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 제76장. 두 개의 모임(會) (1)
범우, 범굉대사 등과 작은 마찰을 빚은 이후, 소요자는 소림사를 떠나면서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사파무림에 책임을 지우는 것.
그것이 공평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두 노승과 개방방주의 지적에 대해 화가 조금 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지적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스치며 감정적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물은 엎질러졌고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었다.
창천맹의 정파무림 2차 결집 자체를 막을 수 없어도 시일을 늦추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
목적은 이룬 것이다.
그런데도 허한 기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의문이 들었을 때, 소요자는 머릿속에 든 상념을 모두 지웠다.
서두를 일도 없었고 목적도 없었기에 그저 발 가는 데로 신선놀음하듯 떠돌았다. 그러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무당산 산문 앞에 서 있었다.
소요자는 무당산에 올라가 무당파 경내로 들어섰다.
경내는 한산했다.
그가 기억할 수 없는 먼 과거 당송 황제들의 지원을 받았던 무당파는 중원제일도문의 위상을 자랑하면서 무당파의 제자들과 방문객들로 북적거렸을 터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에 의해 송은 장강이남으로 후퇴했고 중원을 여진의 금나라가 지배하는 지금 상황에서 봉문을 해제했다고 한들 그의 시대에 황실의 지원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순간은 아마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경내 계단을 오르던 중, 제자들을 마주쳤다.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목례만을 한 채 시선을 거두고 어쩐지 황망하게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모습들이다.
본래라면 무당파의 서열 두 번째이자 최고수이기도 한 그에게 깊이 예의를 갖췄어야 할 아이들이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낄 때 그의 발길은 수련장에 이르렀다.
무당산에 처박힌 채 조용히 스스로 갈고 닦으며 화경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그의 발길, 손길 하나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곳에서 백여 명의 제자들이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제자들 대부분이 경지에 오르지 못한 어린 제자들이었다.
그때 제자들을 이끄는 현유자(玄兪子)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을 인물이 이번에도 시선을 피한다.
‘왜지?’
그런 의문이 스쳤을 때, 익숙한 기척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썩 나가라!”
“장문사형.”
눈부시도록 흰 머리카락과 수염이 태을도포(太乙道袍)와 잘 어우러져 신선이 산다면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무당파 장문진인 중양자가 그를 향해 호통을 치고 있었다.
“강호에 다시 정도를 세워나가야 할 시기에 너와 관련도 없는 원한에 휩싸여 모략질이나 획책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이 무당파와 정파의 어른이라 할 수 있느냐?”
“사형, 전 그저 공평……!”
“시끄럽다! 내 이미 범굉대사께 사죄의 뜻을 전하고 서른 명의 제자들을 파견했다. 네가 속죄하고 선도(善道)로 다시 나아갈 길은 파견한 아이들과 더불어 먼저 나가 싸우고 있는 청명을 데려오는 일뿐이다.”
“청명은 생사를 알 수가…….”
“제자의 생사를 알 수가 없는데 그 스승이란 놈은 죽음을 단정하고 엄한데 화풀이하고 다닌단 말이더냐? 이 한심한 녀석아, 네가 행한 그 모략질이 어찌 선도(善道)라 할 수 있느냐? 천 맹주는 천무방의 거의 모든 전력을 마도척결에 쏟아부을 정도로 진심인데 거기에 부족하나마 힘을 보태는 길이 진정한 파사현정(破邪顯正)임을 모르는 게냐? 아무리 그들을 사파라 분류해도 결국 사람 사는 속된 길에 불과하거늘. 주백자께선 어찌하여 강호를 정파의 질서로 바꾸는 일부터 하지 않고 마도 적진을 누볐겠느냐?”
중양자의 지적에 소요자는 놀랐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주백자의 모습과 함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짓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소요자가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한 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사형인 중양자가 지적하고 주백자의 이름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주백자에겐 대단한 존경심을 보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으나 한편으론 손아랫사람이란 이유로 제자의 실천을 의미 없는 짓이라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주백자의 실천과 청명의 실천은 목적과 방향이 다르지 않다.
