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85화 (385/432)

384화 - 제72장. 수미산 도리천(須彌山 忉利天) (5)

마치 술에 얼큰하게 취해있었던 것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면서 현세에 짊어지고 있는 과업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바짝 긴장감이 올라왔다.

“저 중턱의 사찰들이 사왕천이고 정상이 도리천이다. 벌써 제석천의 눈초리가 느껴지는군. 그가 요구하는 건 간단할 테니 금방 현세로 내려갈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거라.”

“예.”

진도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이 둥그렇게 감싸더니 태극의 형태를 띤 반투명한 봉옥(封玉)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수미산 정상 도리천을 향하여 쏜살같이 날아갔다.

‘정말 빨리 날아가는 게 분명한데도 지나가는 풍경은 느리다. 그만큼 헤아리기 힘들 정도 거대한 세계라는 거겠지. 하지만, 정말 아름답긴 하구나. 잠깐이라도 서은이와 함께 이 풍경을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정신 바짝 차리라 했더니 바로 딴 생각이라니……, 네놈도 참…….”

“시끄러워.”

진도건이 눈치를 보면서 말을 끊었지만, 태상노군은 개의치 않는 듯 도리천 사찰궁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사찰 내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지자 태상노군이 그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다 왔구나. 저기가 바로 제석천의 기거하는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이다.”

구름이 흐르는 수미산 정상 중심의 황금사찰 선견성.

그 외에도 정상 사방위에 네 개의 사찰들이 사방천성(四方天城)으로서 보였으나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선견성의 건축양식과 규모가 선견성이 더 거대하고 화려했다.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인기척도 감지할 수 있었는데 화려한 행장의 천인들 수미산 정상에 자라난 나무의 열매를 따 먹거나 독서, 수양, 담소 등을 나누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태상노군을 보자마자 합장과 함께 허리 숙여 인사했는데 진도건에게 눈길이 닿았을 때는 자기들끼리 수군대면서 흥미로움과 경계가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신경 쓸 거 없다.”

열반에 이르러 부처가 되거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이상, 보통의 인간이 수미산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 부처나 아라한 등은 완전히 다른 생체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에 인간과 완벽하게 구별되어 받아들여진다. 또 모든 상황은 제석천에게 감시되고 통제되므로 모든 불가피한 상황은 반드시 통제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태상노군이 그렇게 걱정을 덜어준 것이었다.

두 사람을 실은 태극봉옥은 마침내 선견성의 사찰 공터 중심에 이르러서야 사라지면서 두 사람의 발을 땅에 딛게 했다. 그리고 이내 태상노군이 앞서 걸으며 진도건을 인도하여 선견성 외곽의 작은 언덕에 제법 큰 정자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자체적으로 은은한 빛을 뿌리는 후광을 등진 채 화려한 행장과 장군갑주가 반반 뒤섞인 차림의 중후한 기풍의 초로의 남성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소, 노군. 아마 태극도문(太極圖門)에서 주저리 오지랖을 부렸을 것 같은데 말이오.”

“제석천 앞에 바로 대령하면 용건만 하달하고 지상으로 내려보내실 게 뻔하니 알아서 시간을 마련하여 얘기해야지 않겠소이까?”

“지당하신 말씀이오. 그래, 그가 진도건이란 중생이로군.”

“진도건이 제석천께 인사 올립니다.”

아수라도와 연결되었던 영역의 관문에서 마하발리와 함께 올려다본 하늘의 원, 거기서 느꼈던 존재감을 눈앞에서 고스란히 다시 느꼈다.

태상노군의 존재감이 유하고 포용력이 깊은 느낌이라면 제석천은 무겁고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마하발리로부터 쓸데없는 얘기를 들었더군.”

“한쪽 말만 들어선 진실을 알 수가 없으니 가려 듣되 불편하시면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당돌한 녀석이로고.”

그 자리엔 제석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좌우로 열댓 명의 천신천인들이 있었는데 특히 좌우로 늘어서서 마련된 의자에 앉은 네 명의 행장과 위용은 제석천 다음으로 화려하고 위용이 넘쳤다.

“사천왕들도 오셨군요.”

“노군이 잠시 내려갔을 때 올라오라 불렀네.”

태상노군과 제석천의 대화로 드러난 네 사람이 사왕천을 수호하는 천부(天部)의 존재, 사대천왕이었다.

왼쪽부터 차례로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그리고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특히 다문천왕은 선계에선 비사문천이라 부르는 나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네 사람의 인상이나 표정도 각기 달랐다.

