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 제73장. 파천무봉(破天武奉) (4)
“아직도 싸우는군.”
“어서 가시죠.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안효철의 말에 청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
“……사지 멀쩡한 녀석들은 있지만, 다들 충분히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기력이 충분치 않습니다.”
“클클! 도움 안 된다는 얘기로군. 영감도 어렵지?”
강도혁과 매연선의 문답을 옆에서 엿들었던 금태하가 실소를 흘리곤 강정학을 돌아보았다.
강정학은 이제 상완만이 남아 허전한 팔을 들어 보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일평생 일구어온 천하제일검의 정수가 그의 오른팔에 담겨 있었지만, 더는 검을 쥘 수 없는 팔이 되어버렸다. 염황신마를 잡아냈으나 제자를 눈앞에서 놓치고 그 손에 팔까지 잘려 나갔으니 한 이틀은 분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교적 침착한 편이었다.
아직 싸움은,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끝까지 쫓아가서 이 사태의 결말을 지켜보게 할 수 있는 두 다리는 건재했다. 그리고 왼팔도 남아있긴 했다.
“……근처에서 잔적들의 관심을 끌어주겠네. 평소대로 싸우려 들다간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칠 테니 말이야.”
강정학이 아직 감각이 무딘 왼손으로 검 자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결정됐군. 참전은 여덟 명이 하겠군. 충분해.”
강도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따르는 검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이 큰 부상을 안고 있어서 이만큼 따라온 것도 용할 지경이었다.
“너희는 이대로 내려가 저 외곽 진영에 합류해라. 아마 창천단이나 천무방이겠지.”
“알겠습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여덟 명의 고수들이 즉각 경공을 펼쳐 전장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들이 있던 곳은 명사산 모래 절벽 지대여서 보통 사람이라면 대마교전쟁(對魔敎戰爭)의 전장을 볼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이 아주 작게 눈에 조금 비칠 뿐, 주의력이 깊지 않다면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경공을 펼치며 달리는 이들이 이룬 무공의 경지는 보통 수준이 아니다.
금태하, 강정학, 안효철은 천하오절의 고수였고 청명도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전장의 양상 정도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강도혁도 어설프게나마 가능했고 나머지 사위검총 세 사람은 역부족인 거리였다.
절벽을 내려오면서 길고 긴 평지의 모래사장 위를 달리게 되자 전장의 풍경은 그런 고수들의 시야에서도 담기지 않게 되었다.
다만 멀찍이 보이는 폭풍과도 같은 자연현상의 신호에 의존해 달릴 따름이었다.
그들은 전력으로 달렸다.
그에 따라 그들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가장 앞서서 달리는 건 금태하였고 그 뒤를 안효철과 강정학, 청명이 차례대로 뒤따랐다. 강도혁과는 거리가 크게 벌어졌는데 그건 그가 다른 사위검총 세 사람과 보조를 맞추며 달렸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가장 앞서서 달렸던 금태하부터 차례대로 전장의 양상이 두 눈에 일목요연하게 들어올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운의 충돌들로 발생한 후폭풍들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크크……. 엄청난 마기로군!”
금태하가 감탄하며 얼굴에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다른 기운들의 기색을 덮어버릴 정도로 전장을 뒤덮은 마기가 흉흉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공명이라도 하듯 내부가 들끓는 기분이 느껴지고 두 눈엔 핏발마저 섰다.
반면 다른 이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먼저 느꼈다.
그들이 상상했던 기준치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금태하와 양자성이 부딪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군. 마교주와…… 천무경의 기운인가?’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지독한 마기……! 그렇다면 저기에 마교주가……!’
강정학과 안효철, 청명의 생각들.
두려움이 걱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천경의 권역 안으로 들어서선 등골이 오싹해졌다. 흥분에 휩싸인 금태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마음을 다잡은 채 긴장감을 자신의 투기로 덮는다.
아수라.
아수라도라는 육도의 영역에 사는 종족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반신(半神)과 같았다.
치린자비로서 불멸의 존재가 된 마하발리가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일 뿐 인간과 같은 필멸자였다. 그러나 강한 투쟁욕은 그들에게 신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강력한 귀기를 다룰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타고나게 되었다.
그 귀기는 자체로 환영과 실체를 넘나들 수 있었고 거기에 상처 입은 자로 하여금 점점 분노와 투쟁욕에 물들여 싸움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흑각수들의 가세는 의욕이 넘치는 일부 창천단과 적멸당 고수들을 전장에 끌어들였는데 그들이 흑각수가 사용하는 귀기에 당했다. 그 결과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만약 천무경이 단지운과 구마진을 동시에 붙잡지 않았다면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천무경이 단지운과 구마진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귀원진무경(歸元眞武境).
