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 제74장. 하늘 아래 두 혈마는 존재할 수 없지 (3)
진도건이 몸은 구마진을 향한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잠시 살폈다.
전장의 열기로 인해 아직도 식지 않은 수많은 시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고작 한 사람의 죽음을 보았을 뿐이다. 하필 그 한 사람이 저 청명이라는 도사였을 뿐이지 적어도 이 전장에선 그 누구도 여기서 쓰러진 사람들보다 죽음이 무겁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죽음들이 더 있을 것 같아 두렵고 화가 난다. 이 싸움을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소?’
진도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천서은이 청명을 향해 달려갔을 때, 그의 움직임이 한 박자 늦은 것은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왔기 때문이었다.
“풀로만이 이성을 상실했군. 선을 크게 넘었어.”
마하발리.
진도건이 도리천에서 내려와 다시 이 전장에 나타나길 기다렸으며 마침내 아수라왕으로서 개입해야 할 상황까지 도래했음을 알렸다.
“냉정하게 나 혼자로선 지금의 저놈을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길을 알려주십시오.”
“인간 세상에 남긴 수라도의 쌍검이 가까이 있다. 그것을 취하라.”
마하발리의 이야기에 진도건이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전장을 살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멈추어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진도건은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백 장로님!”
진도건이 힘을 실어 외쳤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갈 듯한 자세를 취하려는데 백두기가 먼저 의도를 깨닫고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어깨 위로 향했다.
백두기의 그 모습에 진도건이 멈칫했다.
백두기의 손안으로 두 자루 검이 빨려 들어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는데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그 검들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가져가라!”
백두기가 힘껏 외치며 진도건을 향해 던졌다.
두 자루 검이 전장의 허공을 가로질렀다.
진도건이 군자검을 검집에 돌려놓곤 몸을 날려 두 손을 앞으로 펼치면서 염력으로 쌍검을 당겼다.
손안으로 날아드는 특색있는 쌍검의 형상이 눈에 익숙했다.
‘일월쌍고검! 이장로님은 역시……!’
언젠가 혈마가 제법 큰 존재가 죽은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장태환을 가리키는 암시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더 큰 반응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월쌍고검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진도건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혈마단의 마기가 전신을 통해 바깥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역의 경계에서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혈마의 모습이 바깥으로 체현되기에 이르렀다.
“크흐흐흐! 그랬군. 그 쌍고검, 일종의 귀문(鬼門)이었던 것이야.”
진도건은 혈마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마하발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그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일월쌍고검은 본디 수라도의 귀물로써 옛날 인간도에 내려와서는 수라도를 연결하는 일종의 귀문 역할을 하지. 주인 인간이라면 그 쌍검의 전임자처럼 자신의 기력에 귀기를 담는 수준을 기대하는 데 그치겠지만, 인간의 껍데기에 씌지 않은 영혼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이것으로 차이는 사라졌다.”
진도건은 혈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영역의 경계에서 보았던 그 상태와 다름을 깨달았다.
혈마의 의식이 아직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으로 나타난 혈마의 형상은 이내 그 모습을 달리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크기가 커지면서 혈무로 이뤄진 삼두육비 아수라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거대한 혈사(血蛇) 한 마리가 환영처럼 어른거리며 아수라 주위를 맴돌았다.
일찍이 보았던 적이 있는 광경에 진도건이 잠시 주춤할 때, 또 다른 반응이 구마진의 쌍귀면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어, 어째서 브리트라 네놈이……!”
“설마 마하발리가 보냈느냐? 하지만, 대체 어떻게……?”
구마진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쌍귀면으로부터 흘러나온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연결된 아수라 풀로만으로부터 두려운 감정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냐? 대체 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공포감은? 게다가 저 붉은 형상은 대체 뭐지?’
구마진 자신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은 직감에 다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무슨 헛수작인 줄 몰라도 다 죽으면 끝나겠지!”
퉁!
구마진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순간, 진도건도 거의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양측의 붉은 마기가 소용돌이치면서 맹렬히 부딪치고 그 속에서 진도건과 구마진의 신형도 빠르게 얽혔다.
하지만, 그 판단은 구마진으로선 패착이라 할 수 있었다.
두 붉은 기류가 얽히는 그 순간, 갑자기 공중에 두 명의 아수라가 현현하여 힘을 겨루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데 혈사가 다른 아수라의 몸을 꽁꽁 동여매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구마진의 얼굴과 어깨 위로 나타났던 쌍귀면과 네 개의 팔이 사라지면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니 당황하여 다급히 진도건으로부터 거리를 벌린 것이다.
“뭐, 뭐지?”
몸에 새겨진 각인도 흐릿해지고 붉어졌던 피부도 조금씩 돌아오는 게 눈이 보였다.
온몸에 흐르던 귀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기분으로 두 아수라를 바라보았고 그 광경은 진도건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아수라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풀로만! 복수심에 눈먼 너의 어리석음이 육도의 혼란을 부추겼다!”
“브리트라! 네가 어찌 마하발리의 지시를 따르느냐?”
“크크크! 인간도로의 불침은 수라도의 불문율. 네놈의 장단 덕분에 신선놈들과 신나게 싸울 수는 있었다만, 그걸로 이 브리트라를 유도하여 마하발리까지 묶어두려 한 것은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뭣이?”
“나야 아무렴 상관없다만, 네놈의 만행을 마하발리만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천상도에서 사신으로 샤치를 내려보냈다. 아수라도의 근본과 연결된 마하발리는 인간도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나로 하여금 네놈을 끌어내려달라는 것이다.”
“샤치……! 나의 딸! 제석천 이 개자식이! 네놈은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것이냐?”