지국천왕은 곁에 검과 비파를 두고 여유가 묻어나오는 표정과 치아를 드러낸 웃음을 머금은 채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목천왕은 도저히 깜박이지 않을 것만 같이 부릅뜬 눈과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두 눈이 사시여서 초점을 알 수 없었다. 한쪽 손에는 주먹보다 배는 커다란 진귀한 보옥을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진도건은 알 리 없었으나 그것은 용의 여의주였다.

증장천왕은 붉은 피부에 중후한 인상, 입술을 꾹 다물어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진도건은 어째선지 그런 분위기 이상으로 표정이 굳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곁에 둔 한 자루 검은 금색으로 광채가 은은하게 흐르는데 지국천왕의 것보다 진귀한 보검처럼 보였다.

다문천왕은 거무죽죽한 낯빛에 호기로운 인상을 가진 것에 비해 평상시의 표정은 유한 느낌이 있었다. 한쪽 어깨엔 창 한 자루를 기대어 놓고 있었고 다른 손엔 작은 탑 모형을 들고 있었는데 진도건은 그것이 마하발리에게서 들었던 셋째 아들 나타로부터 목숨을 지켜준다는 보패 영롱탑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사천왕들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이나 기세는 각자가 차이가 있어서 지국천왕과 증장천왕이 다른 두 명의 천왕들보다 좀 더 강하게 인식되었다.

“노군과 지상의 중생이 도착하였으니 지금부터 약식으로 재판을 진행하겠다.”

제석천의 호령에 진도건은 흠칫 놀랐다.

‘재판이라니? 설마 나를?’

하지만, 이내 떨어진 호령에서 의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증장천 비루다카, 앞으로.”

촤르륵!

그 호령에 증장천왕이 갑옷의 요란한 마찰음을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중앙에 서서 무릎을 꿇고 제석천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거느린 팔장군 수좌 위타천이 인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나의 명령을 무시한 채 지옥의 염마(閻魔)와 결탁하여 인세에 과도하게 관여하려던 정황이 발각되었다. 이렇게 증장천의 위계가 무너진 일에 대한 책임이 있을 터. 비루다카, 인정하느냐?”

“인정하옵니다.”

“본래는 증장천왕과 위타천의 직위를 일만 년 동안 한 등위씩 강등하고 철위산에서 노역을 져야 마땅하겠지만, 이 사태가 발발한 원인이 따로 있는 바 문제가 모두 해결된 뒤에 공과를 다시 평가하여 징벌을 결정하겠다. 인정하는가?”

“인정하옵니다.”

“다음! 진도건, 앞으로 나오라.”

증장천왕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령이 떨어져 얼떨결에 증장천왕이 섰던 중앙 자리에 가서 서자 제석천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죄인들이 인세에 혼란을 부추겼다고 하나 천인들이 내려가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육도의 균형과 천상의 규율에 위배되므로 진도건은 나 제석천과 태상노군의 대리자로서 우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데 일조하라. 받들겠느냐?”

“음…….”

진도건은 할 말이 없어져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대답한 건 혈마였다.

“대답 안 하고 뭐 해? 귀하신 분들이라 귀찮은 일은 인간에게 떠맡기고 하늘 궁전에서 농땡이 피우겠다고 하시잖냐.”

혈마의 목소리는 제석천과 사천왕, 뒤의 천인들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진도건은 그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걸 보고 땀을 삐질 흘렸다. 온화한 기온 때문에 더 후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래도 제가 알면 도움이 될 만한 거라든지 유용한 무구라도 하사해주시면 감사히 쓰겠습니다.”

“선견성의 무구들은 평범한 인간의 몸으론 감히 다룰 수 없는 물건들이니 네가 열반에 들어 다시 수미산에 닿으면 그때 상으로 주마.”

“안 주겠다는 소리.”

“시끄럽다!”

지국천왕이 호통을 치며 혈마를 꾸짖는데 그것은 곧 진도건의 귀에 호통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진도건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됐다.”

제석천이 손을 들며 지국천왕을 말렸다.

지국천왕은 사천왕의 수좌임과 동시에 제석천의 직속 휘하이기도 해서 제석천의 명령에 가장 절대적으로 따르는 천신이었다.

“너희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여기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현재 위타천과 염마는 그들의 육신이 각자의 영역이 머물러 있으나 정신이 구속당하여 자신의 기운을 인세에 계속해서 빼앗기는 상황이다. 위타천을 찾아 해방해야 천상의 질서가 다시 바로 서고 육도의 균열이 치유될 것이다.”

“위타천은 징벌 대상이 아니었나?”

“크흠!”

