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 제72장. 수미산 도리천(須彌山 忉利天) (4)
진도건과 태상노군은 날아올라 어느새 하늘의 원에 닿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영역의 관문에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늘의 원 너머는 까마득한 어둠에 별빛만 가득한 미증유의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도 비교적 침착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보이십니까?”
태상노군의 평가에 반문하면서도 진도건 스스로 감정적 동요가 그리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어째서 그리 묻는 게냐?”
“노군께서 내려오시기 전에 그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마하발리는 제석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채화 선인은 노군께서 제석천과 함께 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그곳은 도리천일 테니 바로 그곳에 도달할 줄 알았습니다.”
“하긴 눈앞의 세상이 휙휙 바뀌는 걸 경험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그 정도로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네. 천신들 가운데서도 범석(梵釋)만이 그 정도의 자격이 있을 뿐이지 영역을 넘어가기 위해선 알맞은 절차가 필요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작은 영향 정도만 끼칠 수 있는 것이 한계라네.”
“그럼 이곳은 무엇입니까?”
태상노군이 품속의 족자를 살짝 꺼내 보였다가 다시 품속에 넣었다.
“제석이 하늘 문을 열 수 있다면 나는 이 보패 태극도(太極圖)를 이용해서 소우주(小宇宙)를 건설하여 영역을 넘나들 수 있네. 그들보다 행보가 자유롭기에 모든 신과 천인들의 중재자가 된 것이지.”
“……놀랍군요.”
“놀란 눈치가 아닌데?”
“……엄두조차 못 낼 그런 능력이니까요. 하지만, 그보단 이런 신들의 세상이 실재한다는 게…… 다시 생각해봐도 쉽게 믿어지진 않습니다. 이렇게나 인간 세상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게 말이죠.”
“흐음, 내가 말하고 싶은 지점으로 알아서 다가오는구나. 그래, 바로 거기에 우리가 원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있느니라.”
별이 떠다니는 어둠은 몹시도 적막하고 차가웠지만, 진도건은 미증유의 기운이 보호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피부에 닿는 감각이라는 것이 전무함에도 느리건 빠르건 간에 지속해서 어디론가 방향성을 가진 채 유영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육도는 피안(彼岸)에 이르기 위한 윤회의 굴레에 묶여있는 세계들. 자네가 지금까지 경험했듯이 각각으로 실재하고 있지만, 보통의 인간으로선 그저 하나로써 심상(心想)에 그칠 수도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은 많은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수양하기에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닐세.”
“그러한 개념은 이미 설법(說法)과 경전 같은 것들로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배우면서 지금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축복과 다름없다고 가르치는 것과 지금의 자네처럼 천신천인, 신선들을 마주하거나 혹은 그런 존재들이 심상에 나타나 미혹(迷惑)함으로써 그 존재를 명징하게 인지하게 됨은 다른 문제이지. 그런 특별한 경험은 존재인지의 강화뿐만이 아니라 쓸데없는 환상을 심어주어 육도윤회의 원인인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을 증대시키거든.”
“그것은…….”
“천상에 사는 자들의 오만함이랄까? 자신들의 우월감에 취해 즐거움만이 가득하니 괴로움을 벗어나는 수행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지. 그러니 감히 인간 세계에 간섭하여 미몽을 심어주어 오히려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야. 무림인들이 더 큰 힘을 좇는 것처럼 말이지. 그것이 꼭 완전자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지.”
“더 큰 권력, 명예, 재물 같은 걸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걸 지적하시는 거군요.”
“그렇다네.”
“하지만, 인간들 전부가 그런 수양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살아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드는 것만이 길이 아니야. 행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다면 죽는 순간에 생전의 고뇌와 업보를 내려놓으면서 영적 열반에 들 수도 있네. 그런데 천상의 천인들이 오만함에 빠져 인간들을 미혹시킨다면 그게 어디 바람직하겠느냐? 그렇기에 고대로부터 그런 간섭을 조금씩 줄여온 것인데, 알리 라 다바스가 넘어오면서 그 흐름이 역전되어버렸어. 알리 라 다바스가 자신들의 세상에서 끌어온 신성력이 천상도의 천신, 천인들의 인간을 향한 간섭을 야기한 것이야. 신들의 경쟁이라 여기며 거기서 유희를 찾으려는 것이지.”
