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 제73장. 파천무봉(破天武奉) (5)
후광에 의해 모습 전면이 그늘져 알아볼 수 없었음에도 천서은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직감했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을 열고 나타난 그 남자가 구마진보다 더 피처럼 붉은 마기와 붉은 전격을 하늘에 펼치더니 그대로 구마진의 머리 위로 내려찍었다.
콰콰쾅!
두 기운이 폭발하면서 동시에 붉은 머리카락의 두 사람도 천서은의 시야에서 좌우로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도건!”
천서은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하늘에서 나타난 남자의 이름을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문조차 갖지 않을 만큼 반가운 것이다.
그건 진도건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녀의 부름에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한 채 대답하고 있었다.
“서은!”
반면 구마진도 어떻게 하늘에서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이미 그에게 빙의된 아수라 풀로만이 두 귀면을 통해 증오를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그건 도리천의 하늘!”
“제석천의 하수인! 저 새끼를 죽여!”
“큭큭! 안 그래도 죽일 놈인데 이유가 자꾸 늘어.”
구마진은 바로 공격하려 움직이지 않고 잠시 붉은 눈동자를 진도건에게 고정했다.
풀로만의 외침은 사실 구마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석천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구마진에겐 뜬구름 잡는 허황한 말들일 뿐이지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 ‘진도건’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신교의 구주 가운데 혈마종이 공석일 때,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오직 자기뿐이라는 확신으로 달려와 마침내 교주의 선택을 받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흡성대법을 선택하여 달려온 야망의 길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혈마종을 지키고 있던 대마의 유변이 혈마가 그가 아닌 진도건이란 얘기를 했을 때는 구마진으로서도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 첫 번째 혈마가 아니라는 점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구마진이 탐냈던 건 본질적인 힘이었지 그 상징이나 지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천환을 통해 혈마의 마성을 일깨우고 받아들인 그 순간에 구마진이 하나 납득할 수 없게 된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인이 어째서 마도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구마진은 그 각성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마의 그것으로 완전히 채색됨을 느꼈고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마도를 향해 모든 시선과 발걸음의 방향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저 붉은 눈이 기분 나쁠 줄이야, 크크크……!’
구마진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눈빛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어혈(瘀血).
자신의 눈동자가 응어리져서 매우 질고 탁한 핏덩이가 눈동자에 담긴 듯한 그런 색이라면 진도건은 달랐다.
선혈(鮮血).
마치 손끝을 따 바로 떨어뜨린 생생하고 선명한 핏방울과 같다.
고여 응어리지지도 않고 불순물이 섞이지도 않은 그런 맑은 핏방울이 눈동자에 떨어져 그 색을 온전히 입혀놓은 듯한 눈빛이었다.
결국 혈마는 ‘마(魔)’이니 어혈과 같은 자신의 눈빛이 본색(本色)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진도건이 그보다 먼저 혈마가 되었으니 어쩌면 ‘혈(血)’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의 것이 진정한 본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크크크! 그래, 그렇구나!”
구마진이 갑자기 실소를 흘리며 외치자 잠깐 서로 시선을 맞추었던 진도건과 천서은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하늘 아래 두 혈마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네놈의 존재는 이 나를 진정한 혈마로서 완성하기 위한 마천의 안배였던 것이야! 크하하하!”
구마진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면서 동시에 자신의 혈마기를 폭발시켰다.
기세와 투기가 상승하면서 그에게서 나타났던 네 개의 팔이 더욱 크고 흉물스럽게 변모했다.
한편 진도건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마진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전장을 압도하고 있는 인상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트라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니……. 확실히 모든 아수라가 삼두육비는 아니었는데, 마하발리가 말했던 아수라 풀로만이 그 정도의 아수라였나? 그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 세상에 저 정도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을 줄이야…….’
“다른 적들의 상태도 거기서 본 아수라들과 같아. 결국 저 가짜 녀석을 잡으면 정리가 되지 않겠느냐?”
“그래, 네 말이 맞아.”
진도건이 혈마의 말에 수긍하면서 내공을 더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진도건과 구마진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꽈광!
진도건과 구마진의 서로 닮은 붉은 마기가 충돌하면서 막대한 경력의 폭발이 일어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구름 한쪽에서 두 사람이 가까이 엉킨 채 튀어나왔다.
카카카캉!
진도건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면서 구마진의 공격을 방어했다.
공세는 구마진의 몫이었다.
삼두육비의 우위로 사각지대 없이 차륜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세를 퍼붓는데 하나하나가 살초의 의미를 넘어서 닿는 게 그 무엇이든 간에 파괴해버릴 위력이 실려있었다.
아수라 풀로만의 힘이 본래 구마진이 가진 힘에 증폭작용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진도건이 힘에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천서은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파천신공을 전개하면서 구마진의 측후방을 노려 공격했다. 사각지대가 없는 구마진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어도 진도건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힘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으니 그 의도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이거 자존심 상하는군!”
혈마가 짜증 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진도건도 거기에 공감하고 있었다. 공세의 압력은 천서은의 가세로 분명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수세에 몰리는 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빈틈이…….’
퍽!
“큭!”
파공성조차 충격음에 묻힐 정도의 쾌검에 구마진이 눈을 부릅떴다.
호신강기로 상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건의 검격이 가슴팍에 남긴 충격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더 강하고 우월했다. 힘만 커진 게 아니라 삼두육비로 인해 수단의 폭이 늘고 신체의 내구성이 올라갔으며 마기의 증폭은 그 모든 면모를 한 번 더 강화한 것이다.
‘대체 무얼 상대하고 있는 건지…….’
천서은은 진도건이 정면에서 상대해주는 덕택에 구마진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됐지만, 그 대신 귀면의 불쾌한 눈빛을 바라봐야만 했다.