잠깐 빠졌던 무아지경 속에서 천무경이 개척한 새로운 경지.
만류귀종과 같은 의미로 일평생 무학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며 달려왔던 자신을 본원(本元)으로 되돌림으로써 참된 무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곧 모든 무의 동작과 기의 흐름까지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듯 훤히 내다보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몸이 따라 반응하며 요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완전한 자연체(自然體)를 이루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에는 파천신공으로 쌓아 올렸던 본질에 근접했던 벽력기도 크게 의미 없었다.
이미 하단전의 내공은 팔 할 가까이 소진되었음에도 천무경이 보여주는 모든 동작의 끝엔 단지운과 구마진이 던지는 공격들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손끝을 따라 발현되는 뇌기는 그저 파천신공의 운기 흐름이 발현하는 관성적 현상인 것이다.
“죽어! 노괴물 새끼야!”
놀랍게도 그 말은 구마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구마진이 혈마기를 동원해 공격을 퍼붓다가도 그 공세를 비집고 들어오는 천무경의 손에 화들짝 놀라 물러서길 반복했다. 저 손끝에 몸이 직접 닿는다면 치명적일 거라는 본능적인 신호가 그를 움츠러들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 반응이 육신을 통제할 정도였으니 구마진이 천무경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단지운은 냉철하게 천무경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어째선지 공격들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나 반대로 천무경의 영향력은 광범위하게 펼쳐졌던 지난 시간과 달리 자신에게 국한되어 발휘되고 있었다.
“천무경. 당신은 진정 대단하군! 죽음의 순간에서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무의 경지에 진입할 줄이야…….”
단지운이 진심으로 감탄하여 말했다.
“그러면 슬슬 내 손에 죽어주지 않겠나? 이 싸움을 끝내자고.”
“내가 할 소릴 대신 하는군. 유리한 건 여전히 나야.”
“정녕 그리 생각하나?”
“의미 없는 숫자놀음에 기댈 정도로 판단이 흐려지진 않았을 텐데.”
“내가 할 소릴 대신 하는군.”
천무경이 그가 했던 말로 여유 있게 받아치자 단지운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구마진은 혀를 내두르고는 이를 까득 물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여유를 부려!”
백귀혈마공 팔귀문수라도.
여덟 줄기의 핏빛 마기가 천무경을 휘감았지만, 이 강력한 초식조차 시선을 분산하는 용도였다. 구마진이 과감히 몸을 던지며 먼저 풀로만의 팔들로 주먹을 휘둘렀다. 본질적으로는 구마진의 신체가 아닌 아수라의 신체 일부들이었기에 먼저 던짐으로써 방패막이 삼은 것이었다.
진정한 흉수는 그의 두 손에 담긴 혈마기였다.
파파파팡……!
“자넨 역시 깊이가 얕아.”
천무경이 일거에 쏟아지는 공격들을 받아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구마진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혈마기는 몸에 닿기도 전에 어느새 뻗어 나온 뇌기에 의해 갈라져 흩어졌고 풀로만의 주먹들은 천무경이 가까이 끌어당겼다가 힘을 역이용하여 받아친 것이었다. 그 순간 구마진이 양손에 모은 기운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 되었으나 품으로 파고드는 천무경의 주먹엔 상대의 기운을 무력게 하는 힘이 있었다.
콰앙!
“끄윽!”
두 손의 기운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천무경의 주먹이 교차한 두 손 사이를 지나가며 명치에 정확하게 꽂혔다.
고통에 악다문 이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구마진의 몸이 붕 떠오르는 순간, 얼굴 양쪽의 귀면도 입을 쩍 벌렸다.
“크악!”
“이 찢어 죽일 새끼!”
천무경은 귀면의 목소리에 증오와 같은 악감정을 느꼈지만, 그 연유를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천무경은 구마진의 실력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막대한 내공은 분명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지만, 신체를 활용한 초수의 운용 깊이는 명망 있는 절정고수들에 비교하면 한 수 아래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막강한 혈마기가 무용해진 순간, 구마진이 아무리 삼두육비 아수라의 신력을 얻었다고 해도 천무경에겐 아이가 장난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구마진이 나가떨어지는 순간에 때맞춰 덤벼드는 단지운은 조금 달랐다.
천무경은 그에게서 어렸을 적 자신을 엿보았을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파괴적인 천마신공 이상으로 손속을 겨루는 공방의 깊이가 그에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천무경의 일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더 가까이 파고드는 그의 시도에 적잖이 놀랐다.
파파팍!
