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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92화 (392/432)

392화 - 제74장. 하늘 아래 두 혈마는 존재할 수 없지 (2)

천무경과 단지운의 재대결의 양상은 첫 대결의 그것과 달랐다.

막대한 양의 공력을 방출하여 거대한 충돌과 그 후폭풍을 일으켰던 직전까지의 모습은 없었다. 진기의 방출은 절제되었으나 오묘한 물리적 원리를 품으며 훨씬 더 격정적인 마찰이 일어났고 그것들을 끌어내는 초식의 변화 또한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이런 초식을 과연 이 전장의 누가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저마다 웃음 띤 얼굴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쳐내길 반복했다.

파파파팍-!

동작과 기운 각각이 일으키는 변화.

바람과 같은 속도.

맹수 같은 힘.

그 맹렬함을 다툴 수 있는 용맹함과 일부러 빈틈을 내어줄 수 있는 과감성까지.

슈슉!

일부러 드러낸 빈틈을 노리고 곧장 두 개의 주먹이 서로의 가슴팍을 향해 파고들었다.

퍼펑!

“크으……!”

“으음!”

두 사람이 나직이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주르륵 밀려나 거리가 벌어졌다.

권격이 제대로 들어갔을 거로 생각했지만, 역시나 각자 다른 쪽 손바닥이나 팔의 전완(前腕)을 때리는 데 그친 것이다.

다만 공방을 펼치는 두 손 모두 각자가 구사하는 절정의 경력이 실려있었으니 그 충격은 차곡차곡 몸에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진은 단지운 쪽이 좀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 마기의 본질을 흩트려 놓고 있어……!’

내공이 자연적 균형에서 벗어나 속성이 강할수록 저마다 특별한 기색을 드러내고 마공은 더 짙게 나타난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순히 눈에 비치는 색이 달라지는 데 그치지 않고 원소 단위에서 나타나는 고유 성질과 반응의 특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무경의 타점에 머무는 기운이 그른 치우친 속성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다. 그 후 꿰뚫을 듯 느껴지는 충격은 호체진기로도 쉽게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기 상태로? 아니, ……어디까지나 이 자가 가진 진기의 본질은 뇌(雷). 성질이 극변(極變)에 달해 상대의 기운을 무위로 돌리는 게 아니라 무용(無用)한 재처럼 만드는 것이다. 후후! 과연, 무봉(武奉)이라더니……!’

단지운은 그저 감탄만 이어갈 생각 따윈 없었다.

이 전장의 누구든 기꺼이 상대하여 제압하고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적어도 눈앞의 이 노인 만큼은 절대 살려 보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냅시다.”

천무경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지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더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천무경이 무아지경 끝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지만, 단지운은 애초에 끝을 보여주지 않은 듯 스스로 극한의 기준을 계속해서 높이자 진심으로 경악스럽다.

본능적으로 심장이 움츠러들고 솜털이 오싹 곤두서는 그때였다.

“거기까지!”

갑작스러운 외침이 두 사람 귀에 꽂히듯 들려오고 마천경으로 인해 사위를 감싸는 어둠이 한층 더 깊어지면서 섬뜩한 기운이 하늘에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단지운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갑작스레 느껴지는 또 하나의 마기의 흐름에 놀라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늘을 가로지르며 접근하는 노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천무경이 그 노인을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금태하?”

“츠앗!”

금태하가 기합과 함께 손을 휘두르자 하늘에 형성된 검은 강기 다발이 일제히 단지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콰콰쾅!

천무경조차 다급히 뒤로 물러날 정도로 단지운이 서 있던 자리 중심으로 큰 폭발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단지운이 전혀 피해를 받지 않은 듯 그 폭발을 헤치며 금태하를 향해 신형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의 표정이 보일 정도로 금세 가까워졌다.

“흑사왕 금태하라고?”

“그래, 이 어린 것아!”

서로 묻고 답하는 사이 반사적으로 장력을 출수한다.