“그게 지금 천마신교와 창천맹을 위시한 무림인들 사이의 전쟁으로 나타난 것이군요.”
“아무래도 대표되는 전쟁이니까. 그리고 그 구도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제석천이 얘기해줄 것이네. 그는 천주(天主)로서의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처럼 이런저런 문제들을 고민하기보다는 자기들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 물론 그의 고민이 얕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중심이 천상도에 놓여 있어서 말이야.”
“……어렵군요. 그럼 노군께서는 제게 맡기실 일이 있으십니까?”
진도건의 질문에 태상노군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침착함은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러니 지금과 같은 천변만화한 순간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게야. 욕심은 적으나 책임을 질 줄 알고 고행을 마다하지 않아. 사안을 현명하게 바라볼 줄 알고 올바른 길을 선택할 혜안을 가졌지.”
진도건은 태상노군이 갑자기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그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말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낯간지러운 소리도 하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자네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다네. 그래서 나와 알리 라 다바스의 거래에 적합한 자질이었기에 주백자와 조강선 두 반선과의 인연으로 인도했던 것이지.”
“거래…… 라고요?”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우리는 천상도의 오만함으로 생기는 반복되는 악영향의 고리를 끊고 육도를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네. 알리 라 다바스는 그 점을 간파하여 천마신교의 발호로 나를 끌어들였고 인간 세상의 재안정을 이룰 방법을 제시했네. 나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어. 다바스는 특별한 혼돈의 영격(靈格)을 탄생시키고 싶어 했고 그것을 잉태할 만한 적합한 인간 그릇을 원했네. 그래서 조강선 등을 통해 자네를 완성하여 제시했고 다바스는 일월신마를 통해 자네 안에 혈마를 잉태시킨 것이지. 하아, 기분이 나쁠 텐데 내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얘기를 들어도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요.”
태상노군은 그 뒤로도 설명을 더 들려주었다.
알리 라 다바스가 태상노군에게 주문한 것은 ‘혼돈의 영격’을 담을 수 있는 인간 그릇.
특히 인간이 스무 살 이상 충분히 장성하여 성숙한 영혼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혼돈의 폭주를 감내할 수 있는 그런 그릇을 원했다.
태상노군은 그런 그릇을 점지하기 위해 신선의 자질과 평정에 타고난 기질이 있는 진도건을 선택해 주백자와 깊은 인연으로 함께 반선지경에 이른 조강선과 인연이 닿도록 인도한 것이고 조강선이 창안한 원류검결을 통하여 선천진기를 강화한 것이었다.
홍천환의 폭주는 태상노군이 상정한 기준보다 강력했다. 하마터면 진도건의 영혼을 모두 삼키고 그 몸을 차지할 뻔했는데 그것은 알리 라 다바스가 원했던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상노군은 그 예상치 못한 강도에 직접 진도건의 영혼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고, 조강선으로 하여금 다시 회복하도록 하였으나 이후에도 진도건과 혈마가 공존을 선택하기까지는 그로서도 계속해서 예의주시해야만 했었다.
진도건은 태상노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가졌던 모호함과 의문점들이 해소됨을 느꼈다.
혈마라는 또 다른 영혼을 안에 품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위해 싸우고 나아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그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차곡차곡 해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지나온 시간의 의미와 목표가 분명해지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내재한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 깨닫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혈마가 가리키는 방향을 좇아 달려온 끝에 그 의문점을 먼저 해소하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과 진도건이 느끼는 감정은 혈마에게도 충분히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역시 놈을 직접 만나 봐야 뭘 의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군. 당신에게 뭔가 새로운 걸 들을 수 있길 기대했었는데, 내가 짐작할 수 있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없어. 진도건 이놈의 운명보다 내 운명을 먼저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내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게 있겠지.”
“진도건 이놈이 신선의 자질을 가졌다고 했지?”
“그렇다네.”
“달리 말하면 인간으로 태어나 신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는 소리.”
“으흠.”
