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99화 (399/432)

399화 - 제75장. 개관사정(蓋棺事定) (4)

* * * *

마지막 하나 남았던 적이 전장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당장 치러야 했던 전쟁은 끝났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 앞에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은 소수의 정파 무림인만 누리는 감정은 아니었다.

이 전장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천무방을 비롯하여 창천단의 주축을 이룬 사파 무림인들까지 전장을 정리하는 지금의 시간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옥문관 전장의 주변 환경은 매우 척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호항가의 상단이 행렬이 이곳에 당도한 건 정말 놀랍고 다행인 일이었다.

“백 사부!”

“항 가주님,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서호항가의 가주 항연이 직접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두기가 달려와 그를 맞이했다.

“백 사부, 혹시 제 아들은……?”

“적멸당도 큰 피해를 받았지만, ……수아 녀석은 무사합니다.”

항연의 아들 항수와 사패소룡비무제 출신의 소적문은 백두기가 거둔 단 둘 뿐인 제자 중 하나였다. 소적문의 자질이 뛰어나 백두기가 아꼈는데 항수도 장사치 가문의 아들치고는 우직한 면모가 있어서 백두기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어휴, 다행입니다. 아무리 무림이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해도 천무방과 백 사부께 아들 녀석을 맡기면서 좀 안심했었는데. 이번 전쟁은 너무 크고 치열했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우리 가문이 싸울 능력은 부족해도 지원할 돈은 있으니 아들녀석 얼굴도 잠깐 볼 겸 우리와 거래하는 상단을 끌고 왔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돈황까지도 거리가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맹주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후우……! 멀리서 지켜보는데 천둥번개가 막 몰아치고 바람도 거칠고 기운도 섬뜩해서 가슴이 몹시 떨렸는데……, 마침 조용해졌기에 왔는데 이거 정말 끔찍하군요.”

항연이 전장을 둘러보면서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전장의 바깥쪽이니 모든 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사방에 널브러진 피와 살점들, 주인을 잃은 팔다리는 쉽게 눈에 뜨였고 수습하기 위해 옮겨진 시신들을 작게 모아놓았는데 그 작은 덩어리 수만 눈에 들어오는 걸 헤아려봐도 백여 개는 될 듯 보였다.

“그럼 맹주께 인사드리러 가시지요. 수아도 소식을 듣고 바로 올 것입니다.”

“그럽시다.”

항연이 대답을 하고선 뒤돌아 상단 일꾼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막사들을 치고 쉴 자리들을 만들어라. 시신들 옮기는 것도 좀 돕고…… 그래, 식사 준비도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예, 가주님.”

일꾼들과 상인들이 부리나케 움직이는 사이 백두기와 항연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곧 항수가 두 사람 가는 길 앞에 나타나 아버지를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아버님!”

“오오! 그래, 몸은 괜찮으냐?”

안위를 물어보는 항연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항수는 탄탄한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채였는데 곳곳에 타박에 의한 피멍과 베이고 찢긴 상처들이 금방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급 옷만 입히며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 녀석인데 순식간에 많은 상처를 몸에 안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린 것이다.

“고생한 티만 내고 활약이 적어 사부님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쯧쯧쯧…….”

“그 난리 통에서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내게 배운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살아남은 것은 네 주의력이 깊었던 탓이다. 사부가 가주님을 뵐 수 있는 면을 네가 세워준 것이야.”

“송구합니다. 더 정진해서 사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천무방의 가입은 소적문이 더 빨랐지만, 백두기가 본격적으로 제자로 거둔 건 항수를 제자로 들인 다음이었다. 물론 이는 천무경과 백두기가 항연을 배려한 조치이기도 했다. 항연의 아들 항수가 소적문보다 나이도 많고 가문의 위상도 있었으니 이 부분을 신경 쓴 것이었다.

“그럼 전 동료들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의원도 데려왔으니 늦지 않게 치료받거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항연의 당부에 항수가 대답하며 물러났다.

천무경은 구치상, 남궁평을 곁에 두고 전장을 걷고 있다가 백두기와 함께 온 항연을 만났다.

“항가주.”

“맹주님과 창천단주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항연이 놀란 얼굴이 되어 구치상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초췌한 건 둘째치고 자기 아들처럼 상체를 드러낸 채였는데 허리에 감은 붕대가 심상치 않았다. 피로 붉게 물든 자리가 단전이 머무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구치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네. 칠성도존으로서의 명성을 오래도 끌어왔어.”

“몸은 괜찮습니까?”

“당문주의 솜씨가 좋았네. 기혈을 금방 안정시키고 단전도 다시 자리 잡게 해주고……. 덕분에 이리 걸어 다니는 것일세.”

“구 장문인께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단주께선 칠성파의 기둥이었는데.”

“죄송하게 되었지.”

구치상이 쓴웃음을 짓자 옆에서 듣던 남궁평이 입을 열었다.

“칠성도존의 경험과 도학(刀學)의 깊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도존의 명성을 이을 수 있는 도객이 강호에 나온다면 그건 구 단주님의 가르침이 머무는 칠성파일 것입니다.”

“내…… 정파인들의 말이라는 걸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들어왔는데, 내 오만함을 내려놓을 상황이 되니 당문주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진심이란 게 좀 느껴지더군. 화산파 아이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도 미안해지고…….”

“하하, 천무방 백무당주인 절 정파인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남궁씨의 피를 이었고 남궁가의 무공을 쓰는 자가 정파오대가의 정신을 계승하지 않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늘이 되어준 천 맹주께 감사할 일이네.”

남궁평은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한 눈치로 구치상과 천무경을 차례로 보았다. 천무경은 그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진 않았으나 구치상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천무경이 항연에게 던진 말은 그의 마음을 크게 동요케 했다.

