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00화 (400/432)

400화 - 제75장. 개관사정(蓋棺事定) (5)

현 무림에서 천마신교와 전쟁을 치르며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곳은 어디일까?

물론 마교의 손에 전멸하거나 상당한 전력을 잃은 문파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규모나 대표성은 천무방에 미치지 못한다. 백제성에서 참패한 구룡문만이 천무방보다 더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무방은 천마신교와의 전쟁을 위하여 강호의 고수들을 규합하여 사당(四黨) 개편을 통해 전력화하는 등 독자적인 노력을 꾀했다. 삼장로 중 두 사람을 천마신교에게 잃었으며 남월당은 참혹한 전멸을 맞이했고 적멸당과 백무당도 과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여 당장 싸울 수 있는 숫자는 이, 삼할에 불과했다.

백두기와 남궁평은 거대한 괴물로 변해 전장을 위협했던 광혈신마 혁무술과 천살광부 오규를 쓰러뜨렸으며 아수라가 되어 폭주하는 혈마 구마진을 막아 세우고 쓰러뜨린 건 천서은과 진도건의 역할이 주요했다.

천무경이 아니었다면 마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그 괴물 같은 천마 단지운을 누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쿨럭!”

천무경의 기침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피가 섞인 기침이었다.

입가의 하얀 수염이 피로 붉게 물들었고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가 내린 손바닥에서 각혈로 적셔져선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천무경의 얼굴에 쓴웃음이 머물렀다.

멀쩡한 듯 서고 걸었으나 결국 단지운과의 대결이 천하의 천무경에게도 상당한 내상을 감내하게 했음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의도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흐음! ……카악, 퉤!”

천무경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입 안에 머무는 핏물을 모아 땅에 뱉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아직 끝난 건 아니나 가까운 미래임엔 틀림없다. 그 결전의 순간에 선봉에 서는 사람은 ……나와 같은 늙은이들이 될 터. 그러니 닥치고 끝까지 따라와라! 그래서 내가 물러서지 않도록, 도망치지 않도록 뒤를 지켜라. 살아남은 너희가 돌아갈 길에 오직 승전의 깃발만 안겨줄 테니.”

전투가 끝난 전장에 서든, 앉든, 눕든 정신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무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묘한 표정으로 옆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큰 전투를 치렀고 참혹한 희생을 대가로 지불한 마당이었다.

땔감이 떨어진 전의는 쉽게 불타오르지 않았다.

막 꺼져버린 불길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무림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어떤 경우로든 다시 전쟁의 행진을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을음처럼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마음을 무겁게 덮고 있었다.

‘당연히 환호나 격렬한 호응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만큼이나 기세가 꺾였을 줄은……. 전쟁을 멈춰야 하는 것인가?’

그 분위기를 천무경은 분명하게 느끼곤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는 맹주의 연설을 지켜보던 진도건에게도 비슷한 깨달음을 안겨주고 있었다.

‘사파무림의 결속력은 이 정도인가?’

진도건은 사파무림이 구성한 집단의 약점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마도에 대한 배척 그리고 천마신교라는 무림공적의 말살.

이것은 정사가 연합하여 창천맹이라는 연맹을 창설하게 만든 명분이자 지금의 새외 관문 옥문관까지 진격하게 만든 명분이었다.

명분이란 이렇듯 어떤 목적성 짙은 실행을 밀어주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그리고 정의의 실현이라는 정파의 그것과 달리 이익의 실현을 더 고집할 수밖에 없는 사파의 본성은 그런 중요한 명분마저 꺾으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

천서은이 곁에서 천무경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조용히 내었다. 거기에 진도건도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

진도건에게 역할은 없었지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해남파의 이름 없는 노인이오. 아들 녀석과 함께 창천단에 가입하여 용케 아직까지 살아있는데 맹주의 신공을 보며 강호무림의 미래에 희망이 아직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소.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긴 하나 창천의 기치 아래 집결한 목적이 변함없음을 맹주께서 직접 보여주고 계신 이상, 이 노부와 부족한 자식 녀석 놈은 맹주의 뒤를 따르겠소이다.”

“해남파의 이름 없는 제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창천맹과 맹주의 등을 지키는 데 부족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해남파의 노인과 청년으로 구성된 두 도객이 천무경을 향해 포권지례를 갖추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천서은의 눈빛이 동그래지며 조금은 반가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아……!”

“저들은…….”

“알아요?”

“맹에 갔을 때 만난 적이 있어. 저 노인은 해남파의 위정오, 사상쾌도라는 별호를 가진 고수야. 창천단에서도 손꼽히…….”

