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 제73장. 파천무봉(破天武奉) (1)
태상노군과 진도건이 천상을 떠난 후, 제석천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천의 하늘엔 수미산을 중심에 두고 구름이 둥그렇게 선회하면서 돌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인간인 진도건은 보지 못했던 영역의 그림자가 제석천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야마천(夜摩天)의 연꽃은 아직 닫혀 있습니까?”
도리천은 33명의 천신천인을 뜻하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천상도의 지상에 영역을 두고 있다면 사왕천, 도리천 다음의 제삼천(第三天)인 야마천은 하늘에 떠 있는 공거천(空居天)인즉슨 진정 천외천(天外天)이라고 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염마는 야마천에 살면서 동시에 지옥의 판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한다. 그가 지옥에 하방하여 업무를 볼 때면 야마천에 핀 연꽃이 봉우리를 닫으며 어둠 없는 밤이 도래했음을 알려주고 야마천으로 돌아오면 봉우리가 꽃 피며 낮이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야마천의 연꽃의 봉우리가 열리지 않게 된 것은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150여 년도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염마가 지옥에서 판관 업무를 보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의 종적이 묘연해졌기에 염마와 가까운 사이이자 영혼의 저승행을 돕는 화천(火天) 아그니가 그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그래, 여전히 낮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때 염마왕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곳의 전력만으로는 마왕의 강림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지국천왕의 말에 제석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국천왕이 이야기하는 마왕이란 제육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다스리는 악마들의 지배자이자 달리 천마라고도 불리는 마라 파피야스였다.
도리천과 타화자재천 사이에는 야마천,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는 세 개의 하늘이 존재했다.
이곳에 사는 천인들은 교합 행위가 없이 포옹하거나 손을 잡거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음욕(淫慾)의 욕심이 갈수록 줄어들고 함께 하는 것보다 개인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았다.
특히 도솔천은 미래불(未來佛)인 부처를 약속받은 미륵(彌勒)이 머물며 설법을 펴는 곳이면서 동시에 덕업을 쌓고 불심이 깊은 사람만이 윤회로 도달할 수 있다는 극락정토(極樂淨土)였다.
이 도솔천의 천인들과 낙변화천의 천인들은 사실상 음욕으로부터 거의 해방된 채 상시 행복을 누릴 수 있기에 이미 만족치가 극에 달해 분쟁에는 절대 끼고 싶지 않아 하는 관성이 있었다. 그러니 만약 마라 파피야스가 그의 마천(魔天)으로부터 하방하기로 결심한다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을 터였다.
“육도의 불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삼십삼천이거늘, 어찌 욕계(欲界)의 왕이 마라 파피야스인지…….”
다문천왕이 안타까운 심경을 내비치며 말했다.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낙변화천 그리고 타화자재천의 육천(六天)은 색욕(色欲), 식욕(食欲), 재욕(財欲)이 있어 이를 한데 묶어 욕계라 했다. 욕계 위의 하늘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 하여 음욕에서 해방되고 육신과 같은 물질에서 해방되어 심신(心神)만이 남는, 윤회의 고리에서 해방된 사유(思惟)의 세계라 할 수 있었다.
타화자재천의 천인들은 낙변화천의 천인들처럼 스스로 즐거움을 충족할 수도 있었지만, 타인의 즐거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이는 상위 하늘에 이를수록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반해 극욕(極欲)과도 같은 경지이니 인간과 비슷한 욕망을 가진 도리천 이하 천인들이나 인간들에겐 악마와 다름없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염마왕이 돌아와 야마천을 지킨다면 육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마들을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먼저 떨어뜨릴 수 있었다. 지옥을 지키는 시왕(十王)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무간지옥에 이른다는 것은 곧 영멸(永滅)을 뜻하므로 타화자재천의 악마들도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전부 막는 건 불가능해도 그 정도의 보루 역할만 해준다면 도리천과 사왕천이 타화자재천의 악마들의 하방을 저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
하지만, 마라 파피야스는…….’
욕망의 근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라 파피야스의 힘은 부처가 될 잠재력을 가진 각성자조차 타락시킬 힘을 가졌으며 그 신력 또한 측량할 수 없는 지경.
사천왕 모두 내심 두려움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때, 제석천은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법을 수호하고 육도의 질서를 관장하는 제석(帝釋)이여! 다가오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천부(天部)의 질서가 그대의 노고로 영속하고 있으니 흔들림이 없으리라. 천마강림(天魔降臨)의 때를 두려워하지 말라. 마라 파순의 권좌는 오직 삼욕의 천장(天障) 위에서만 존재할지니, 천마의 음모도 결국 거기에 머무르리라.”
부처를 통해 불법을 열고 천부를 창조한 범천(梵天)의 목소리는 오직 제석천의 머릿속에만 들려와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에는 마라 파피야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들이 해줘야 한다……. 나를 불러냈던 인간이여, 너의 잠재력을 보여보아라. 내 힘이 필요 없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도리천에 최초로 발 디딘 인간은 진도건이었다. 그리고 제석천은 아주 간혹가다 인간 세상에 깨달음을 얻은 자가 나타나면 그가 최종적으로 열반에 들 수 있게끔 곁에 머물면서 제육천 악마들의 미혹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석천 신격에 직접 닿은 인격은 그가 최초였다.
제석천은 그가 인간 무리의 통솔자로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 인간은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다.
불법에 귀의했다면 죽어서 윤회했을 때, 도리천의 천신이 될 수 있는 남자.
