를 통째로 이염시킬 수 있는 원천이며 동시에 본원인 것이야. 그대도 느끼지 않았나? 명확한 색채의 힘, 명확하게 떠오르는 강력한 영감 그리고 막힘 없이 뚫리는 무도(武道)의 극의. 이건 마치 어떤 절대고수가 자신의 모든 무공을 제자에게 이입하여 완전히 전수하는 그런 꼴이 아닌가?”
“……무슨 뜻이지?”
“한마디로 정리하지. ‘마성은 곧 타의(他意)의 투영’.”
“아미타불.”
냉소평의 말에 빌게포첸이 불호를 왼다.
“누구의 타의라는 것이냐?”
금태하의 물음에 냉소평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땅을 가리켰다.
“신. 어쩌면 지옥의 악마. 글쎄,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군.”
“뭐? 훗!”
금태하가 반응하곤 곧바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냉소평의 말이 우스운 농담으로 들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거대한 괴수처럼 변해버린 광혈신마 혁무술과 천살광부 오규.
삼두육비 아수라로 변모한 혈마 구마진과 붉은 악귀처럼 변해버린 흑각수들.
천무방과 백두기, 남궁평 그리고 창천단과 더불어 전장에 합류해 싸운 강정학 등 검림 고수들과 안효철, 당혁수 등은 불가사의한 현상을 직접 체험한 장본인들이었다. 전장에 합류한 정파의 인사들 또한 생경한 보고와 더불어 뒤틀린 적들의 시신으로 간접적인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금태하는 다른 데 관심을 두지 않고 곧장 천무경과 다투는 단지운에게로 돌격했었다.
마교주와 직접 자웅을 겨뤄보고 싶은 욕망도 컸지만, ‘암마’의 마인이 된 자신의 지금 위치와 가진 힘에 꽤 취해있기도 했었다.
‘너의 힘은 타인의 것으로 네가 누릴 타당한 권리가 아니다.’
냉소평의 말은 이 말과 같았다.
그 타인이 신 또는 악마 또는 다른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빌게포첸도 옆에서 동의를 표하고 있다.
‘명마’의 마인과 ‘불마’의 마인.
두 사람이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이야기는 타당한 입증임이 틀림없다.
금태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웃음을 거두는 사이, 천무경이 중간에 묻는다.
“그렇다면 도건이 보았던 것들을 당신들도 보았겠군.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천무경은 그들이 나타났던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진도건이 나타났을 때의 기척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마땅히 같은 현상 속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였고 실제로 증언을 들음으로써 받아들였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꽤 즐거운 경험이었어. 당신 정도의 인물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란 건 유감이고. 클클클!”
“……글쎄.”
천무경이 나직이 중얼거리자 냉소평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글쎄? 뭐라도 본 것처럼 얘기하는군.”
냉소평의 지적에 사람들의 시선이 천무경에게로 쏠렸다.
“전장에서 본 것들이 있어서 한 말인데, 그렇게 들렸나 보군.”
천무경의 대답에 시선을 던졌던 이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러나 진도건은 그의 말이 절반만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제석천의 가호.
도리천에서의 경험은 알리 라 다바스의 등장과 함께 신강 천산을 기점으로 마기가 창궐하고 있을 때, 천무경 일가의 도약은 미약하게나마 제석천의 가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네 결론은 무엇이냐?”
금태하가 침묵을 거두고 다시 냉소평에게 물었다.
“결론을 내리기엔 이건 그저 한 가지 이유에 지나지 않아. 내 성취가 다른 존재에 기댄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큭큭! 알 바냐? 칼이란 날붙이도, 황제가 장수에게 내리는 전쟁 명령도 다를 게 없으니 말이야. 이건 네가 천마신교나 구주마종 출신이 아니라 중원무림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들려준 내 선의로 받아들이면 좋겠고.”
‘고작 그게 선의라고? 내 심기를 흔들려는 수작이지.’
냉소평의 말을 듣고 금태하가 생각했다.
냉소평이 말을 이어갔다.
“궁극적으로는 태상교주인 단원진이 획책하는 일이 천마신교나 구주마종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그가 벌여왔던 ‘과업’들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지금까지 벌어졌던, 경험했던 일들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감히 단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려는 게 틀림없어. 그건 나와 일월교가 천마신교를 따를 이유가 아니기도 하고.”
빌게포첸도 말을 이어갔다.
“……빈승은 성혈신마가 맞지만, 본질적으로는 천마신교에선 성녀라 불리는, 본교의 대라마이신 아유타의 대행자입니다. 그리고 성혈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천마신교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아유타께서 보신 계시의 이상이 천마신교과 단씨 일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중도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승은 지금 무척 걱정하는 중입니다. 본교는 천마신궁 내에 거처를 두고 있으니 혹시 대라마와 이하 승려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해서 말입니다. 아미타불!”