진도건은 천서은의 물음에 답하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장 곳곳에서 몸을 바로 세우며 천무경을 향하여 포권지례를 갖추는 자들이 속속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송무문(宋武門) 유상필(柳想必)이오. 맹주의 뒤를 따르겠소.”

“이 학산파(鶴山派) 장로 문용민(門龍敏)도 맹주의 뒤를 따르겠소.”

“천경훈(天景勛)의 벽풍문(劈風門)도 마찬가지요.”

“현무문(玄武門)의 담승환(譚承還)도 맹주를 따르겠소.”

현 정파의 육대문파에 속한 해남파 고수들뿐만 아니라 정파의 중소방파 가운데서도 가장 명성이 높고 실력을 인정받는 네 문파의 고수들 목소리는 잇단 다른 목소리들 사이에서도 특히 더 도드라졌다.

그들의 숫자는 전체에 비하여 보잘것없었지만, 창천단에 속한 자라면 모두 알 수 있었다.

창천단에 가입하여 지금 이곳에 이르기까지 함께 싸워온 정파 고수들 전체가 일어나서 천무경의 뒤를 따르겠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백두기와 남궁평이 천무경의 앞으로 와 포권을 취하며 함께 외친다.

“천무방은 언제나 방주님의 앞에서 싸우겠습니다.”

“싸우겠습니다!”

“싸우겠습니다-!”

창천단에 참여한 정파에 뒤이어 천무방이 한목소리로 뜻을 이야기하자 목소리의 크기는 전체의 소수에서 절반을 넘기며 한순간에 전장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적멸당과 백무당의 사기충천한 외침에 진도건과 천서은도 천무경을 향해 저절로 두 손을 내밀어 포권을 취하게 되었다.

‘정파는 혈마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었지. 그때도 사파는 최종적인 역할에 거리를 두었고 모든 여진은 정파가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사파에 밀려 봉문과 함께 강호로부터 백 년 넘게 격리되었어.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같은 상황에 몰린 사파의 무림인들은 결국 책임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만, ……꺼져가는 불씨와 같던 명분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역시 정파의 몫이 될 수밖에 없구나.’

진도건이 정리한 생각처럼 창천단에 속했던 다른 사파의 고수들도 정파의 고수들과 천무방이 만든 분위기에 어느 정도 감화될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시 곳곳에서 새롭게 목소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일어서니 금방 전장 전체로 번졌다.

천무경이 모두를 둘러 바라보며 말없이 포권을 취했다. 꾹 다문 입술과 형형히 뜬 눈으로 전장 위 고수들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그것은 분명 모두의 뜻에 감복했다는 몸짓이 분명했다.

잠시 후, 창천맹의 부맹주들이 인솔해온 정파 고수 천오백 명이 전장에 도착했다.

정말 쉬지 않고 길을 달려온 그들 사이에서도 처음엔 여러 말들이 맴돌았다.

사파가 최전선에서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대해 당연하다는 의견과 그래도 서둘러 달려가서 정파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로 갈리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론 부맹주들의 다급함엔 크게 공감하지 못한 채, 행진을 재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다들 조금씩 있었다.

전쟁 자체를 피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정파와 사파의 세력 규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만큼 정파로선 굳이 안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활활 타는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가야 하느냐 하는 게 주된 여론이었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한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수천에 이르는 시신들을 보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세대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희생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하게 했다.

절로 숙연해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생존자들이 보내는 눈초리는 대체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그들에게 원망하는 자도, 타박하는 자도 없었다. 그저 근처를 걸으면 시신 옮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상자들 치료를 도와달라고 말 한마디 던지는 정도였다.

전투가 끝난 뒤의 태양은 그런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단지운과 천무경 그리고 마지막엔 금태하까지 합류하여 충돌했던 전장의 중앙은 그들이 일으킨 기운의 폭발로 인해 지각이 아래로 푹 패인 채 평탄화되어 있었다.

덕분에 마련된 넓은 자리는 모두의 시선을 모으기에 적당했다. 천무경은 항연에게 부탁하여 그곳에 조촐하게 천막과 탁자, 의자 등을 세우고 미리 가져온 땔감들을 곳곳에 쌓아 화톳불을 피워 저녁을 밝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생존자들을 포함한 무림인들 모두 주위를 둘러 모이도록 하여 중앙에서 전개되는 회의를 모두 볼 수 있도록 예고하였다.