“만약 나타의 경우처럼 이 녀석이 태아나 아기였을 때 내 영혼을 주입했다면 나는 이놈의 자질을 이어받아 그놈처럼 혼돈의 신이 되었겠어. 자기와 같은 인간에서 신으로 말이야.”
“오호.”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놈은 날 자기와 같은 경로로 신격을 갖추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그저 영혼으로만 남아있으면 말도 안 통할 테니 신격을 갖출만한 인간의 인격체에 어느 정도 물들임으로써 말이 통할 수 있는 상태를 원했던 것 같아. 이런 내 추측은 어떠냐?”
“생각보다 똘똘한 친구로군. 그런 흥미로운 추측을 자네들이 태어나기도 전인데도 먼저 예측하고 물어본 내게 못 미치지만 말이야. 허허, 아무튼 바로 그런 내용으로 물어보니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
“하지만, 역시 탄생 의도는 듣지 못했고? 파악도 못 하고.”
“뭐 그렇지.”
“별로 똑똑하지도 않네.”
혈마가 마지막엔 비아냥거리며 얘기하자 태상노군이 물끄러미 진도건을 쳐다보는데 괜히 사이에서 민망해졌다.
“……이만 도리천으로 넘어가세.”
“잠깐.”
“뭔가?”
“당신이 느끼기에 그는 선한 신인가, 악한 신인가? 나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감정은 어떤 느낌이었지?”
진도건은 혈마가 던진 질문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도건이나 혈마나 어차피 신들이 설계한 운명의 흐름에 놓여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들의 의도나 목적이 얼마나 순수한지, 불순한지는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태상노군과 같은 신의 판단은 분명 중요한 잣대가 되어줄 수 있을 터였다.
태상노군도 둘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다.
“혼돈의 신에게서 선악의 일면만을 기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일세. 하지만, 내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해줄 수 있다네. 분명 그의 태도가 선악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줄타기하는 듯하지만…….”
태상노군이 대답하면서 가볍게 손짓하자 점점 눈앞이 환한 빛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뜸 들인 대답을 마무리 짓는다.
“……그래서 혈마 자네와 많이 닮았어. 꽤 많이 말이야.”
진도건이 갑자기 눈앞이 환해져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혈마가 그 말에 투덜대며 반응했다.
“망했군.”
“후후후!”
진도건이 실소를 흘리면서 눈부심 사이로 태상노군의 미소를 함께 느꼈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온통 감싸자 이전의 차가움은 사라지고 따스한 기운이 그 자리를 대체하여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태상노군과 진도건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오……!”
진도건의 입에서 작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탄성을 들은 태상노군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열반에 들지 아니한 인간의 몸으로 수미산(須彌山)에 이른 최초의 인간이 된 것을.”
수미산.
인세(人世)에선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눈앞에 우뚝 서 있고 울창한 산림 사이사이로 중턱과 정상쯤에 황금빛 광채를 내뿜는 사찰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크기도 매우 컸다.
위로는 구름이 회오리치듯 늘어서 있었으나 그 흐름이 완만하여 고요해 보였는데 미증유의 신성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고 거리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떨어진 산 아래로 수미산을 둘러싼 금빛 산맥들과 푸른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섬들과 지평선 끝자락을 따라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감싸듯이 첩첩산중의 장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두가 불교의 우주관을 이루는 상징적 지형인 칠금산(七金山), 함해(鹹海), 사대주(四大洲), 철위산맥(鐵圍山脈)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날아가는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 지평선 가까운 거리쯤에 해와 달이 각각 떠 있어서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엔 밤이란 없는 듯하였고 세상이 너무나 따스하여 그 온기만으로도 행복감이 가득 차오를 정도였다.
“정말 놀랍습니다……!”
“천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라더니 과연 그럴만하군.”
진도건과 혈마 모두 크게 감탄했다.
하지만, 태상노군은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온기에 너무 취해있지 말게. 평범한 인간이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내면 인세로 돌아갔을 땐 지독한 무기력증에 빠지거나 환각을 보고 알 수 없는 중독 증세를 느껴 양귀비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잠깐 풍경에 취해있었던 진도건은 태상노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깨었다.