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98화 (398/432)

398화 - 제75장. 개관사정(蓋棺事定) (3)

무림과의 전쟁을 위하여 천마신궁의 가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전력을 끌고 나갔다.

애초에 신강 지역은 인구도 적고 천마신교를 적대시하는 문파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천마신궁엔 마군위들이 흑궁을 포함한 신궁 내 시설을 지키고 궁궐의 길 사이사이를 지키는 순찰 인원들이 기억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광경은 무엇인가?

단지운은 자신이 이 궁궐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황량함에 조금 당황했다.

제육천마라대전 안에서부터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

처음엔 황량함 속에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한구석에 구겨진 채 방치된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침입할 적들도 없을 텐데…….”

단지운은 서둘러 주변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나아갈수록 발견되는 시신은 더욱 늘어갔지만, 마주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시야에 마니사의 산문과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야마! ……스칸다!”

마니사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이곳을 지키던 지주의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염황신마의 구출이 실패로 점쳐졌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향했던 스칸다까지 돌아오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아 그의 이름도 부른 것인데 역시 조용하다.

모든 게 낯설고 을씨년스럽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주먹 쥐는 데 으스러질 듯 힘이 가득 들어갔다.

세상에 천마신궁 안에서 볼 수 있는 게 시체뿐이라니?

문득 그의 뇌리에 스치는 장소가 있었다.

발걸음을 거의 두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쳤던 곳.

‘성혈궁!’

단지운이 경공을 펼쳐 성혈궁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역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성혈궁 입구 주변에 성혈교 승려들과 마군위 몇몇의 시신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적습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것인가? 아니…….’

보면 볼수록 생각이 달라진다.

시신들이 쓰러진 구도가 앞선 생각처럼 여기기엔 미심쩍어 보였기 때문이다.

성혈궁 정문도 어째선지 흑궁처럼 닫히다 말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열린 폭이 더 컸다.

‘문 닫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

단지운은 그대로 성혈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층의 회랑을 가로질러 2층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1층 회랑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표정이 굳어지며 그대로 빠르게 5층까지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최상층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반대편 문을 열고 옥상 바깥으로 가서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건 그 어떤 사람도,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성혈교도 함께 기습받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지금 올라오면서 보아온 상황들과 더불어 입구 쪽에서 마군위와 승려들 시신의 구도가 어쩐지 마주하는 형국이었음을 상기하는 순간, 단지운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며 팔을 휘둘렀다.

꽈앙!

홧김에 휘두른 주먹에 부딪힌 5층 성녀실(聖女室)이 통째로 박살이나 무너져 버렸다.

“성혈신마. 지금 네 처신이 아유타의 지시에 의한 것이더냐?

“아미타불. 빈승의 지금 처신은 빈승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빌게포첸과 나눈 짧은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계시의 날이 오기 전까지 빌게포첸은 분명 교주령을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이미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교주께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날이 왔을 때,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을 향해 몇 마디 던진다 한들 누구도 멈추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성혈궁도 그날이 왔을 때, 아마 ‘올바른 선택’을 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그전까지는 교주님께 최선을 다하여 보좌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교주님의 마도대의를 위해, 천마신교의 종복 성혈교의 교주로서 말입니다.”

아유타가 그에게 남겼던 말들도 연이어 떠올랐다.

‘아유타! 내 마도대의 실현을 위하여 성혈교와 빌게포첸이 날 도울 거라 얘기했던 것은 결국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인가? 성혈교의 대라마, 대스승이란 호칭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오, 빌어먹을!’

검은 태양으로 상징하는 계시의 모습은 옥문관 전투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단지운으로선 아유타와 빌게포첸이 자신을 말로도 농락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운은 올라왔던 계단을 통하지 않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다시 성혈궁 입구 쪽으로 내려왔다.

다시금 눈에 담기는 입구 정원의 풍경들도 이미 많은 걸 설명하고 있었다.

‘아유타와 성혈교 승려들은 여길 완전히 떠났어. 그러니 성혈궁 내부에는 시신이 없고 입구에만 승려들의 시신이 있었던 거겠지. 나가면서 막아서는 마군위들과 부딪쳤고 결국 그들을 모두 죽이고 떠난 것이야.’

피식!

걸음을 옮기는 단지운의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더 큰 웃음을 불러내었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실소를 이어가던 단지운이 끝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아무도 없을 천마신궁이 있는 요마산엔 산짐승조차도 숨죽여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분노를 시작으로, 감정적 광희(狂喜)에 이르렀다가 허망함마저 담아낸다.

꺄올…….

요마산에 사는 어린 늑대의 눈망울이 눈물에 젖은 채 조심스럽게 울었다.

“네게도 저 웃음소리가 슬프게 들리나 보구나.”

어린 늑대가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가 한 노인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숲속으로 도망쳤다. 노인도 슬픈 눈, 우울한 표정으로 늑대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엔 산등성이에 숨듯 지어진 무영각 지붕의 끄트머리가 햇빛 속에 조심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저벅저벅…….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단지운이 웃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천마신궁에서 느껴진 단 하나의 인기척이었으니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누구의 기척인지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조금 뒤 휘어진 길모퉁이에서부터 어린 늑대와 마주쳤던 노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권 각주.”