“천부의 질서가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제석천의 무거운 목소리에 사천왕이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
화경.
40대의 나이로 그 경지에 도달했을 때, 천무경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파무공이 말하는 화경의 경지가 정종무공으로 도달할 수 있는 화경의 경지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하는 선친의 조언에 그는 계속해서 정진하기 위해 힘썼다.
세월의 저항은 없었다.
시간의 흐름은 그에게 힘을 더해주기만 할 뿐 꺾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의식의 한계도 없었다.
삼단전의 그릇은 갈수록 커졌으며 파천신공으로 발휘하는 힘의 한계도 점점 높아졌다. 그저 작은 신호나 자극에 불과했던 섬전의 성질이 벽력이라 칭할 만한 범주로 확대되어 공력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것을 다시 재정립하게 될 줄은 어릴 적엔 꿈도 못 꾸었던 흐름이었다.
10년이 지나자 정사가 혼재되었던 강호무림 역사상 그와 같은 강함은 없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리고 20년쯤 지나자 만인이 그를 일대종사라 추종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진갑(進甲:62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확장성 없는 무의미한 고리에 갇혀있음을 깨달았다.
벽력의 성질이 더욱 본질에 가깝게 구현되고, 내공의 깊이가 깊어지며, 혜안은 삼라만상에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어쩐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천하오절의 일순위, 능히 천하제일인이라 불릴 만한 위치에 서게 되면서 더 강한 상대가 없었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런 깊이들이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차이로써 실감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년이 지난 시점에 천마신교라는 새로운 강적의 존재가 가시화되는 순간에는 전의가 타오르기에 앞서 조금 기뻤던 것 같았다.
더 나아져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나의 딸, 나의 문파, 더 나아가 강호의 명운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의식이 창천맹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함께 형성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바람을 담았다.
‘나는 정녕 천하제일인인가?’
‘진정한 지고의 경지가 있길 바란다. 나의 길이 끝내는 거기에 닿을 테니까.’
어느 날, 홍 방주로부터 생존 여부만 확인받았던 진도건이 북쪽 초원 전쟁에 참전하러 갔던 딸아이와 함께 창천맹으로 돌아왔다.
진도건은 놀랍게도 자기 안에 혈마를 품고 있었다.
분명 이름 모를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원류검결로 인해 도사의 체질을 가졌을 터인데 마가 존재하다 못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무공은.
아니, 마공은 놀라웠다.
당장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본 형태의 길이 진도건에게 존재하고 있음을 엿본 것이다.
그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분명 천마신교를 상대로 큰 역할을 맡을 운명임을 직감하였기에 더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을 고민했다. 그래서 따로 불러 의식을 확장하여 자신의 무공에 오롯이 담아내야 함을 설명해주고 시도해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힘의 폭주가 일어났다.
즉각 제어해야만 했다.
미증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그 자리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자신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두 손의 장심을 등에 가져간 것이다.
그 순간 진도건의, 혈마의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피, 어둠, 마기의 소용돌이 그리고 혈마의 목소리.
다행히 소요자와 딸아이의 위험천만한 시도로 인해 그 의식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진도건과 딸아이가 떠난 후, 창천단과 천무방을 이끌고 감숙 땅을 밟을 때까지 그 새로운 길을 계속해서 탐구했다.
파천.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뇌성벽력의 본질이 거기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그 발상의 기준을 뒤집었다.
혼신(魂神)을 관념적 실체화하는 일반적 접근이 아닌 실재함을 인지하는 것.
당장 손에 잡히지도 않는 까마득한 심연 속에 잠들어있는 진실을 향해 과감히 발을 옮기고 손을 뻗는 것.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현실과의 다리를 놓는 것.
거기, 무엇이 있는가?
정녕 내 발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인가?
심연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어떠한 진실(眞實)이란 이름의 과실이라면 한낱 인간의 몸으로 과연 손에 쥘 수 있는가?
“놀랍군! 한낱 인간이 나를 불러내 마주할 수 있다니……!”
그 웅대한 목소리의 감탄사를 접한 건 진창성에 머물며 한밤중 명상에 깊이 빠졌을 때였으니,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도리천주 제석천. 완전함을 모색하는 인간의 부름을 받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반갑다, 그대. ……천무경이여. 진정한 뇌신의 힘을 원하는가?”
천마 단지운.
그의 마공은, 그의 힘은 진심으로 두려울 지경이었다.
시야가 닿는 팔방에 존재하는 모든 마를 각성시키는 힘도 그렇지만, 일신의 무력은 진정 마왕(魔王)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버겁다는 기분을 아낌없이 느끼게 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이라는 칭호의 양도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천무경은 자신감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모든 걸 쏟아붓기에 부족함 없는 대적을 향한 찬사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환란을 쓸어버릴 신의 권능을 빌려주겠다고?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랴? 나는 고작 신의 종자로 인생을 끝낼 생각이 없다. 내가, 내가…… 무신(武神)이 되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내 역할이 다하여 목숨이 스러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지난날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리면서 천무경은 자신을 향해 다짐 섞인 외침을 터뜨렸다.
폭발하듯 뻗어나가는 벽력의 기운에 대기가 부들부들 떨고 공포에 짓이겨 울부짖는다.
싸워라.
몸을 던져라.
영혼을 바쳐라.
저 인세에 강림한 마왕에 맞서서 나, 천무경, 한낱 한 명의 인간으로서 무신이 되어, 뇌신이 되어 마도를 무너뜨리리니.
파천신공 파천뢰신무(破天雷神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