그들이 행한 길은 대도(大道)라 할 수 있었고 그가 행한 일은 소도(小道)라 부르기에도 한심할 노릇이다.
“청명을 데려오너라! 그 아이가 내 자리를 이을 것이니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장문진인으로서 네게 파문과 같은 중죄를 물을 수밖에 없느니라!”
파문.
소요자는 무겁게 고개를 숙여 중양자를 향해 절을 올렸다.
기시감이 드는 그 두 글자.
무당파에 입문하여 처음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때, 주백자라는 도호를 가진 무당파의 전설적인 고수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얼마나 뛰었던가? 그리고 그가 반선지경에 이르러 노년이 된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는 가슴이 또 얼마나 뛰었던가?
소요자는 주백자와 같은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면 파문이란 단어는 중벌의 무게감보다 철없던 시절에 가슴을 뛰게 했던 단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두 파문의 결정, 그 전의 이야기가 다르고 그 후의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숨죽여 지내던 정파가 다시 세상에 자신들의 깃발을 펄럭였을 시절의 이야기 속에 소요자란 도호는 무당파의 수치로 기억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오욕을 씻을 길을 중양자가 일러주고 있는 셈이었다.
소요자는 무당산을 떠났다. 그리고 정파 무림인들이 집결하고 있는 창천맹으로 향했다.
범굉대사와 홍두형의 앞에 나타나 그들에게 전황을 물어서 예상되는 경로로 한발 앞서 떠날까 생각도 했지만, 막상 현장을 앞에 두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들의 뒤를 멀찌감치 떨어진 채 따라갔다.
“사람으로서 그 정도 부끄러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부했는데…….”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등장한 소요자에 진도건과 천서은, 구치상은 적잖이 놀랐다.
허망한 눈빛이 청명의 시신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엉거주춤 일어나 구치상과 함께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비켜주는 그 사이로 소요자의 발길이 제자의 시신 앞에서 멈추었다.
진도건의 눈에 가늘게 떠는 소요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금태하 등의 발걸음 소리가 멈춤 없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백제성 이후, 자리를 피한 나는 폭주하는 기혈을 다스리려고 했으나 끝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지. 이 녀석이 돕지 않았다면 그대로 온몸이 터져 죽었거나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어 산속에서 객사했겠지.”
금태하와 황사열의 시선이 청명에게 머물렀다가 그 곁의 소요자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소요자도 흐릿한 눈을 들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금태하와 눈을 맞췄다.
“그렇군. 무당파의 소요자인가? 내 살면서 가장 적대시해온 놈들 중 하나가 무당파였는데. 이 녀석의 죽음은 조금 안타깝군. 진심이야.”
“……당신은 누구지?”
“금태하.”
“구룡문주? ……청명이 당신을 구했다고? 그럴 리가…….”
호북성에서 구룡문은 적수가 없었다.
정파로 분류되는 문파라면 구룡문 발아래 무릎을 꿇렸다.
딱 한 곳만 빼고.
저항할 능력이 있었기에 무당파와 구룡문은 호북지역에서 알아주는 최대 앙숙이었다.
과거 그날 천무방이 막지만 않았다면 모든 사찰을 불태울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봉문의 불문율이 아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봤을 것이다.
“클클! 이거 왜 이래? 마교도들한테서 우릴 구원하는 치욕을 먼저 안겨준 게 너희들인데.”
“치욕. ……그렇게 느낀 것이군. 그럼 내 제자를 이렇게 만든 게 당신인가?”
소요자의 기도가 날카롭게 흘러나오자 금태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후후! 그렇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군. 안타깝군. 그랬다면 재밌었을 텐데.”
금태하도 지지 않고 투기를 드러냈다. 섬뜩한 마기가 흘러나오자 소요자의 표정이 더 차갑게 굳어졌다.
구룡문의 무공이 원래 이런 기색을 가졌던가?
하는 의문도 잠시 이 정도의 마인이라면 흉수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칠 때,
“우릴 돕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소요자이 시선을 돌려 천서은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진도건에게 닿았다.