“성혈교가 본래 포달랍궁의 분파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입니까?”
범굉대사가 빌게포첸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중원말로 백교. 카규파의 일원이었데, 그 뿌리가 포달랍궁과 함께 하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파가 오랜 시간 천마신교의 행적을 관찰하면서 당연히 구주마종에 대한 분석도 겸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 활동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정보들에 대한 탐구로 대신한 것이다. 성혈교의 기원에 대한 의문은 불교에 뿌리를 둔 소림사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마도라고는 하나 성혈교의 뿌리가 그러한 점은 범굉대사로서는 어느 정도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느꼈다.
“아미타불. 성혈교의 목적이 기존의 종파로 회귀하고자 하는 데 있다면 그의 설명은 타당하다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맹주님.”
진도건도 이어서 입을 열었다.
“결국 무림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태상교주 단원진이 무슨 음모를 획책하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저지해야만 합니다. 그를 위해 일월신마와 성혈신마는 마교의 마지막 저항을 원활히 돌파할 수 있는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단원진의 음모가 냉소평이 말한 ‘타인’과 직결되는 문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일월신마와 일월교의 혼돈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주백자와…… 주백자께서 당부하신 조건입니다.”
진도건은 스승 조강선의 이름도 얘기하려다가 다시 속으로 삼켰다.
이젠 이승의 인간이 아닐뿐더러 진도건 자신에게나 중요한 인물이었지 주백자처럼 강호의 큰 어른이라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백자……!”
“그분께선 안녕하신가?”
홍두형과 범굉대사가 그의 소식을 반겼다.
“예. 마지막 순간을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정확히는 태상노군의 말이었다.
태상노군은 태극도를 이용하여 진도건과 함께 도리천을 떠난 후, 옥문관 전장으로 이동시켜주면서 얘기하였다.
“전장에 떨어뜨려 주마. 네가 활약해야 할 자리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마하발리가 얘기했듯이 네가 풀로만에 의해 아수라화된 자를 쓰러뜨리고 나면 아수라도와 연결되었던 영역의 관문은 소멸할 것이다. 그때 거기에 있던 아이들도 자연히 전장에 떨어질 수 있도록 조치해둘 것이야.”
“……스승님을 다시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허허! 함께 있던 시간이 고난이었을 텐데 사제 사이의 정이 의외로 깊구나.”
“절 구해주신…… 사부님이면서 동시에 친부와 마찬가지인 분이니까요.”
“그는 이승을 떠난 몸이고 선계로부터 명을 부여받은 몸이니 너도 그만 미련을 접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아직 이승에 몸이 묶여있는 주백자와 유변이란 아이까지 그들 세 사람은 오늘에 이른 이 거대한 사건의 흐름을 짐으로써 짊어진 아이들이야. 너 같은 아이들이 마음으로 붙잡으려 한다면 그들이 어찌 맡은 책임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 말씀은……?”
진도건은 태상노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그 끝자락에 이르러선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급히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그 자리를 애써 지워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저들과 전 같이 갈 것이고 여러분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제겐 ……이 지난하고도 넓고 깊은 혼돈을 끝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강호의 선배님들께 너른한 양해를 구합니다.”
진도건이 일어나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하니 모두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천마신교가 강호에 그 정체를 드러내었을 때, 가장 핵심이 되었던 ‘홍천환’ 사건의 중심에 진도건이 있었다.
천하 각지에서 천마신교와 다툴 때, 진도건은 많은 현장에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조차 크고 작은 인연의 실타래가 그와 연결되어있었다.
이젠 이 전쟁의 종막에 이르러서 모든 사건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순간에 그가 반드시 있을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중요한 방향성이 그의 행보에 기대고 있음을 지금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결정되었군.”
천무경이 일어나 말했다.
“창천맹은 이 전장에 모인 모든 이들과 연합하여 천마신교를 무너뜨리고 모든 음모의 중심에 있을 천마신교의 태상교주 단원진의 제거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것을 가장 중요한 대전제로 하여 지금부터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과 계획들을 논의하도록 하지. 제갈 군사, 계속해주시게.”
목적이 공고해지니 제갈무문의 눈빛에도 힘이 들어갔다.
“예, 맹주님. 그럼 지금부터…… 창천마도연맹이라 해야 합니까?”
하지만, 이내 질문을 던진 내용 때문에 여기저기서 실소가 흐르고 어깨를 으쓱 움츠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일이 끝나면 일월교나 성혈교는 각자 갈 길 갈 테니 낯간지러운 이름에 굳이 넣진 말아주겠나?”
냉소평이 냉담한 어투로 요구하자 제갈무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뱉었다.
“크흠! 본인도 생각은 없었소이다. 그저 소속감을 위한 배려차원이었을 뿐이오. ……그럼 창천맹의 천마신교 본산 진격 계획에 대한 제반 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갈무문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