“교주님을 뵙습니다.”

노인은 바로 무영각주 권영서였다.

“……내가 무영각을 살펴볼 생각을 안 했군. 그래, 거긴 몇이나 남았는가? 아니, 이렇게 묻는 게 이상하게 들리겠군. ……내게 전할 이야기들이 있는가?”

권영서는 단지운이 어떤 심정으로 묻는지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천마신궁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엿새 전, 천마신궁에 적습이 있었습니다.”

“적습? 성혈교의 배신이 아니라?”

“성혈교의 배신. 흐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단지운은 권영서로부터 들을 게 없다고 여겼으나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소상히 말해보라.”

“침입자는 50명 남짓. 면면의 정체를 모두 알기 어려우나 서하에서 살문 계획을 분쇄했던 천무방 주요 전력 중 하나인 황검당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천마신궁에 주요 고수들이 모두 빠진 틈을 타 후방 교란 목적으로 빈집을 털었다……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흥경에서 여기까지…… 이천여 리. 환도마종의 천도환위술이 아니면 당도하기 어려울 텐데.”

“그들은 흥경에서 일이 끝난 후, 하서주랑을 따라 옥문관까지 저희가 심어놓은 관부 인물들을 곧장 암살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저희 심부로 바로 향하고자 했다면 도달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옥문관을 지키던 관군이 흩어져 텅 비어있었던 거로군.”

단지운이 광혈마종을 데리고 옥문관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왜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지?”

“족적을 파악한 시점이 조금 늦기도 했었고,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무영들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뒤이은 말이 더욱 심각하게 들려온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들은 천마신궁에 남은 마군위들 모두를 죽였고 성혈교와도 부딪쳤으나 대라마 아유타가 싸움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천마신궁을 나섰습니다만, 배신이 목적인지는 판단불가입니다.”

“하라는 대답은 하지 않고…… 권 각주, 또 나를 농락할 셈인가?”

단지운이 으르렁거리자 권영서가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교주님, 태상교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단지운이 반문하면서 자신이 무림의 강적들과 싸우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상기했다.

“하하하하! ……자네가 하는 모든 말들 가운데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말이 바로 내 아버지에 대한 말이지. 그래, 나를 이곳으로 돌려놓도록 모든 걸 계획해놓았으니 기다렸다가 날 데려오라고 하시던가?”

권영서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단지운이 다시 말을 이어서 쏘아붙였기 때문이었다.

“……마귀성. ……그래, 천마신교의 태상교주라는 분이 교주와 교단의 패배를 확신한 채로 무엇을 계획하셨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권영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단지운의 분노에 대해 일전엔 큰 두려움을 느꼈었다면 지금 그의 심정이란 그저 무력함뿐이었다.

“마귀성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제가 아는 모든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시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단지운은 이전과 같은 어조로 화를 내고 있었지만, 권영서의 어조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천마신궁에서 잠시 떠나서 있었던 그 사이에 심정적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좋다. 가자, 마귀성으로.”

“예, 뒤따르겠습니다.”

단지운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자 권엉서가 그 뒤를 따라갔다.

경공을 펼치며 궁궐 안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두 신형이 천마신궁을 나와 요마산 산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귀성.

단지운에겐 안내가 필요하지 않은 사막 속 그곳에서 단원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준비하고 있단 말인가?

천마신교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면서까지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했듯 지고한 경지를 추구하는 자에겐 위상이라는 이름의 경계란 무의미한 법이다. 그런 초연마도(超然魔道)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귀성으로 오너라. 내 길을 닦아 놓고 너를 기다리고 있겠노라.”

마니사 앞에서 단원진과 나누었던 대화 가운데 한 부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체 그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 무엇을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거기서 날 위해 뭘 준비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해왔던 천산에서의 일들조차 다른 관점에서 보면 본교의 과업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가는 길 속에서 권영서는 그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을까?

“권 각주, 모든 걸 얘기하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말하게.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무영들이 남지 않게 되었다는…… 그 말에 대한 설명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권영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남은 무영들은 일월신마에게 붙은 둘 그리고 전장에 데려가신 광혈신마 혁무술과 혈마 구마진에게 붙은 넷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귀성으로 집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마귀성 축성을 위해 말입니다.”

“뭐? ……축성?”

“말 그대로입니다만, 그것은 직접 보시고 태상교주께 얘기를 듣는 편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듣기에 양립할 수 없는 ‘목숨을 바치는 행위’와 ‘축성’.

단지운은 권영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권영서는 천천히 그가 묻는 것들을 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교주가 궁금했던 것들을 풀어주기 위한 문답이겠으나 권영서의 지금 마음가짐은 그런 공적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짊어져야 했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를 덜어내기 위해서.

그리하여 가까운 종래엔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천마신교의 무영각주 권영서의 마음가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