‘우리’라면 역시 관심은 천서은보다 진도건에게 쏠렸다.
소요자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그 사이 그와 눈을 맞추고 있는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일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요자의 굳은 표정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청명의 죽음이 충격적인 것도 있지만, 이렇게 구룡문주와 진도건을 청명의 시신을 앞에 둔 채 바라봐야 하는 운명의 장난이 야속한 것도 있었다.
“신파는 질색이니 내가 담백하게 설명해주지.”
소요자가 선택을 주저하고 있을 때, 금태하가 끼어들었다.
“이놈은 싹수가 괜찮았다. 구룡문주인 나를 주화입마에서 꺼내고 거기에 화풀이하는 날 침착하게 감내하는 그릇이었으니. 결국 이 금태하조차 조금은 감화되었던 게지. 그렇게 날 따라와서는 자기 제자와 골육상잔을 하는 강정학 그 노인네도 도왔고, 여기에 이르러서는 이놈처럼 머리카락이 시뻘건 놈이랑 싸우다가 죽은 게다. 어린 나이에 화경에 이른 재능이었음에도 괴물 같은 놈에게 걸려서 이리되었으니 이 정도면 하늘이 질투했다 여기는 게 그나마 마음이 편할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마도의 본질이 그와 같았으니 하늘이 질투한 게 참일지도 모르지. 클클클!”
금태하가 실소를 흘리며 발길을 돌렸다. 황사열은 진도건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금태하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냐?”
“금태하와 있었던 일은 알 수 없지만, 그 뒤의 일은…… 그렇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은…….”
“혈마 구마진. 마교의 구주신마 중 하나였습니다. 더 들으시겠습니까?”
소요자는 진도건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청명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몸을 수그려 청명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차갑게 식은 제자의 시신 때문인지 두 팔과 가슴이 무척 시렸다.
“아니, 혼자 있고 싶다.”
후웅…….
소요자가 경공을 펼치며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전장 바깥으로 떠나서는 금방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아졌다.
소요자와 금태하가 모두 떠나가자 조금 긴장했던 구치상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진도건이 창천맹에서 청명과 섰던 비무대에 끼어들었던 소요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그는 진도건이나 사파에 대해 매우 높은 경계심을 가진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소요자가 겪었던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에겐 그저 미안한 감정과 의문만이 남을 뿐이었다.
“금태하가 이리로 와서 조금 긴장했어요.”
“나도. 두 문파는 오래된 앙숙이니까.”
“그래도 충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걸 보면 창천맹이 정사공동의 연맹이라는 게 더 실감이 나요.”
“확실히.”
천서은의 그런 생각은 진도건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들이 마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노부를 기억하겠나?”
진도건이 그를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위정오 옆에 있던 그의 아들인 위경서는 어딘가 조금 불편해서 그런지 진도건의 인사에 목례로 답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맹주님을 지지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 무림의 전쟁이라고 해도 사람의 전쟁이라 생각했었는데……. 마교도들이 그런 악귀 같은 모습이 되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군.”
위정오가 이야기하고는 수염이 살짝 흔들릴 만큼 훅하고 공기를 뱉는데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옆의 위경서가 조심스럽게 끄덕이는데 고개가 유독 뻣뻣해 보였다.
전투가 끝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니 전장의 긴장감이 아직 신경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두 부자 모두 치열한 싸움을 겪은 듯 행색이 정상치도 않았고 여기저기 상처들과 응급처치로 붕대를 감은 모습들이 진도건과 천서은의 눈에 들어왔다.
창천단은 그나마 전장의 가장 치열한 중심부에서 일찍 거리를 둔 편이었지만, 위경서 부자가 있던 자리는 흑각수들을 붙잡고 있느라 전투 중심에서 오래 벗어나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흑각수들이 피부가 붉어지면서 수라화되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았으니 경륜이 얕은 위경서는 충격에서 바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상태를 느꼈던 진도건이 입을 말했다.
“마교주가 도주했으니 당분간 전투는 없을 겁니다. 부상 관리 잘하시면서 긴장도 푸시고 마음을 다스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