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 제74장. 하늘 아래 두 혈마는 존재할 수 없지 (5)
단지운의 기분은 심각한 지점까지 치달아 있었다.
파천무봉 천무경은 애초에 명성에 비해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넘어서 완전히 충족시켰다. 단순히 힘의 우열이 아닌 오히려 마를 무위로 돌리는, 그의 기준에서 볼 때는 파마현경(破魔玄境)이라 할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흑사왕 금태하는 그가 예상했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금태하의 암천대계가 내포한 이치는 마치 마천경을 연상케 하여 지배 영역이 엎치락뒤치락할 정도의 믿을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 그 어둠에 숨어 엄습해오는 무형강기의 위력은 비록 그 기척을 읽어내어 피하고 막을 수 있다곤 하더라도 단지운도 감탄할 만한 마공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가시적으로 위협해오는 그런 마공의 특징들은 말 그대로 겉모습과 할 뿐 지금 그가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함의(含意)는 아니었다.
흑사왕 금태하는 어떻게 마도인이 되었나? 어떻게 마성을 품게 되었나?
천마신교를 구성하는 마도는 정말 다양하다.
천마도(天魔道)와 구주마도 그리고 기타 대표되지 못한 다양한 마도.
그리고 이것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스스로 자생한 마도이거나 천마도에서 파생된 마도라는 것.
여기서 자생한 마도라는 것은 욕망의 본질을 무공에 투영해 극단을 자극함으로써 가는 하나의 무도(武道)인 것이고 자기 안에 마성을 잉태하는 것을 무엇이 되었던 원초적 본질에 심상이 닿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감춰진 맹점이 하나 있었으니 아무리 독자적으로 발전한 마도라도 종국엔 천마신교의 테두리 안에서, 그 어떤 마도도 예외 없이, 천마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마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천마 아래 만마의 종속.
그것은 천마조사 단용후부터 단원진까지 이어져 온 마도설계였고 단지운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금태하는 달랐다.
직접 부딪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금태하가 품은 마성의 잠재력은 마치 천마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당장 가진 힘은 당연히 비견될 수 없으나 그런데도 타고난 본성은 종속을 거부한 채, 마치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새끼 맹수처럼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셈이었다.
아니, 금태하는 새끼 맹수가 아닌 이미 상당한 성체나 다름없다.
아니, 암마성(暗魔性)이란 괴물은 벽력을 소환할 수 있는 청룡의 도움을 빌려 천마성을 향해 굴복하라 요구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단지운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면서 끔찍한 고함과 함께 마기를 터뜨린다.
천마신공 파순욕천항불려(波旬慾天降佛勵).
그것은 천마성 본성에 잠재된 천마신공의 극의.
대자연의 조화를 역전시킴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대마공(大魔功)의 무질서한 소용돌이가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니 그가 일으킨 마천경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콰-!
“위험!”
천무경이 비상한 경종을 울리며 급히 거리를 벌리며 방어에 전력을 쏟았다. 귀원진무경의 힘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으나 만약 파천신공 뿐이었다면 여지없이 먹혀버렸을 위력을 실감했다.
“칫!”
금태하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암천대계를 다시 자신 주변으로 집중하면서 무형의 벽을 치며 덮쳐오는 혼돈의 폭풍을 버티려 애를 썼다. 마천경에 의해 그도 힘의 상승효과를 누렸고 그 덕으로 단지운을 상대로 활개칠 수 있었으나 지금은 항거할 수 없는 폭압에 간신히 두 다리를 버티고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 위협은 진도건과 구마진의 전장에도, 외곽으로 대피했던 천무방과 창천단 무림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바깥으로 퍼질수록 혼돈의 밀도는 줄어들었으나 스스로 버티려 했던 어지간한 절정고수들도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오직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선 혼비백산하여 바깥으로 달아난 자들만이 수초의 목숨을 벌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절정고수 이상의 특별한 경지를 이루지 못한 자는 조화를 무너뜨리는 대혼돈의 폭풍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한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선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폭풍 속에서 피까지 토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여럿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초가 일분으로 느껴지는 고통의 시간.
그것이 실제로 불과 5, 6초 정도만 흘렀기에 더 끔찍한 인내를 강제하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것이 깨진 건 또 다른 혼돈의 소용돌이로 인해서였다.
흡성대법.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는 마공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지식이었다.
통상 무림인을 상대로 펼치기에 선천지기 대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양의 내공이 흡수되는 게 도드라져 보일 뿐, 결국 근원적인 생명력을 빨아들인다는 점에서 매우 잔혹한 마공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내공을 흡수하는 마공으로 알려진 건 선천지기 이상의 생명력까지 갈취하는 행위는 시전자의 영혼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는 통속적 미신 때문이었다.
이종의 내공들이 섞이는 것만으로도 하단전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는데 만약 선천지기까지 탐을 내어 빨아들였다가 자신의 선천지기까지 오염되면 불문선도(佛門仙道)의 수행자가 아닌 이상 선천지기를 다스릴 도리가 없는 마도인에겐 탈출구가 없는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대 사용자 대부분은 내공의 흡수에 목적을 두면서 선천지기를 과도하게 흡수하는 우를 범하려 하지 않아 왔었다.
그런 면에서 구마진의 생명력 갈취 행위는 흡성대법 시전자로서 금도를 어긴 셈이었다.
당연히 구마진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오곤 했었으나 결과적으론 천마신교에서 제조한 홍천환을 큰 폭주 없이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렇게 흡성대법을 역대 시전자들보다 가장 잘 익히고 사용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구마진은 당연하게도 진도건이 가진 모든 걸 흡수해버리겠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다.
