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 제76장. 두 개의 모임(會) (2)
위정오의 눈엔 창천맹에서 보았던 진도건과 지금 옥문관에서 진도건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침착하고 안정감이 있었으며 그 태도가 이목을 사로잡는 느낌.
무엇보다 그의 싸움을 관전한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무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꼈던 것과는 무관하게 그들을 당혹게 한 상황에 대해 충격이 거의 없어 보이는 모습.
“자네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군. 진짜 ‘삼두육비’의 괴물과 싸워놓고서 말이야. 나는 지금이 말세가 도래한 게 아닌가 하여 내심 두려움을 참기 어려운데 말이야.”
위정오가 앞서 ‘무림의 전쟁이라고 해도 사람의 전쟁’이라 얘기했던 건 지금과 같은 맥락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진도건의 말에 위정오와 위경서 그리고 천서은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천서은도 진도건이 겪은 일의 내막을 아직 다 듣지 못한 마당에 말세라는 단어를 인정하자 긴장감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런 허황된 말조차 진도건이 인정하면 정말 그렇다는 말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막기 위한 싸우는 거로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정말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슬쩍 넘어가려는 듯한 말이었지만, 위정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천동지란 말이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현실 그 자체로 보여준 마교주와 천무경의 대결 그리고 삼두육비 아수라마냥 현현하던 혈마 구마진을 상대로 싸우던 진도건과 여러 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바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네. 격려해줘서 고마워. 우린 이만 가보겠네.”
“……고맙습니다.”
위정오가 말을 마치자 위경서가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뜻을 비쳤다.
네 사람은 그렇게 둘둘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갔다. 그러다 위정오는 몇 걸음 더 가지 못한 채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혹시…….”
무심코 나온 말이라 아주 작게 중얼거려서 진도건의 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위정오는 일부러 진도건을 부르지 않은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가자.”
위정오가 위경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다시 몸을 돌렸다.
‘창천단과 움직인 적은 없었는데. 분명 하늘에서……. 하아, 정말 말세가 오려나.’
위정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들이 느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고 조심스럽게.
서호항가의 상단 사람들과 전장에 합류한 정파 무림인들의 도움으로 전장의 정리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여갔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시신들의 정리였다.
사지가 비교적 멀쩡하게 붙어있거나 식별이 가능한 수준의 시신이라면 최대한 수습할 수 있는 만큼 수습했다. 그리고 가져온 마차의 짐을 내리고 시신들을 실어서 운반할 준비를 마쳤다.
바람이 몹시 찬 겨울이었으니 시신의 부패도 늦어질 터.
큰 마을이나 성으로까지 운반하여 시신들을 개별 정리한 후, 창천맹으로 이송해서 공동장례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를 위해 운반 작업은 상단 사람들과 부상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기로 하였다.
엄청난 격돌과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졌으니 당연히 훼손이 심한 시신들도 매우 많았다.
그런 시신들은 한데 모아서 화장을 진행했다.
그나마 신분을 식별할 수 있는 자들은 작은 유품들을 챙긴 후, 시신의 옷을 조각 잘라내 이름을 쓴 후 유품과 함께 동여매어 상단에 넘겼다.
황혼이 지는 저녁.
소림승들이 약식으로 장례 준비를 마쳤고 범굉대사는 직접 추도문을 준비하여 읊었다.
곡소리는 없었으나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는 소리가 사막의 바람 소리를 타고 옥문관 주위를 맴돌았다.
시신을 태우는 새빨간 불길이 하늘을 향하여 춤을 추는데 노을 진 하늘과 어우러져 넋을 위로하는 듯했다.
모든 산 사람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눈을 감고 고개 숙여 깊이 추념하였다.