“항가주. 언제고 안휘 어딘가에 무가가 하나 세워진다면 도움을 부탁드리오. 천무방만큼 멀지 않은 곳이니 괜찮은 거래 대상이 되지 않겠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때를 기다려보겠습니다.”

“방주님, 저는……!”

“백무당주,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네. 마무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지.”

남궁평은 자신이 마음속에 품었던 어설픈 소망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천준에게도 들려준 적이 없었던,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소림사의 범굉과 사대금강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천무경이 정파무림의 봉문해제를 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도 연이어 떠올랐다. 그리고 천무경은 천무방의 품 안에서 남궁씨 마지막 남은 적통인 그를 남궁세가로 놓아주려 하는 것이다.

천무경이란 인물의 그릇은 도대체 어디까지 커질 수 있단 말인가?

감정이 꿈틀하는 남궁평의 그런 마음을 천무경은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구치상의 제자인 도인범이 그들에게 바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맹주님!”

“무슨 일이냐?”

구치상이 도인범이 달려온 연유를 물었다. 도인범이 숨을 고르면서 대답하려 입을 여는데 그의 표정이 묘한 느낌이다.

“하아, 하아! 사부님, 맹주님, ……범굉대사와 홍 방주, 두 부맹주께서 정파 세력을 규합한 이진(二陣)과 함께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반 시진…… 정도면 이곳에 당도할 것으로 보입니다.”

도인범의 보고에 모두 행동을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들 고민하는 순간에서 때마침 근처에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사파 무림인 한 명이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싸움도 다 끝난 마당에 인제 와서!”

이 외침은 이 전장에서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들은 아직 현장에 당도하지 않았지만, 창천단의 살아남은 정파인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싸움이 끝났다고 누가 그러더냐?”

천무경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

“마교주가 멀쩡히 살아있고 아직 처치하지 못한 마교의 절대고수들이 몇 남아있는 게 확실한 지금 상황에서 이 전쟁이 끝났다고 누가 그러더냐?”

“그건…….”

“그건 살아남은 네가 이 전쟁에 몹시 지쳤다는 이야기로구나.”

분통을 터뜨린 남자는 명사파(冥邪派)라는 사파무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문파의 최고수 원철(遠鐵)이란 이름의 남자였다. 그는 명사파 수준을 높이기 위해 동료 스무 명과 함께 창천단에 가입했으나 지금 시점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를 포함해서 단 셋뿐이었다.

원철은 만약 정파무림의 지원이 제때 도착했다면 동지들이 적어도 다섯, 혹은 열 명까지도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하지만, 천무경에게 직접 질문을 받자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야기한 전쟁이었지만, 천무경의 위상은 마교주와 대결한 것으로 인해 더욱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었다.

천무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목이 그를 향해 쏠려 있었다.

침묵이 현장의 분위기와 뒤엉켜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천무경은 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창천단에 가입한 정파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으나 그들은 우리 사파무림과 함께 기꺼이 싸워주었다. 그렇게 사파무림의 동지들과 함께 죽어가고 지금 곁에 살아남은 그들을 동지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서라. 무슨 말이 됐든 들어주겠다.”

천무경이 잠시 기다려주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구치상의 지휘 아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싸운 시간이 절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는 있었다.

“……백 년도 더 전에 있었던 혈마지란 때 정사는 반대된 입장에서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요. 그리고 맹주께선 정파와 사파 통합 연맹의 수장으로서 그간 양측을 조율하고 중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지요. 그렇다면 맹주께서 우리 사파무림을 당시 혈마지란 때의 정파처럼 희생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내몬 거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첨문(羅尖門)의 악의지사(惡意智士) 봉오석(鳳烏夕)의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을 들은 구치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봉오석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천무경은 사파의 선제적 희생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 혈마지란의 업보를 상기시키기도 했었다. 다만 지금과 같은 전쟁의 결과를 예상하진 않았기도 했고 천무방이 전면에서 움직임으로써 책임을 끌어왔으니 기꺼이 따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무경의 표정엔 한점 흐트러짐 없었다. 그는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봉오석을 똑바로 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자네 말대로 분명 그렇게 고려하고 선택한 측면이 있네.”

“예?”

천무경이 바로 수긍할 줄 몰랐던 봉오석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당당한 태도 때문에 더 당황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파의 추가적인 전력 규합을 계속 기다렸다면 전쟁터는 이 사막이 아니라 중원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강호는 마교도들이 활개 칠 마당이 되었을 것이며 우리는 다시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뭉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각개격파 됐을 것이다. 나의 이 판단이 틀렸느냐?”

“그건…….”

“아니, 판단하지 말게. 그것은 지금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도 말했다시피 나는 정사연맹의 맹주로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네.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의 성패는 이 전쟁의 승패로 판가름 날 것이고 훗날 강호의 평가를 받겠지. 나첨문의 봉오석.”

“예, 옙!”

봉오석은 천무경이 자신의 출신과 이름을 정확하게 알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일견 두려울 수 있는 대목이어서 봉오석은 절로 복종하는 자처럼 대답해버렸다. 나첨문이 명사파보다 규모가 더 떨어지는 문파였음을 고려한다면 천무경이 그런 문파와 그에 속한 인물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천무경이 그런 봉오석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천무경이의 자리는 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자리라네.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봉오석이 대답하는데 말꼬리가 흐려졌다.

기가 죽기도 했지만, 천무경이 이야기한 창천맹주로서 지닌 책임의 무게에 공감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기점으로 천무경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던 생존한 무림인들의 분위기도 분노는 가라앉은 채 엄숙함이 흐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