두 사람의 손발이 교차하며 짧게 합을 교환했다.
타점을 내주지 않기 위한 공방 속에서 천무경의 주먹이 마침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콱!
단지운이 천무경의 주먹이 우측 가슴에 닿기 직전 왼손을 집어넣어 막아냈다. 모든 걸 흩어내는 신비로운 기운이 엄습했지만, 단지운은 그 순간 내면의 천마성이 요동치는 걸 느끼면서 구마진이 받았던 충격이 반감됨을 느꼈다.
슉!
파팡!
천무경의 내지른 팔을 노리고 오른손의 수강이 허공을 갈랐다. 곧바로 다시 경합하고는 무릎끼리 충돌하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천무경도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는데 그걸 본 단지운이 씩 웃음을 지었다.
“
역시 내게는 효과가 떨어지는군.”
“숨겨둔 패가 있었나……!”
그 사실이 천무경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우위를 잡을 수 있는 조건이 사라질 거라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지운은 재차 공방을 이어가는 것 대신 궁금한 걸 묻는다.
“당신이 할 소릴 내가 했다니? 무슨 말이었지?”
“……단전이 이렇게 빈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이것으로 지치기보단 상쾌해지는 기분이거든. 그럼 인지능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데…… 아군들이 오고 있는 걸 느꼈거든.”
천무경이 말하는 중간 잠깐 뜸을 들였다가 얘기해주었다.
그가 뜸을 들였던 이유는 그 순간이 새로운 무리가 단지운의 마천경 안으로 진입한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단지운도 마천경 권역 안의 이상징후를 감지했다.
갑자기 남쪽에서부터 나타난 절대고수들.
천무경이 그들을 아군으로 인지했으니 당연히 단지운에겐 적이 분명했다.
그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구마진! 네 부하들과 합류해서 적들을 처치해라! 천무경은 내가 상대한다!”
“존명!”
구마진도 천무경을 상대로 한 싸움에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했기에 즉시 몸을 돌렸다.
“어딜 도망가느냐?”
“제석천의 종자를 앞에 두고 감히!”
“이런 썅! 상대가 불가능하잖아. 그냥 딸년으로 만족해!”
풀로만의 귀면들이 즉각 반발했지만, 구마진이 버럭 성질을 냈다. 그리고 그 말을 지키려는 듯 바로 천서은을 찾아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전장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 혈청옥을 통해 혈마기를 뿌렸다.
“이 씨팔년! 이젠 진짜 죽어줘야겠다!”
“구마진!”
천서은도 구마진의 접근을 알아채고 소리쳤다.
그 순간 그녀를 둘러싼 흑각수 아수라들이 일으킨 귀기가 혈마기와 함께 합쳐져 그녀를 덮쳤다.
콰콰쾅!
“윽!”
천서은은 갑작스럽게 위력적인 공격이 들어오자 당황했다.
그녀는 뇌기가 발현되는 파천신공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혼자 다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으나 흑각수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귀기가 구마진의 혈마기에 공명하면서 더 광폭해지는 걸 방금의 공격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큭, 놈이 온다……. 엇?’
구마진과의 거리가 절반 정도 좁혀진 걸 느끼는 순간, 천서은의 감각에 다른 기척들이 잡혔다.
전장으로 합류하는 절대고수 수준의 새로운 기척들.
그중에는 그녀도 익숙한 기척들이 있었으니 곧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콰쾅!
“안 대협!”
카카카캉!
“강정학! 아니, 그 오른팔이……?”
천서은도 그녀의 곁에 도달해 흑각수들을 밀어붙이는 무당파 도사를 보고 소리쳤다.
“청명?”
“돕겠습니다!”
청명이 무극검으로 방출한 정종무공의 정순한 공력의 검기가 귀기를 물리치며 떨쳐내니 적들의 기세가 주춤한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날아오는 위협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어느덧 구마진이 가까운 하늘에 양손을 높이 든 채 도달하였으니 혈청옥을 중심으로 붉은 마기의 소용돌이치는 것이 두 사람 눈에도 몹시 위험천만해 보였다.
백귀혈마공 수라멸구.
“싹 다 뒤져!”
두 사람 모두 다급히 공력을 끌어올리니 천서은에게서 푸른 뇌전이, 청명에서 백색 광휘가 흐르며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전장의 어둠을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내뿜는 강기의 빛무리조차 무색할 만한 찬란한 광채가 구마진의 위 하늘에 휘도는 것을 보았다.
구마진마저 그 빛을 느껴 눈동자를 들어 하늘을 흘끔 쳐다보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 사람은 동시에 보았다.
찬란한 빛무리 사이로 나타난 한 남자의 그림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