처음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전파사항을 따라 무림인들이 둥그렇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파와 사파 양쪽으로 갈라지는 듯했으나 부상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정파 무림인들은 자연스럽게 사파 무림인들 사이로 어느 정도 섞여 들어가게 되었다. 덕분에 양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로 설 수 있었던 상황이 자연스럽게 희석되었다.

그런 전장의 중심에 작금 강호 무림의 최고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의 어수선한 시간 속에서 개인 간의 회포를 푸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부님.”

금태하는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가 조금 놀란 표정이 얼굴에 잠깐 스쳤다.

황사열이 그의 앞에서 정수리를 보이며 엎드리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를 보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구룡문은 어찌하고 네가 여기에 있느냐?”

“제자가 감히 구룡문을 해산하였습니다. 남은 계파들은 각자의 문파를 세웠습니다.”

“……그러냐?”

구룡문 해산 소식은 전 구룡문주에게 충분히 큰 소식일 수 있었음에도 금태하는 심드렁하게 반문하고는 황사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황사열도 그런 사부의 태도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금태하의 이기심 높은 성격이라면 미련 따위 두고 있지 않을 거로 이미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황사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입을 열었다.

“백제성 이후로 사부님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작정 나선 길인데 이렇게 정정하신 모습의 사부님을 뵐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클클! 그러냐?”

“……그럼 대답해주십시오. 어째서 구룡문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니, 구룡문과 절 버리고 여기에 계신 이유를 말입니다. 지금의 사부께선 제가 아는 흑사왕 금태하가 정녕 맞습니까?”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재밌지 않으냐?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말이야.”

“예?”

“좀 걷자꾸나.”

“……예.”

황사열은 금태하의 옆에 가까이 붙어 걸었다.

“기억하다시피 이 사부는 백제성에서 두 신마에게 ……음, 도주했었다. 아쉬운 패배였지. 기력이 닿는 동안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 동굴 속에 숨어서 다음을 기약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놈들의 마공에 의해 체내에 마기가 침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끝내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사부가 경험한 첫 번째 주화입마가 아니었다.”

“그럼 흑사전 용상의 서신은……?”

“그래, 내가 연성한 암연소혼신공이 실은 마도를 여는 것임을 일찍이 눈치챘기에 만약을 대비한 유언장이나 마찬가지였지. 만약 신공 연성에 있어서 마기가 정신에 스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면 네게 그 서신을 비전이라고 부르며 반드시 보도록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야.”

“그걸 깨달으신 게 대체 언제입니까?”

“10여 년쯤 되었나?”

“10여 년…….”

“이 흑사왕 금태하가 이룩한 무공의 경지가 마침내 벽에 막혔을 때가 대충 그쯤이었지? 천무경과 강정학이라는 일생의 맞수에 대해 질투심만 남기 시작한 시점도 그때쯤이었고. 아니지. 강정학이라는 몇 살 많은 노형이 이 사부보다 조금 강하다는 평가는 참고 넘어갈 수 있어도 몇 살 더 어린 노제(老弟)가 나보다 뛰어나고 강하다는 평가를 들어야 하는 건 참을 수 없어진 시점도 그때였고.”

그것은 제자와 해후하면서 잠깐 감상에 빠진 금태하의 자기 고백이었다.

한편 진도건은 천서은과 함께 청명의 시신을 돌보고 있었다.

청명의 몸에서 굳은 피를 닦아내고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팔다리를 몸에 붙여 바로 하도록 했다. 상단의 일꾼에게 부탁하여 따로 관리하도록 살폈는데 청명이란 인물이 어떤 문파의 제자인지 고려하면 당연한 조치였다.

구치상도 곁에 머물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창천단이 산맥을 넘어 백제성에 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억도 있던 데다가 길지 않은 여정 속에서 화경에 이른 젊은 고수를 바라보던 즐거움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재목을 잃었군…….”

“맞아요…….”

구치상의 넋두리에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은 일어나 허리를 세운 채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무심하게 옆을 보았다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금태하와 황사열의 모습을 발견했다.

“흠…….”

그저 그들의 방향과 그가 선 자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진도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청명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과 제법 가까운 자리로, 금태하가 걸어오는 방향 반대편에서 한 사람의 기척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도달하였음을 느꼈다.

터벅!

진도건 뿐만 아니라 천서은과 무공을 크게 상실한 구치상조차도 발 딛는 인기척을 분명하게 느끼고 들었기에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새하얀 수염과 무당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그들 앞에 나타난 노인은 바로 무당파의 검선,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청명의 스승 소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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