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88화 (388/432)

388화 - 제73장. 파천무봉(破天武奉) (3)

다른 게 아니었다.

구마진이 무림의 적들을 향해 서 있던 몸을 그를 향해 돌려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단지운 앞에서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듯한 자세와 비릿한 웃음으로 눈을 맞추는 것이다.

마치 이제 당신과 내가 동격이지 않으냐는 시위처럼 느껴졌으니 어찌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쏘냐.

단지운은 바로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구마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삼두육비의 외견도 매우 이질적이었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투기와 귀기 그리고 본질을 이루는 혈마기의 크기 모두 위협적으로 변모하여 이 전장 전체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귀신에 씌더니 판단이 흐려졌구나.”

“크크! 이것이 천마신교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보아하니 죽은 광혈신마 쪽도 뭔가 일어난 모양입니다만, 교도들을 이 지경까지 끌고 들어왔으면 교주께서도 뭔갈 보여주셔야지요.”

마지막 말에서 약간의 분노가 느껴진다.

아수라 풀로만의 빙의는 구마진에게 무한한 투쟁심을 주입하고 있었다. 이 전쟁터에서 강호무림의 절대고수들 사이로 자신을 밀어 넣어 싸울 수 있는 용기는 단순히 힘이 강해진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수라의 투쟁본능이 그의 영혼에 각인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행동양식이었다.

거기서 오는 만족감이란 절대적 강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했던 구마진으로서는 환영할만한 기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지금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역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날아가 완전히 아수라 괴물이 되었다면 모를까 빙의되기 이전의 자기 모습을 기억하는 이상 반대급부로 따라오게 된 상실감도 컸던 것이다.

이만한 힘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그토록 두려워했던 천마 단지운은 어찌 저렇게 인간다운 모습을 지키면서 강대한 무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가 큰 것이었다. 그래서 구마진은 단지운에게 노골적으로 투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의 내 눈에 당신이란 존재가 어설프게 느껴진다면 기꺼이 삼켜주겠노라고.

“그럼 저것들 처리하기 전에 네놈과 놀아주면 되겠군.”

저벅.

단지운이 냉정히 말을 뱉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것도…….”

구마진이 웃으면서 대꾸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사위가 어둠에 잠겨 세상에서 오직 그와 단지운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풍경이 변했다. 그리고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았던 단지운에게서 그간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 전체를 삼킬 듯이 드리워졌다.

그 순간 단지운에게서 거대한 환영이 구마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환영은 악어의 다리, 코끼리의 머리, 호랑이의 몸통과 백여 개에 달하는 뱀인지 남성의 그것인지 모를 것을 꼬리로 달고 있는 짐승을 타고 어둠에 가려진 어떠한 존재가 적색 자위에 금색 고리눈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육천마왕, 마라 파피야스가……!’

‘…인간을 가호(加護)하는 것인가……!’

양 귀면의 목소리가 어째선지 머릿속에 울려온다. 그리고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환영과 어둠이 일거에 걷히는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쪽 무릎을 부복한 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네 충성을 의심하지 않겠다. 아수라혈마라……, 어디 네 힘을 보여봐라.”

단지운의 말을 들은 구마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가 무얼 했지? 설마 스스로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그때 머릿속으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두 귀면의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근원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마왕의 화신,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두 번 다시 도발하지 마라. 그리고 내 요구를 잊지 마라…….’

아수라 풀로만의 진성(眞聲)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일시적으로 육신에 개입해 무릎을 꿇게 했음을 깨달았다.

아수라 풀로만이 그에게 빙의되어 있기에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본능에 각인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왕, 제육천마왕, 마라 파피야스 같은 것들이 단순히 설화로 전해지는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라 실존하여 위협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하였다.