“네놈을 다시 아수라도로 끌어내림으로써 나는 제석천과 싸울 권리를 얻을 것이다. 네놈은 고작 해봐야 샤치 때문에 생긴 은원이지만, 나는 오직 제석천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 놈과 싸울 수 있다면 네놈의 은원 따윈 내 알 바 아니지. 크하하하하하!”
“이익, 브리트라……!”
풀로만과 브리트라의 형상은 다른 이들에겐 피의 소용돌이로 이뤄진 구름처럼 보였으나 구마진과 진도건에겐 그 형상들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었던 이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세상에 꺼내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
쿠드드득……!
“끄어억……!”
풀로만의 형상이 본래는 브리트라의 흑사라 할 수 있는 혈사에 옥죄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리트라가 그 거대한 몸체와 여섯 팔로 풀로만과 혈사를 함께 감싸 안으면서 마치 자신 안으로 품듯 했다.
나타났던 모든 형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구마진과 진도건 각자의 혈마기를 묶어두었던 귀기가 마치 증발하듯이 사라져갔다.
구마진은 멍해진 표정으로 자기 몸을 살폈다.
새겨졌던 각인들이 일부 몸에 남긴 했으나 대부분 형상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면서 마치 역할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붉어졌던 피부도 절반쯤은 원래 살색으로 돌아왔다.
신체 변화가 일부 남았다고 해서 아수라의 귀기가 일부 남은 건 아니었다.
단지 홍수가, 태풍이,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극심한 상흔이 몸과 영혼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촤아아아……!
머리 위에 떠 있던 혈청옥마저 깨지더니 대량의 피가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 순간 구마진이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크으윽……!”
극심한 신체 손상을 안겼던 자리들에 흉측한 흉터가 나타나면서 귀기에 묻혔던 고통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신체 회복은 진짜였는지 다시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잠깐 멍해졌던 정신이 깨어나면서 눈앞의 현실을 바로 보게 했다.
진도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모습으로 두 손에 쌍검을 쥔 채 가만히 서서 그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방금 상황이라면 구마진으로서 큰 빈틈을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라 즉각 달려와서 그 쾌검을 휘둘렀으면 손쉽게 목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
‘무슨 여유를……?’
구마진의 생각은 그 의문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냉엄한 현실을 금방 깨달은 것이다.
아수라 풀로만이 다시 아수라도로 쫓겨난 그 순간, 다른 흑각수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발생했다. 아수라의 귀기를 잃어버리면서 기존의 상태로 되돌아 가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들과 싸우던 무림의 고수들이 잠깐 주춤하긴 했지만, 적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으니 금방 정리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즉, 지금 그들만의 작은 전장 안에서 구마진은 혼자만 남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진도건이 서둘러 그를 공격하지 않고 지켜본 것이다.
아수라 풀로만에 빙의되었을 때는 몰랐던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강정학, 강도혁, 안효철, 당혁수, 영은성, 최현걸, 백두기, 남궁평이 오직 구마진 한 명을 향해 선 채 차가운 침묵으로 죽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청명의 시신 옆에서 슬픔을 분노로 훔치는 천서은의 눈길 또한 달가울 리 없었다.
적대관계를 넘어서 패설을 입에 담았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터.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구마진을 처단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진도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큭큭큭……! 뭘 그리 서 있느냐? 어디 내 목숨을 가져가 보아라.”
“하늘 아래 두 혈마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던가?”
“물론이지.”
구마진에게서 붉은 마기가 크게 방출되며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수라 풀로만이 떠나갔어도 그는 여전히 천마신교의 아홉 신마 중 한 사람인 혈마 구마진인 것이다. 하단전에 자리 잡은 끝을 모르는 방대한 내공은 이미 혈청옥을 운영하는 동안 꽤 회복된 상태였다.
‘마음껏 싸우기엔 충분해. 기회를 잘 엿보면 도주도…… 쳇, 역시 이건 어렵겠고. 하지만…….’
구마진의 적안이 빛났다.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그의 적안은 유일한 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활로는 역시 진도건에게 있었다.
진도건도 혈마기를 방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래, 이제 너와 나 둘 중 하나만 남을 싸움을 시작하자.”
“혼자 싸울 셈이냐? 다 덤벼도 까짓거 상관없다만. 크크크!”
모두가 구마진의 그 말이 허세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아수라 풀로만에 빙의하여 급변하기 전에도 이미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고도 강력한 강적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다.
특히 천서은과 영은성, 최현걸 그리고 화경의 고수 당혁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터였다.
하지만, 모두 무거운 눈빛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도움을 바란다면 나서겠지만, 어째선지 진도건에게서 그런 제안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은 일월쌍고검을 들어 구마진을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구마진은 그것이 공격하려는 기수식과 같은 신호인 줄 알고 움찔거렸다. 그리고 진도건이 자신의 진기를 두 검에 밀어 넣는 것이 느껴졌을 때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면서 방어와 반격을 위하여 자세를 낮게 가져갔다.
그때 진도건이 제자리에 선 채로 일고검과 월고검을 좌우로 크게 들더니 두 칼날을 세게 부딪쳤다.
쩌엉!
날카로운 검명이 귀곡성처럼 울려 퍼지면서 두 자루 검이 동시에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구마진은 들을 수 없었던 마하발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진도건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브리트라가 사라지거든 쌍검에 혈마의 기를 불어넣어라. 그리하여 서로를 부딪치면 쌍검은 깨지고 귀문은 너와 혈마의 경계를 허물어 진정한 아수라의 경지를 열 것이니. 이건 나 대아수라왕 치린자비 마하발리가 너희에게 남기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