콰앙!

쌍장이 마주치며 경력이 터지는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리면서 금태하의 입꼬리가 올라간 데 반해 단지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크크크! 이것도 받아봐라.”

흑암구백마공 암전계.

찰나 어둠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단지운의 눈빛에 노기의 불길 일렁였다.

금태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위에 강기의 파동이 느껴지면서 곧 엄습해올 듯한 자신의 상황에 기시감이 느껴진 것은 우연이 아닐 터.

콰콰콰콰쾅!

강기가 연쇄적으로 터졌으나 그것은 단지운이 이미 무형의 기척을 읽어내어 사방으로 장력을 떨쳐낸 여파다. 그리고 그렇게 퍼져나간 마기의 구름을 뚫고 금태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파팡!

순식간에 이뤄진 경합 속에서 단지운이 순간적으로 공력을 방출했다.

파앙!

금태하의 입꼬리 올라간 미소가 활짝 웃음 지어졌다.

일순간 어둠이 깨지듯 사라지더니 어느새 그를 둘러싼 사위로 섬뜩한 칠흑의 강기 다발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금태하도 단지운처럼 장력을 펼치면서 스스로 방어했다.

꽈과과광!

“쿠후후후……!”

금태하가 웃음을 흘리면서 폭발 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단지운이 그의 기분 나쁜 웃음을 불쾌히 여기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천마신공의 천지멸뢰옥을 흉내 내……?”

“크크크! 네놈과 내가 언제 봤다고 흉내를 낸단 말이냐? 게다가 이 몸의 초식이 훨씬 심오하거늘. 마교주란 녀석이 식견이 볼품없구나.”

“닥쳐라!”

단지운의 눈에 섬뜩한 광기가 스치는 순간, 갑자기 금태하의 등 뒤에서 칠흑의 마기가 파도처럼 솟구쳐 일어나 덮쳐왔다. 거기에 더해 단지운도 앞으로 손바닥을 펼치니 동시에 두 개의 초식이 발현되었다.

천마신공 마천용음파(魔天龍吟波) 그리고 마령환.

마령환을 쏘아 보내는 그 순간 단지운은 다시 사위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동시에 무형 강기의 소용돌이가 사방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 거의 때맞춰서 천무경마저 그를 향해 쇄도하는 기척을 읽었다.

천하오절 가운데서도 가장 강하기로 손꼽히는 두 절대고수가 양측에서 합공해온 것이다.

‘이익……!’

아무리 천하무적이라 자신하는 단지운이라고 해도 어찌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암흑구백마공 암천대계 파황경.

파천신공 구룡포화.

무형의 경력이 천마신공으로 일군 호신강기에 충돌하는 순간, 천무경이 내지른 정권을 타고 아홉 줄기의 벽력이 똬리를 틀듯 그의 팔을 감싼 채로 뻗어나가 폭발 속을 관통했다.

꽈르릉! 콰콰콰콰콰-!

역사적으로 인간이 자아낸 폭발 가운데서도 이 정도는 없었다.

가히 신의 분노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었으니 이는 한 사람을 기준으로 한 단위 공간 안에서 가장 격렬하고 파괴적으로 일어난 폭발이었다.

* * * *

투웅!

청명의 신형이 땅을 박차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 이건 기회야……!’

조금 전 청명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천서은과 진도건이 번갈아 공수를 도우면서 구마진과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 그리고 마치 일심동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최종적으론 두 사람의 진기가 하나로 합쳐져 위력적인 참격의 검기를 펼쳐낸 모습까지.

우당탕 땅을 구르면서 서로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모습도.

샘이 날 정도로 인상 깊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로 했으니 그 감정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의 합격으로 만들어낸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허벅지부터 어깨까지 갈라져 붉은 내장과 새하얀 갈빗대, 요동치는 심장까지 드러났으나 혈청옥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막대한 양의 피에 흠뻑 적셔져 마치 그 상처마저 회복시킬 듯한 조짐을 보이는 구마진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명은 잠깐 주춤했던 자신의 반응을 질책하면서 제운종을 펼쳐 날아오른 것이다.