‘……그것이 마왕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니, 그조차도 타고 다닌 괴짐승의 모습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뿐, 진체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오직 섬뜩한 적금의 고리눈만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구마진은 그렇게 본능에 각인되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지운을 향하여 다시금 포권지례로서 예의를 갖추는 행동엔 공포로 조립된 진충(盡忠)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구마진이 다시 돌아서서 적들을 향해 서니 그의 눈빛과 투기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당혁수, 백두기, 남궁평, 천서은 4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 면면이 강호의 한 지역을 호령하고 문파를 맡을 만한 수준의 고수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굶주린 사자 앞에 선 들개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막 적들 한 가운데로 몸을 던지려던 구마진도, 대응하려던 4인의 고수들도 멈칫하고 이를 지켜보는 단지운도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시금 시작될 폭풍전야의 긴장감 속에서 묘한 이물감이 사이를 파고든 것이다.

저벅저벅…….

평범한 발걸음 소리임에도 귀에 선명하게 꽂힌다.

단지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 미소가 떠오르고 천서은의 얼굴엔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걱정이 동시에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울음 짓게 한다.

“아버지……!”

“방주……!”

천서은과 백두기가 각자 다른 호칭으로 천무경을 나직이 불렀다.

입으로 한가득 흘린 피가 턱수염과 앞섬을 붉게 적시다 못해 가슴 중앙에 불에 그슬린 것처럼 남은 검은 손자국에까지 닿아있었다. 퀭한 눈으로 시선을 내린 채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천무경의 모습은 누가 봐도 위태로웠다.

그런 그를 가장 먼저 노린 건 단지운이 아니었다.

슈루룩!

혈청옥에서 혈마기가 일어나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듯하더니 천무경을 향해 쏘아졌다.

천무경의 상태가 무방비와 같아 위험천만해 보였지만, 천서은이나 백두기 등도 움찔거린 게 고작일 정도로 워낙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단지운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도 그들의 인식과 다른 것 하나 없었다.

퉁!

하지만, 혈마기가 천무경에 이르는 순간 뇌광이 번쩍하더니 갑자기 눈앞이 붉은 마기로 가득 찼다.

콰쾅!

구마진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으로 떨렸다. 그가 쏘아 보냈던 강기가 천무경에게서 퉁겨져 나가 졸지에 단지운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황이 끝나지도 않았다.

천무경의 신형이 그 어떤 호신강기나 외기의 방출도 없이 맨몸으로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그가 그런 준비 안 된 상태로도 그의 강기를 퉁겨냈기 때문이었다.

육비 각각에 혈마강기로 이뤄진 칼날을 쥔 채 쇄도하는 천무경을 덮쳤다.

그 순간 천무경의 쌍수가 천변만화한 변화를 일으켰다.

어찌 보면 마치 천수관음을 떠올리게 하는 듯 허공을 수놓는 무수한 수영(手影) 안에서 혈마강기들이 빗겨나갔다. 동시에 손끝을 타고 흐르는 푸른 섬전에 그렇게 빗겨나간 혈마강기들을 갈가리 찢기는 광경이 구마진의 동공에 비쳤다.

파지직……! 퍼퍼퍼펑!

가늘게 갈라져 뻗어나가는 전격이 강기의 결합을 분쇄해 물리력 없는 혈무로 흩어버리고 두 손은 여섯 팔의 방벽마저 헤집으며 4연격이 몸통에 적중했다.

“커헉!”

구마진이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나는데 그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뇌기가 손끝을 타고 흐르는 게 눈에 보였긴 했어도 요란하게 혈마강기를 뿌리는 자신과 비교하면 천무경의 수법은 무성의 그 자체.

특히 조금 전까지 모든 공력을 쏟아부으며 말도 안 되는 폭풍 속에서 싸웠던 단지운과의 싸움을 떠올려보면 천무경의 지금 공격들은 수법이 오묘할지언정 칼날이 목에 닿는 듯한 느낌은 없었음이다.

슈루룩! 콰콰쾅!

구마진이 퉁겨나가는 순간 혈청옥이 반사적으로 혈마강기를 천무경에게 쏘아 보냈으나 역시나 평범한 손짓에 허공으로 튕겨 나가 폭발했다.

그 신비로운 신위에 4인의 고수 얼굴엔 놀라움이 떠오르고 단지운의 얼굴엔 웃음기가 꺼졌다.