“끄으으윽……!”
흡성대법이 시전되는 순간, 진도건은 순식간에 엄청난 진기가 구마진에게 강제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혈마다! 하늘 아래 혈마는 오직 하나,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될 것이니! 내놓아라! 네 영혼 밑바닥까지 모두 다 내놓거라! 크하하하하!’
그 순간 머릿속으로 구마진의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탐욕스러움이 웃음 사이로 악다문 이가 벌어질 줄 몰랐으니 지금 들려온 이 목소리는 육성(肉聲)이 아닌 심성(心聲)이 분명했다.
“킥킥킥킥……!”
혈마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에 갇혔던 진도건의 적안에 구마진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기겁하는 모습이 비쳤다.
그 순간 진도건은 자신이 무의식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천지간에 피로 그득한 세상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갑작스럽긴 했으나 익숙한 느낌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 붉디붉은 세상에 그 한 사람만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모습을 한 혈마도 눈앞에 나타났으며 구마진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뭐, 뭐야? 도대체 뭐야! 여긴 어디야? 어떻게 너가 둘이……!”
구마진이 황망한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피로 그득한 이 같은 세상을 처음 보기도 했거니와 흡성대법을 시전하던 그 상황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도건이 둘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으니 황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자꾸만 잡아끄는 건 그가 아는 모습의 진도건이 아닌 어쩐지 모습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보이는 진도건쪽이었다.
“서, 설마……!”
혈마성을 받아들였으니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저 붉게 물든 진도건은 진도건이 아니라 혈마라는 것을.
구마진이 당황하여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붉게 물든 채로 그의 모습을 한 존재가.
그러다 시야에 자신의 두 손에 잡혔다.
아수라 풀로만에 빙의되었던 때와는 다른 붉게 물든 두 손이 눈앞에 있었다. 일부만 남았던 끊어진 아수라의 각인들도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깨달았다.
“서, 설마 네놈은 혈마가 된 게 아니라…… 안에 품고 있었단 말이냐?”
마치 자신이 아수라 풀로만의 영혼과 같은 것에 내면의 한 공간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난 줄곧 나였다.”
진도건이 대답했다.
예상된 대답이었음에도 그것은 자체로도 구마진에게 충격이었다.
“어, 어떻게 마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록 적이었지만, 구마진이 싸우면서 느꼈던 진도건의 무공이나 기도 등은 마교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같은 마도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으니 유변에게 그리했듯 흡성대법을 시전한 것인데 지금 이렇게 자신도 세상도 그리고 상대편의 혈마도 피로 물든 이곳에서 진도건만큼은 온전히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자기 모습을 너무나 선명하게 유지하는 것.
그 순간 구마진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마로 가득 찬, 혈마 본성으로 가득 찬, 이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오직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건 불문선도의 수행으로 일구어진 깨끗한 영혼이라는 것.
“이, 이럴 수가……! 네놈은, …네놈은……!”
“큭큭큭큭! 감히 이 몸을 삼키려 들다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앙?”
혈마의 목소리에 구마진이 놀라 그를 보았다.
철퍽철퍽!
혈마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도건의 얼굴로 만면에 피운 광기 어린 웃음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 이익! 넌 내 것이다! 내게 복종해라! 내가 혈마! 천하에 단 하나뿐인 혈마가 바로 나란 말이다!”
구마진이 미친 듯이 외치면서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쿠쿠쿠쿠……!
혈마 구마진답게 이 공간에서도 그는 백귀혈마공으로 위협적인 혈마강기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혈마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씩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파앙!
“어……?”
구마진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혈마의 손짓 한 번에 그가 일으켰던 모든 혈마기의 물결들이 일거에 깨어지면서 그의 머리 위로 피의 비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후두두두…….
잠깐 떨어지고 말아야 할 피의 비가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선 이 세상.
아래는 피의 바다.
위에는 피의 하늘.
모든 하늘에서 바다를 향해 피의 비가 떨어져 내리면서 그들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구마진은 무심코 자기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자각했다.
떨리는 고개를 간신히 움직여 진도건을 보았다.
자신도, 혈마도 피의 비에 온몸이 적셔지는 이 세상에서 오직 진도건의 모습은 눈부신 느낌이 들 정도로 자기 모습을 밝게 유지하고 있었다.
한 구석 젖은 데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난 혈마인데……, 내가 혈마인데…… 어째서?”
구마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진도건은 무심한 듯 혹은 한심한 듯한 감정이 담긴 적안으로 구마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끌리며 혈마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내가 널 살렸네?”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묻는 혈마에게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네가 날 살렸어.”
“크크크크! 마음에도 없는 소릴.”
후욱!
순간 혈마가 땅이 꺼지듯 모습이 사라졌다가 구마진의 앞에 나타났다.
구마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혈마의 두 손이 구마진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다.
“커억!”
구마진이 비명을 질렀다.
혈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머리를 구마진의 머리 옆으로 가까이 붙이더니 그대로 목을 물어뜯었다.
카득!
“끄으…… 으아아악!”
구마진은 혈마를 떼어 놓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혈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은 더욱 깊이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더 날카롭게 솟아난 송곳니가 목덜미 깊이 파고들었다.
촤아!
발 디디고 서 있던 피의 바다에서부터 핏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구마진과 혈마를 동시에 휘감았다.
알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헤집는다.
비명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으나 귀는 멍멍해지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백귀혈마공을 다시 시전하려 했으나 발현되는 어떤 것도 없이 모두 혈마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흡성대법을 시전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향하여야 할 모든 흐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쌓아 온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