혈마가 딴지를 걸자 제석천이 헛기침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상노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제석천.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필요한 사항을 간명하고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천주가 되어서 민망할 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모든 게 마무리 되면 인간들의 힘은 자연히 떨어질 테니 걱정할 만한 부작용들은 없을 것이오.”

“흐음, 그대가 보증인이 되겠소?”

“그렇게 하리다.”

“……좋소. 진도건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 아수라가 빙의한 구마진을 처치하라. 그럼 네가 마하발리와 있던 영역도 닫히면서 거기 있던 자들도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스칸다와 야마란 자들을 찾아 죽여라. 이놈들에게 위타천과 염마의 의식이 속박된 듯하니 해방이 긴급하다. 염마는 지옥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써야 하고 위타천은 천상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전쟁을 우리와 함께 대비해야 한다.”

“천상에서 전쟁이 벌어진다고요?”

“작은 가능성이지만 우리는 매우 크게 염려하고 있다.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지배자, 제육천마왕 천마, 달리 마라 파피야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어쩌면 위타천과 염마를 속박한 장본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악심이 생각보다 크다면 우리는 그를 상대로 전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육도의 많은 생명이 나락(奈落)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천마……!”

그것은 천마신교의 교주들 또는 단지운을 상징하는 호칭.

진도건으로선 그 이름을 새로운 느낌으로 여기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적잖이 놀라며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천마신교가 가져오는 위협이 비단 인간 세상과 강호무림뿐만 아니라 천상도를 비롯한 육도 전체에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태상노군이 진도건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거들었다.

“단지운과 단원진, 두 사람 모두 처단해야 할 테고 누가 마지막 목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일을 마무리하기 전에 스칸다와 야마를 반드시 처치해야만 하네.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절차가 완성되기 어려워.”

“……알겠습니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태상노군과 제석천, 사천왕도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석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혈마여.”

“왜?”

“네가 바라보는 우리 천신들의 모습은 어떠하냐?”

“칭찬, 경외, 존경 뭐 이런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 너의 솔직한 생각을 묻는 것이다.”

“크하하하!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주지. 너희들은 뭐든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으나 실상은 아집의 틀에 구속되어 주어진 것만 좇는 구제 불능의 중생들이다. 신? 엿이나 처먹어.”

비록 혈마의 말이 의식의 목소리로 발현되는 것이었으나 진도건은 자신이 직접 말한 것처럼 느꼈으므로 그 내용들에 매우 놀랐다. 그건 옆에 있는 태상노군도 마찬가지였으나 의외로 제석천이나 사천왕 등은 표정만 잠깐 움찔할 뿐 그 이상의 동요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석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너도 이 세상을 떠나면 신격을 갖추게 될 운명이 아니던가?”

“나시드 그년에게 들었나 보군.”

“그렇다. 그리고 알리 라 다바스도 그리할 참이 분명하지.”

“씨발, 그게 그 연놈들이 짜놓은 극본이라면 기꺼이 춤을 춰줄 것이야. 그리고 내가 신격을 갖추었을 때, 그 연놈들 모가지들부터 비틀어버릴 테다.”

혈마가 분노를 가감 없이 토해냄에 제석천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신격을 갖출 놈의 입에서 토설하는 게 매우 인간적이야. 저급해.”

“저급하다는 말은 저도 듣기 거북하군요.”

“오, 너 말 잘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진도건과 거기에 맞장구치는 혈마를 보면서 제석천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우리 천인천신들이 듣기에 저급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진정한 열반에 들어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 부처가, 완전자가 된 이들은 고귀한 천인들이 아닌 천박한 인간들이었다. 혈마여, 신이 고깝던가? 그렇다면 널 담아주고 있는 저 인간과의 인연을 잊지 마라. 그럼 적어도 우리보다 그리고 그 연놈들보다는 좀 더 나은 신이 될 것이다.”

“뭐?”

“예?”

진도건과 혈마가 각각 다른 부분에서 놀라 반문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태상노군은 두 사람 마음을 읽고 모두의 반응에 공감하면서 웃음 지었다.

“노군, 계속 지켜보기에 저급하니 인제 그만 돌려보내시오.”

제석천은 자리에서 몸을 비스듬히 틀어 앉아 시선을 돌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태상노군이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수미산 하늘들의 건승을 빌겠소이다.”

태상노군과 진도건의 발아래 태극이 떠올라 두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존재는 수미산 정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옅은 발자국만이 남아 부처가 되지 않은 한 인간이 신선의 손에 이끌려 수미산을 다녀갔음을 잠시 회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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