어쩐지 섬뜩한 금색 눈빛엔 증오와 분노뿐만 아니라 음욕마저 드러나 마치 그녀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졌다.
슈욱-, 터텅!
벽력기를 품은 북천검법의 검세가 펼쳐졌으나 풀로만의 팔에 막혔다.
다른 팔 하나가 허공을 할퀴듯 휘두르는 순간, 혈청옥의 혈마강기도 동시에 발현하며 근접한 천서은을 휩쓸었고 그녀도 반사적으로 장력을 펼쳤다.
쾅!
“윽!”
천서은이 신음을 삼키며 충격을 이용해 떠오른 몸을 회전시켰다. 충격 자체도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밀려나는 몸과는 반대로 검강을 방출하며 등을 노렸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공격과 반격이 구마진을 압박했다.
콰쾅!
천서은도 경지에 달해 공력의 위력이 크게 상승하였음에도 역시 구마진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풀로만의 팔과 혈청옥의 마기가 크게 일어나며 그녀의 검강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막은 것이다.
힘을 분산시키겠다는 본래의 목적을 더 분명하게 강제했으니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검강이 폭발하기가 무섭게 십여 개의 새하얀 섬광이 순식간에 구마진을 중심으로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크악!”
진도건의 연속된 쾌검이 구마진의 육신을 정통으로 베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혈무가 허공에 번졌다.
집중된 검기와 더불어 결을 낚아채는 원류검결의 검로가 구마진의 방어를 뚫은 것이다.
큰 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히 결속된 방어에 큰 균열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진도건과 천서은이 반사적으로 구마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쿠르르……!
자신을 비롯해 주변까지 자신의 피로 점철한 구마진을 중심으로 그의 앞뒤에 벼락이 일어났다. 구마진의 정면으론 붉게 물든 벼락이 또 다른 혈마검기의 소용돌이와 함께, 구마진의 등 뒤론 푸른 벽력이 북천강검세를 좇아 일어나 구마진에게서 합쳐졌다.
콰콰콰쾅!
거대한 기운의 충돌.
섬뜩한 마기가 거칠게 저항하는 것을 두 사람이 동시에 느꼈다. 그 찰나 간 간극 사이에 진도건과 천서은의 뇌리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심장을 취해라!’
두 자루 검 끝이 기운의 충돌로 일어난 피의 폭풍 속을 파고들었다.
목표는 오직 두 사람의 감각이 읽어내는 구마진의 존재감 속 심장이 있을 좌심부였다.
카앙!
금속의 충격이 검끝에 전달되는 순간, 진도건은 깜짝 놀랐다.
강기의 풍압 다음으로 전해져야 할 것이 피륙의 감촉인데 금속의 부딪치는 느낌이 먼저 전해졌다면 목표를 놓치고 천서은의 검과 부딪혔단 것이기 때문이다.
천서은도 깜짝 놀랐지만, 반응이 늦었다.
검을 거두기엔 그녀의 근육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돼!’
그녀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진도건의 검 끝이 살아 움직이듯 그녀의 검신을 빙글 타고 흐르는 듯싶더니 어느새 배면을 맞대어 같은 방향으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가 막힌 움직임 속에서 어느새 두 사람의 검은 같은 방향으로 비스듬히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고 어느새 진도건은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채 같은 자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진도건은 잠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서로에게 상처 입힐 수도 있었던 순간에서 벗어나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같은 자세로 움직임이 흐르는 이 상황 속에서 콧속으로 천서은의 땀 섞인 체취가 스며 들어왔다. 그것이 꽤 긴 시간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눌러두었던 그리움과 품 안의 밀착감으로 꿈틀거리는 애정이 내면에서 폭발한 것이다.
“야 이 미친놈아!”
혈마가 진도건의 감정 동요를 읽고 머릿속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진도건이 그 외침을 듣자마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 순간 구마진이 어느새 그가 있던 자리에 나타나서 맹공을 퍼붓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형환위와 같은 신법으로 그의 등 뒤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위협으로부터 진도건이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천서은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파천신공을 전개하며 방패가 되어주었다.
파천신공 창천벽뢰.
쩌저정!
뇌기의 폭발과 혈무의 소용돌이를 뚫고 구마진이 천서은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여섯 개의 손에는 나찰혈우창의 강기가 혈광을 뿌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서은이 진도건의 품에서 빠져나왔으나 여전히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
이번엔 진도건이 그녀의 요대를 붙잡고 끌어당기면서 다시 한번 구마진의 공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군자검엔 핏빛 검강과 뇌전이 함께 흐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천서은이 장심을 진도건의 등에 대면서 파천진기를 흘려보냈다.
파천혈마공 혈광참.
꽈과광!
“크악!”
“큭!”
“꺄악!”
세 가닥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뒤로 밀려나는 구마진에게서 수직으로 혈선이 솟아올랐고 진도건과 천서은은 충격에 떠밀려 크게 날아가서는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진도건과 천서은이 큰 충격을 받고 신음을 삼키면서도 곧장 몸을 일으켰다. 천서은은 원래도 여기저기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으나 이것으로 더 심하게 헝클어졌고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던 진도건도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몸에 상처도 생겼다.
구마진의 상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했다.
어깨 가슴부터 허벅지 부근 골반까지 길고 깊은 검상이 생긴 채 피를 철철 흘려댔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집중된 공력이 폭발하면서 그 여파가 사방으로 번졌으나 현철로 제조된 진도건의 군자검은 매개로서 굳건하게 참격의 중심을 지키면서 검기를 끝까지 뻗어낸 것이다.
하지만, 진도건과 천서은은 상황이 끝난 게 아님을 알았다.
구마진이 흘린 피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혈청옥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구마진의 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진도건이 끔찍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괴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