* * * *
화장의 불길이 꺼지고 깊어진 어둠을 틈타 장작더미 사이 하얀 잿가루가 모래에 뒤섞여 공기 중에 흩날리다가 모래 지면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화장터에서 떠났지만, 편히 휴식을 취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마교주와 천무경이 충돌했던 자리는 전장에서도 가장 깊은 충격을 감당해야 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대가 주변의 다른 곳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로 설 경우 중심지로 주목하기 좋은 형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앉고 서며 옹기종기 모였다.
중심지에 모인 집단의 수장들의 회의를 주목하기 위함이었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회의였지만, 그곳에서 내려진 결론에 따라 전체가 움직일 것이므로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오는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남은 적 전력이 얼마나 되오?”
천무경이 제갈무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갈무문은 전장의 정리가 이뤄지는 사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취합했다. 개방주 홍두형이 쥔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 총합과 전장에서 직접 싸워온 자들, 개별적인 위치에서 천마신교와 부딪친 사람들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을 취합하여 정리를 마쳤다.
“이곳에 있는 일월신마와 성혈신마 두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구주마종 가운데 여섯 개는 거의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신마로 불리는 자들 외에도 주목해야 할 고수가 모두 여섯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일단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당연히 마교주 천마 단지운입니다. 그리고 태상교주 역천마제 단원진이 있습니다. 그 외엔 네 사람이 더 있는데 하나는 위타천이란 지위를 가진 스칸다, 그리고 마니사라는 천마신교 내부 전력을 관리하는 야마라는 인물과 환도마종의 환도신마 선우도. 마지막으로 ……검림 강 총수의 제자였던 양자성입니다. 그는 최근 검마라는 지위에 오른 모양인데, 여기 계신 안 대협의 물건이었던 탈혼갑이라는 철갑을 취하게 되면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양자성의 언급에 강정학과 강도혁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많이 제거됐음에도 여전히 건재한 느낌이군. 처음 듣는 이름도 둘이나 튀어나오고.”
천무경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따로 움직이던 이들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그간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게.”
“예.”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시야에 들어온 좌중의 인물들을 살폈다.
정파의 봉문이 해제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꾸준하고도 조용히 강호의 정세와 마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왔기에 분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대신 객관적인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도까지 핵심을 이루는 인물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천마신교의 존재가 크게 두드러졌던 시기는 약 사 년 전 ‘홍천환’이라는 영약이 강호에 드러났을 때였습니다. 당시 사파무림은 그 영약의 존재에 유혹되었고 결과적으로 천마신교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희 정파도 마교의 준동을 억누르고자 움직였으니 천마신교와 정사무림이 가장 먼저 충돌했던 공식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기 있는 일월신마의 손에서 여기 진도건 공의 혈마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갈무문이 냉소평과 진도건을 번갈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니 잠시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 후로 약 3년여 시간이 흐른 뒤 북쪽 몽골초원에서 거란족 중심의 흑풍대가 몽골족을 일부 병합한 채 군사적 도발을 일삼았습니다. 그곳에서 진도건 공과 천서은 낭자에 의해 흑풍신마 야율재가 쓰러지고 흑풍대도 전멸하였습니다. 그것이 천마신교 구주마종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제갈무문은 그 뒤로도 차례대로 중요했던 전투들을 열거하면서 좌중의 이해를 도왔다.
사천성도에서 대거 충돌했던 싸움에서 사혈마종과 사혈신마 절멸.
백제성에서 시작되어 청해 어느 설산 골짜기에서 강정학과 검림, 금태하, 안효철의 우연적 합류로 염황마종과 염황신마 절멸.
천마신교의 주축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었던 살문과 월하사신이 서하국 흥경에서 절멸.
감숙 하서주랑 위의 종산 인근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하여 적룡단과 적룡신마 절멸.
옥문관 전투에서 4년 전의 일과 백제성까지 구룡문과 악연이 짙었던, 사천에서도 큰 위협이 되었던 광혈마종과 광혈신마 절멸.
마찬가지로 옥문관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혈마종과 혈마 구마진은 혈마종의 이반(離叛)이 일어나면서 결국 진도건의 손에 의해 혈마 구마진 절멸.