“거기까지 하시지.”

단지운의 신형이 순식간에 천무경에게로 짓쳐 들었다.

칠흑의 마기가 흐르는 두 손을 펼쳐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다시금 두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빠르게 얽혔다. 그리고 천무경의 얼굴을 가까이서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면서 적잖이 놀랐다.

‘눈빛이……!’

단지운은 처음엔 그의 눈에 초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론 치열한 공방의 여파로 인해 시야가 흔들리면서 그의 눈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적당한 분노와 투쟁의 의지로 점철되어 뇌광처럼 빛나던 기억 속의 그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오히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조용히 고여있는 샘물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시시해졌군.”

단지운이 짧은 평을 던지면서 두 손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검은 기운이 두 팔에서 일어나 움직임을 쫓으면서 천무경의 두 팔을 휘감았다. 변화를 통제함과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압력으로 두 팔을 찢어놓을 기세였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마천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천무경의 가까이에서부터 칠흑의 강기를 일으켜 일거에 휩쓸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순간.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귀에 꽂히는가 싶더니, 단지운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가 일으켰던 모든 기운이 천무경의 전신에서 뻗어나간 뇌전에 불타 흩어지는 광경을.

번쩍!

눈앞이 뇌광에 의해 백화되었다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백화된 시야 속으로 파고드는 천무경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반사적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파팟!

힘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요동치다 싶은 순간, 단지운이 눈부심이라는 작은 차이로 천무경의 왼손을 놓쳤다.

꽈앙-!

가슴에 닿는 좌장의 감각과 눈앞에서 비산하는 푸른 뇌전. 그리고 멀어지는 천무경의 모습과 그의 입에서부터 출발한 핏물이 허공에 수놓는 풍경.

마지막으로 두 눈에 아로새겨지는 천무경의 차분하고도 선명한 눈빛.

뒤로 크게 밀려나는 단지운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을 즉각 수정했다.

초점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저 무아지경으로 싸웠던 거라고.

그리고 지금 저 눈빛은 그 무아지경으로 얻은 감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천하제일인, 파천무봉의 눈빛이라고.

누군가 중원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던가?

구마진!”

단지운의 부름에 구마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내가 여는 지옥에, 내 옆에서 함께 하거라.”

“복명!”

두 사람이 동시에 마기를 폭발시키니 하늘은 칠흑으로 캄캄해지고 공중엔 피의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거기에 구마진의 의지를 따라 붉은 피부에 더해 그들 이름에 걸맞게 이마에 검은 뿔이 돋아난, 아수라화(阿修羅化)된 흑각수들이 전장에 합류하여 천서은 등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온다!”

백두기가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광혈마종 마교도들이 보였던 신체 변형으로 상승한 투기 따위는 아수라화된 흑각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거기에 더해 당연히 혁무술, 오규 수준에 비하기엔 부족해도 수십에 달하는 숫자를 생각하면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절벽으로 몰아넣어지는 기분이 이런 겁니까?”

“이만한 싸움을 해온 자네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군.”

남궁평의 반쯤 허탈한 기분으로 묻자 당혁수가 오히려 그의 기를 살려주었다.

천서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상대하고 있단 말인가?

인간?

괴물?

귀신?

아니면 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차오를 때, 천무경의 목소리가 그녀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싸워라. 결국 우리가 이길 것이니.”

천무경에게서 뇌광이 번쩍거리더니 검게 물든 하늘까지 치솟아 치열하게 부딪쳤다. 그 순간 천서은도 들끓어 오르는 뇌신의 요동을 느끼면서 공력을 폭발시켰다.

쩌저정!

“끝까지 따르겠어요, 아버지!”

파마의 벽력이 휘몰아치며 두 쌍의 마기와 격렬하게 부딪치고 4인의 고수와 아수라들이, 천무경과 단지운이 재차 충돌한다.

설화에선 그런 이야기가 있다.

큰 혼란에 빠졌다는 뜻으로 쓰이는 아수라장이란 말의 기원이 아수라왕과 제석천이 싸운 마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모두는 그것을 떠올렸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곳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