사마(邪魔)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는 건 오직 태극의 정순한 진리의 검이니.

‘이 일검으로 저 혈마를 단멸(斷滅)하리라!’

태극혜검 태청검.

화경에 이른 청명의 신체와 그의 무극검이 눈부신 혜광 속에 물들며 구마진을 향해 유성처럼 쏘아져 나갔다.

슈아아악-!

카앙!

카랑카랑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진도건과 천서은도 청명의 그런 쇄도에 깜짝 놀란 눈으로 보면서 그 시도가 제대로 성공하길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그 울림의 끝자락에서 섬뜩하리만치 짙은 혈광이 허공 중에 번져나가며 청명이 만들어낸 혜광을 지워가기 시작하자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쿨럭, 쿨럭……!”

“청명!”

천서은이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어느 순간부터 회오리치듯 휘도는 혈무 사이로 풀로만의 팔이 피로 만들어진 검을 쥔 채 청명의 어깨와 복부, 다리를 꿰뚫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풀로만의 팔이 청명을 그대로 들어 올리자 청명이 무극검을 손에서 놓을 정도로 기력이 빠르게 소실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무극검은 분명 심장이 뛰고 있는 구마진의 왼쪽 가슴에 꽂혔다는 사실이었다.

“크크크크……!”

“기분 나쁜 검. 뽑아버려.”

쑤욱!

풀로만의 팔 하나가 무극검을 쥐더니 그대로 심장에서 뽑아냈다.

푸슛!

피가 분출했으나 온몸을 적시고 있는 혈청옥의 핏물에 닿으면서 구멍이 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청명이 흐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후훅!

‘이럴 수가……!’

풀로만의 팔이 청명과 무극검을 멀찍이 던져버렸다.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으나 고통이나 다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청명!”

반가운 외침이 가까이서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었는데 어쩐지 반가운 얼굴이 눈앞에 드리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청명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자 천서은은 그가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물 가득 머금은 눈망울 속에서 꺼져가는 눈빛이 그녀의 눈빛을 찾아 애써 떨리고 있었다.

“……청명!”

천서은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으나 이번엔 청명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이름을 불렀을 땐 이미 눈빛에 담은 마지막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린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축 늘어지는 사지와 그녀를 향하던 방향을 잃어버린 채 머리를 떨어뜨리는 그 저항할 수 없는 마지막 움직임이 청명의 목숨이 끊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도건도 어느새 가까이 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분노가 가슴 속에 불을 지피는 것이 느껴졌다.

창천맹에서 청명과 비무를 벌였던 당시 상황이 기억 속에 스친다. 스승과의 과거 속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동시에 무공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던 무당파의 놀라운 재능이었다.

아주 잠깐 회상에 잠겨있던 사이, 천서은이 한 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이 시야에 담겼다. 그녀와도 나름대로 작은 인연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해하면서도 이런 끔찍한 죽음을 목도하게 만든 이에 대한 더 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이 정도로 분노하는 건 처음 느껴보는군.”

혈마의 목소리에 진도건이 고개를 돌려 구마진을 노려보았다.

어느덧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가는 모습이었다. 혈무 속에서 비린 조소를 던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놀랍게도 풀로만의 팔 뿐만 아니라 풀로만의 제 모습까지 마치 구마진의 등에 업힌 듯한 모습의 환영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아수라의 귀기가 천지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석천의 종자여!”

“목숨을 내놓아라!”

풀로만의 쌍귀면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구마진이 조소를 더욱 짙게 띄운 채 입을 열었다.

“하늘 아래 두 혈마가 존재할 순 없으니, 이젠 네가 목숨을 내놓을 차례다. 크흐흐……!”

구마진의 목소리마저 귀신의 그것처럼 변해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진도건의 표정이 서슬 퍼런 분노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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