“살아남은 혈마종 인사들은 이번에 진도건 공을 돕겠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이후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더군요. 그 점은 창천맹에서 중재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자리에 혈마종 인원들은 한 사람도 없이 모두 외곽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차피 진도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뒤따를 것이라 약속했으니 무슨 계획이 오가든 상관없다는 대통현 현령 부양호의 말이었다.
그 뒤론 무림 측 전력 현황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수천에 이르는 사망자.
남월당의 전멸과 천무방 이장로 장태환의 전사.
천하제일검 검림 총수 백령신검 강정학의 전력 약화.
천하오절 중 하나인 구치상의 전력 이탈과 신진 고수 청명의 전사 등은 무림으로선 가장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사천제일고수인 천수기륭 당혁수와 탈혼갑의 저주로부터 무사히 해방된 안효철의 합류 그리고 능히 천하오절과 비견할 전력으로 성장한 진도건과 천서은의 등장은 반길만한 소식이었다.
설왕설래가 멈추지 않을 마지막 사항은 역시 전 천마신교의 주축 전력이었던 일월신마 냉소평과 성혈신마 빌게포첸 그리고 혈마종 인원들이었다.
혈마종이야 본래 중원 출신이 주축이었고 늙긴 했으나 집단의 여론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으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둘이었던 혈마라는 상징이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이반할 염려도 적다.
역시 문제는 일월, 성혈 두 신마다.
“저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혁수가 염려 섞인 어투로 물었는데 그 시선이 제갈무문보다 천무경에게 향해 있었다.
이 전장의 총사령관은 응당 창천맹주인 천무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천무경도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대답해줄 사람을 바라보았다.
“도건아, 네가 대답하거라.”
진도건은 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천무경을 만나 잠깐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그들이 여정을 잠시 함께했던 경위를 듣긴 했으나 그것이 신뢰를 담보할 만큼 충분하다고 보기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이 대답하려는 데 먼저 끼어든 이가 있었다.
“배신은 언제나 반복되는 법이다.”
“……적의 적이 반드시 친구가 되는 법은 아니네.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되는 법도 없고.”
금태하와 강정학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냉소평과 빌게포첸을 몰랐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강자들과 가장 험한 전투를 치른 이들이 있다면 바로 둘을 꼽을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문파가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과 동시에 그 자신은 주화입마에 동화되어 천마신교의 그들과 같은 마인이 되었다.
한 사람은 제자의 배반을 겪었으며 천하제일검이란 칭호를 안겨줄 정도로 일평생 쌓아온 검학의 정수가 녹아있는 오른팔을 배반한 제자에게 잃어버렸다.
전투의 험난함을 넘어 극복할 수 없는 원한을 가슴 속에 품은 자들이었다.
천무경이 진영을 어떻게 끌고 갈지는 그들로선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위험성을 지적할 자격은 충분했다.
진도건은 냉소평과 빌게포첸을 흘끔 바라보았다.
냉소평은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실소를 흘리고 있었고 빌게포첸은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합장한 두 손 사이로 엄지로 염주를 굴린 채 무표정으로 있었다.
“……이 전쟁은 사파와 정파가 합심하여 마도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철학과 이념을 무너뜨리는 전쟁입니다. 또 이 전쟁은 중원에 자리한 기존 세력이 새외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입니다. 가진 걸 빼앗기느냐, 가지지 못한 걸 빼앗느냐…… 승자독식을 가르는 전쟁이면서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강호의 정세를 판가름할 전쟁이기도 합니다.”
철저한 힘의 논리에 의한 패권주의는 다른 정파(政派)를 배척하는 마도의 근원적 이념.
이는 정파와 사파가 격렬하게 다투어도 결국 의협주의와 실리주의 사이에서 타협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 반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 말살을 강요하는 마도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니 진도건의 이야기는 분명 옳았다.
“그런 면에서 둘은 분명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쓰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위협이 될 수 있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